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17화 (17/113)

17화.

장난기가 들어 손을 떼어 내려 하자 이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사이를 좁히고 빠져나가려던 해연의 손을 고정했다.

“아파요.”

“그러게 왜 빼려고 해요.”

“너무 꽉 쥐고 있잖아요.”

“당신이 아프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엄살 피우지 말라며 힘을 빼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말대로였다. 딱 아프지 않을 정도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냥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부러 아프다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이 신기했다. 이현과 함께 있는 동안 아픈 적이 없었는데, 그가 어떻게 아는 걸까.

“내가 아프면 어떤 표정을 지어요”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고, 눈꼬리가 완전히 겹쳐요. 길게 주름이 잡혀서 안타까운데 예뻐요. 가끔은 더 보고 싶어서 심하게 괴롭힐 때도 있었어요.”

“…….”

“조금 심하게 섹스를 하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소리를 참는 것도. 이 붉은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이빨도 참을 수 없이 야해서 계속 서는 거 몰랐어요”

“그만해요…….”

“눈에 습기가 찬 것처럼 눈물이 맺히면 이 다갈색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는데, 빨고 싶은 것을 참느라 힘들었어요.”

“그만하라니까요.”

“먼저 물어봐 놓고.”

“이런 대답이 나올 줄 몰랐죠.”

“난 항상 티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내 머리에는 항상 그 생각밖에 없어요. 그가 너무 뻔뻔하게 말해서 순간 “그 생각이 뭔데요”라고 물을 뻔했다. 물어서 뭐 할까. 어차피 나올 대답은 뻔한데. 해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자 그가 다시 칭얼거렸다.

“우리 집에 언제 가요”

“이대로 가면 옷이 다 젖을걸요. 비가 너무 많이…….”

“그쳤어요.”

그의 말대로였다. 언제 그렇게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고 있었다. 한참은 내릴 것 같았는데.

“아쉽다.”

“뭐가요”

“당신하고 같이 비 구경하는 거 좋았는데.”

“…….”

해연은 대답 대신 돌아온 묘한 침묵에 그를 돌아봤다.

“비 싫어해요”

“아니요. 나랑 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어서 조금 신기했어요.”

항상 나쁜 일이 생긴다고요.

작게 내뱉어진 속삭임은 가련하게 느껴질 만큼 연약했다. 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해연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그가 먼저 말하기 전에 캐묻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저런 표정을 짓지 않길 바랐다.

“이제 나랑 봐요.”

“…….”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그 말 꼭 지켜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이현은 살짝 눈을 크게 뜨고 생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비가 개는 하늘처럼 이현의 얼굴에 가득 환한 웃음이 번졌다. 몇 번이고 계속 잊지 말라고, 그 말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재촉에 해연도 진지하게 대답하고 또 대답했다.

“그럴게요.”

대답과 함께 다시 그의 입술이 닿았다. 이번에는 짙고 짙어서 온몸이 뜨거워지는 입맞춤이었다.

* * *

“뭐야, 씨발. 왜 저래…….”

두드러기 나서 미치겠네. 윤시후의 버릇없는 말에 안주희 역시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윤시후가 생각 없이 꺼낸 약혼을 그냥 넘어가는 듯했던 주인은 한해연과 떨어지기 무섭게 본가로 돌아와 일족을 모두 소환했다. 다행히 피를 보진 않았지만, 주인의 기운에 바닥에 엎드린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래 놓고 인간 여자에게는 연약한 척 내숭을 부리고 있었다.

내숭이라니. 안주희는 제 생각이 적절치 못하다 판단하고 강제로 멈췄다. 하지만 옆에서 필터링 되지 않은 거친 욕설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 의미가 없었다.

“뭐 비가 오면 항상 나쁜 일이 생겨서 같이 있는 걸 싫어한다고 당연한 거 아냐 지 기분 틀어질 때마다 비를 내리면서 어떻게 좋은 일이 생겨!”

“그만해.”

“뭘 그만해. 누나도 귀가 있으면 들었을 거 아냐 씨발, 내숭도 정도 것이지. 저건 사기잖아!”

“주인께 실례되는 말 하지 마.”

“……누나도 참 누나다. 주인이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바로 충성심이 생기냐”

“너야말로 화내기 전에 조심하는 게 좋아.”

충성심이라고 웃기는 소리.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거였다. 주인은 절대로 관대한 이가 아니었다. 윤시후가 함부로 설쳐서 주인에게 화를 당하는 것도 염려가 되긴 했지만, 자신도 함께 휘말리는 건 피해야 했다. 그건 어릴 때부터 친동기지간처럼 자란 윤시후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가 없다.

주인이 오랫동안 본체로 변해 잠적한 사이, 큰 힘을 지니고 태어난 윤시후는 어릴 때부터 꽤 대접받고 자랐다. 힘을 중시하는 일족의 관례상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래서 버릇없이 자랐다는 거다. 더불어 눈치도 없고. 주인이 없을 때야 모두 오냐오냐해 주니 상관없었다 하더라도 그 행동을 주인이 돌아온 뒤에도 하는 건 문제였다.

이미 저 가벼운 입으로 인해 본가가 아주 난리가 났었는데도 왜 저렇게 정신을 못 차라는 걸까. 철이 없어도 적당히 없어야지. 안주희가 혀를 내차자 윤시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 같잖은 소리를 한다.

“내가 성인만 되면 가볍게 이길 수 있거든”

“그 전에 네가 먼저 죽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계속 건방 떨다 보면 어느 순간 시체가 되어 있을 거라고 안주희가 경고했다. 윤시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 정말 그냥 존경하는 거 맞아”

“무슨 소리야”

“아니, 그 정도면 병적인 거 같아서.”

설마 위험한 사랑이라든가, 뭐 그런 거 아니지 윤시후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얼굴로 속삭였다. 안주희는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숫자를 세며 감정을 삭였다. 안 그러면 정말 화를 낼 것 같아서.

“근데 저 여자 냄새가 정말 좋지 않아”

“……뭐”

“어떻게 먹지 않고 살려 둘 수가 있지”

윤시후는 깊어진 눈으로 주인과 입술을 맞대고 있는 한해연을 바라봤다. 한입만. 딱 한입만 베어 물면 소원이 없겠다. 분명히 입에 넣자마자 녹아내리겠지. 주인은 어떻게 저런 인간을 골라냈을까.

한해연은 주인에게 걸려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다. 저였더라면 보는 즉시 바로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발라 먹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윤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주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 강렬한 냄새가 정말 안 맡아진다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아는 주희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정말 못 맡은 게 맞겠지. 아니,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저런 냄새를 풍기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무사한 거지

“되게 신기하네.”

“또 뭐가”

“아니야, 그런 게 있어.”

어차피 누나한테 말한다고 알겠어 이 달콤한 냄새도 못 맡는 주제에. 윤시후는 짐짓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매번 사고 치는 윤시후를 일거수일투족 감시해야 했던 주희의 눈에는 모두 티가 났다.

“난 경고했어.”

“알았다고. 잔소리 좀 그만해!”

“목소리 줄여.”

아무리 지긋지긋하다고 몸서리쳐도 안주희는 끄떡도 하지 않은 채 다시 그의 행동을 지적했다. 윤시후는 질린 얼굴로 결국 입을 다물었다.

* * *

이진아는 차를 주차한 뒤에도 한동안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힘들다. 웃는 것도 누군가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는 것도 체력이 많이 소모됐다. 그래서 퇴근을 하면 기운이 쭉 빠졌다.

이진아는 카시트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눈을 감았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한해연이 이상하다는 듯 보던 시선이 다시 떠오르자 그녀는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다행히 어색하지 않게 넘긴 것 같지만, 다신 그런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차에서 나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후 와인을 마셔야지. 그다음엔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싶었다.

“……!”

이진아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짙게 풍기는 피 냄새에 황급히 문을 닫았다. 모든 잠금장치를 다 걸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냄새가 나는 방으로 향했다. 반쯤 문이 열린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인간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게다가 빈 주사기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바닥에 질척하게 번져 있는 핏물이 안으로 들어온 이진아의 발에 튀겼다. 분명 인간의 시체 조각임이 분명한 살점들이 핏물 사이사이에 떨어져 있었다. 섬뜩한 살육의 현장에서 그녀를 닮은 얼굴의 남자는 의자에 상체를 깊게 묻고 있었다.

“왔어”

제 오빠의 얼굴을 한 괴물이 그녀를 향해 비죽 웃었다.

* * *

그녀는 저 괴물이 자신의 오빠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빠는 저 괴물에게 잡아먹혔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이진아가 덜덜 떨고 있을 때, 괴물의 얼굴은 천천히 오빠의 얼굴로 변해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이진아는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완전히 깨끗해진 집에서 오빠가 그녀를 깨웠다. 처음에는 끔찍한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괴물은 완전히 오빠와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비웃듯 괴물은 다시 인간을 사냥해 왔다. 비명을 지르는 이진아를 향해 괴물은 네가 사냥감이 되기 싫으면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비웃었다.

죽기 싫었다. 죽지 않으려면 괴물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은 오빠의 행세를 했고, 그녀는 괴물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싫은 것은, 저 괴물이 오빠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반갑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었다. 만약 오빠가 살아 있었다면 저런 얼굴이겠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 가족을 살해하고 먹은 가해자를 상대로.

한번은 정신을 놓고 왜 자신은 안 죽였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물어 놓고도 제 건방진 말에 괴물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벌벌 떨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자신을 괴물은 재밌다는 듯이 감상하며 그럼 또 다른 신분을 찾아야 해서 귀찮다고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앞으로도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절망하게 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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