20화.
식탁에 남은 음식이 없었다. 아무리 천천히 먹으려고 해도 음식의 양은 정해져 있었고, 별로 식욕이 없던 것처럼 보였던 이현이 해연을 따라 식사를 했기 때문에 금방 동이 났다. 해연이 슬쩍 눈치를 보기 무섭게 이현이 “자꾸 그렇게 유혹하지 말라니까요.” 하며 경고를 했다.
“안 봤어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해연의 행동에 이현이 피식 웃으며 식탁을 정리했다. 도우려고 했는데 거실로 가 있으라며 주방에서 쫓겨났다. 그 모습으로는 정리하는데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해연도 토를 달지 않고 그의 말에 따랐다.
해연은 이현의 눈치를 살피며 방으로 슬쩍 들어갔다. 그러고는 서둘러 옷장에서 속옷과 가벼운 반바지, 상의를 꺼내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살금살금 최대한 소리를 죽여 욕실 문을 잠그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현이 그녀의 티 나는 행동에 웃음을 터트렸다는 것도 모르고.
입고 있던 티셔츠는 아랫단이 젖어 더 이상 입고 있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성욕이라는 것에 휘말리니 몸이 시도 때도 없이 반응했다. 그의 눈빛, 말 한마디조차 흘려들을 수 없이 자극적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방탕하게 살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육욕에 가득한 나날이었다.
그녀는 옷을 벗어 세탁물 바구니에 넣고 간단히 샤워했다. 그리고 속옷부터 꼼꼼히 입고 욕실을 나왔다.
빨리 씻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현은 이미 주방 정리를 끝내고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와요.”
이현은 드라이기를 들고 자신이 앉은 소파 옆자리를 툭툭 쳤다. 왜 옷을 갈아입었냐며 짓궂은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말 없이 넘어갔다. 해연은 그가 심술을 부리기 전에 그의 곁에 가 앉았다. 머리에 돌돌 만 수건을 풀러 내리자 이현이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말렸다. 적당히 따뜻한 바람과 부드러운 손길이 함께 하자 몸이 노곤해졌다.
배가 부르니 더 졸렸다. 몸에 힘이 풀리자 꼿꼿이 세웠던 등이 허물어져 탄탄한 가슴에 기대어졌다.
이현은 드라이기를 끄고 부드러운 향기가 나는 해연의 정수리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었다.
“그러고 보니 못 물어봤네요. 면접은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조건도 좋았고.”
“이직”
“네.”
“전 회사는 왜 그만두는 거예요”
“음.”
별로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어떻게 말을 돌릴까 고민하던 해연은 그냥 사실대로 툭 털어놓았다. 육 개월간 지긋지긋하게 긁어 대며 수준 낮게 괴롭히던 그들에 대해 최대한 축약해 말을 하자 이현이 말이 없었다. 해연은 그제야 괜히 말했다고 후회했다. 저를 가장 괴롭혔던 사람은 이미 죽었다. 사실보다 엄청 줄여 말을 한 것이지만, 죽은 사람을 두고 굳이 뒷담화를 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해연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 이현의 품에 몸을 깊게 묻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제 당신이 오기 전에요. 전 회사 동료에게 전화가 왔었어요. 날 괴롭혔던 사람이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당해 죽었다고요.”
“…….”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거든요. 그 사람이 짜증나고 미웠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바랐던 건 아니어서…….”
“당신이 죽인 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한 번쯤 그런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아, 저 인간은 뭐하러 살고 있는 거지 여러 사람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콱 죽었으면, 하고요.”
실망한 걸까. 해연은 여전히 말이 없는 이현을 살피기 위해 뒤를 돌아보려다 오히려 더 강하게 안겼다.
“보지 말아요. 지금 내 얼굴 보여 주기 싫어요.”
“이현”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요 해연이 생각만 해도 사람이 죽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그건 좀, 자의식 과잉이에요.”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는 거였어요.”
해연은 그의 말을 가볍게 흘려들으며 웃었지만, 이현은 그녀가 자신을 올려보지도 못하게 부드러운 샴푸 냄새가 나는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고생했겠어요.”
“이제 괜찮아요. 딱 퇴사하겠다고 말을 한 날 당신을 만나기도 했고.”
덕분에 우울할 틈도 없었다며 해연이 맑게 웃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몸을 겹쳤는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언제부터 출근해요”
“못 해도 삼 개월은 쉴 생각……, 아.”
“삼 개월이요.”
“…….”
몇 개월을 쉬는지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줄줄 불어 버렸다. 해연은 잠시 제 가벼운 입을 원망했지만, 어차피 쉬는 내내 그가 계속 붙어 있을 것 같아 숨겨 봤자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현은 계속 자신과 붙어 있어도 되는지 궁금해졌다.
어제 함께 있다가 일이 있다고 잠시 떨어져 있긴 했지만, 곧 돌아왔다. 그는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물어볼까 했지만,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뿐이었지만, 그의 집에 머무는 동안 어마어마한 재산의 격차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들으면 심란해지기만 할 것이다. 지금도 부담스러운데 여기서 더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이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설마 비밀이었던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아, 쉬는 동안 뭐 할까요”
“흐음.”
해연이 열심히 말을 돌렸다.
“너무 오래 집에만 있었잖아요.”
“나는 집에만 있는 게 좋은데.”
“답답하지 않아요”
“나와 있어서 답답했어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실망이에요. 난 그냥 당신과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데.”
“아, 정말. 진짜 그게 아니라니까요.”
“몰라요.”
이현이 새침하게 삐진 목소리를 내서 해연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어 버렸다. 그가 일부러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는 꽤 낮은 편이었는데, 새침한 척하는 건 또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그래서 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가 귀여운 것과 집에만 계속 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해연은 억지로 웃음을 가라앉히고 짐짓 엄격한 목소리를 냈다.
“나도 당신하고 있는 게 좋아요. 하지만 우리는 외출을 할 필요가 있어요.”
“흐음.”
“여행 갈까요 해외도 좋은데.”
“……사람 많은 곳은 싫어요.”
번잡한 곳은 싫다는 이현의 말에 해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비싼 돈을 주고 사람에게 치여 돌아다니는 건 휴가가 아니었다.
“그럼 휴양지로 갈까요”
“해연이 정해요. 난 어디든 상관없어요.”
“같이 정해요. 사실 해외여행이 처음이라 잘 몰라요.”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항상 정신없이 일했었기에, 회사를 이렇게 오래 쉬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연차가 있었지만, 돈을 모아야 하는 해연으로서는 조금의 사치도 꿈꿀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안 쓴 연차는 모두 수당으로 나와서 그것도 쏠쏠한 목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기분을 내기 위해 가는 것은 일박이일의 짧은 국내 여행 정도였다. 게다가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번잡한 걸 싫어하는 건 해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쉬는 건 집이 최고였다. 그럼에도 외출하자고 하는 것은 이러다 쉬는 내내 그와 섹스만 하고 지낼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휴양지에 가서도 이럴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 문제였다. 집이 아닌 탁 트인 공간에서 있으면 기분 전환도 되고, 다시 출근하기 전 뭐라도 했다는 안도감도 들 것 같기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노트북 가져올게요.”
“네.”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을 가지러 가려는데 이현이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왜 일어나요 앉아 있어요.”
“내 마음이에요.”
“……그래요.”
거실이 넓지 않은 탓에 맞은편 벽에 딱 붙은 책상까지 몇 걸음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현은 해연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잠깐도 떨어져 있지 않겠다는 듯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좋았다. 아주 많이.
그와 거실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러그를 뒹굴며 여행지 몇 곳을 골랐다. 고작 인터넷을 검색하는 것뿐인데 단시간에 수많은 정보를 찾아보니 금방 피곤해졌다. 해연이 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자 하얀 손이 노트북을 닫았다.
“이제 그만 봐요.”
“네…….”
“피곤해요”
“이상하게 기운이 없어요.”
“내가 너무 괴롭혔나 봐요.”
“알긴 아는 거예요”
“조금요.”
이현이 동그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잠깐 자요.”
그의 손이 등을 토닥였다. 해연은 언제 눈을 감았는지도 모르게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싶을 정도로.
* * *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 맨살에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간지러워 해연은 작게 웃었다. 잠은 끊임없이 쏟아져 정신이 몽롱했다. 깨어나고 싶은데 깰 수가 없다. 계속 치대던 손은 여전히 깨지 않는 해연을 포기한 듯 그녀의 몸 위에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을 살짝 건드리고 사라졌다.
이현의 검은 눈이 연약한 숨을 흘리는 창백한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가두는 게 편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나돌아 다니게 둬요”
윤시후가 감췄던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함께 있던 안주희가 본가로 잠시 돌아간 사이 입이 간질거려 못 참고 나와 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돌아 다니게 두었다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침 흘리고 달려들 것 같은데.”
이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오로지 제 품 안에서만 안정을 찾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네게도 이 냄새가 나는가 보군.”
“누나는 못 맡더라고요.”
이렇게 지독한데 어떻게 못 맡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윤시후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내렸다.
“지금은 주인 냄새에 가려져서 안 나니 그나마 낫지만, 요.”
정확히는 정액 냄새. 주인은 여자의 몸에 폭격하다시피 영역표시를 했다. 보통은 그 냄새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정말 후각이 예민한 놈들은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 세계에 섞이면서 식인이 금지되긴 했지만, 주인이 잠적한 이후 금제는 끊긴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