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16화 (16/113)

16화.

이 남자가 또. 해연의 눈에 비난이 서리자 이현이 툴툴거렸다.

“말만 하면 먹여 준다면서요.”

“제가 말한 건 음식 얘기였어요.”

“그쪽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아요.”

“계속 굶으면 안 돼요. 가요, 내가 사 줄게요.”

해연이 그의 품에서 훌쩍 빠져나왔다. 이현도 굳이 그녀를 잡지 않고 자신의 손을 끌어당기는 대로 순순히 이끌려 갔다.

물어 봤자 대답도 해 주지 않을 것 같아 한정식집으로 골라 들어왔다. 그의 집에서 먹었던 맛은 안 나겠지만, 그래도 한식을 주로 먹던 것을 생각해 입맛에는 맞겠지 싶었다.

하지만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던 건지 이현은 흥미 없는 표정으로 음식을 깨작거리기만 했다.

“맛없어요”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해연은 젓가락을 들어 음식 맛을 봤다. 고급 한정식답게 은은한 맛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맛을 먼저 보고 괜찮다 싶은 음식을 이현의 그릇 위로 올려놓았다. 이현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젓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먹었다.

“맛있죠”

“……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해연은 다시 다른 그릇에 소담하게 놓인 갈비찜의 살점을 발라 이현의 그릇 위에 올려놨다.

“이것도 먹어 봐요.”

형식적으로 깨작거리기만 하던 이현은 해연이 주는 음식은 곧바로 집어 먹었다. 그러고는 다시 해연을 바라봤고, 해연은 저도 모르게 음식을 하나하나 골라 그의 그릇 위로 올려놓았다. 몇 번을 반복했을까. 이현은 자신의 그릇으로 향하는 해연의 손을 잡고 젓가락에 집힌 음식을 입안에 넣었다.

눈을 그녀에게로 향하고 음식을 음미하는 이현의 표정은 꼭 그녀를 발라먹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해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맛있어요.”

“그, 그래요 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음식이 맛있다는 뜻일 텐데, 이상하게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음식점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해연은 자신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볼을 탐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결국 이현의 배가 어느 정도 부를 때까지 열심히 음식을 옮겨다 준 해연은 식당에서 나오고 나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현은 카드를 지갑에 집어넣는 해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가 지갑을 가방에 넣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냉큼 다가와 손을 잡았다.

누가 보면 도망갈 사람을 잡는 줄 알겠다. 해연은 살금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자신의 손가락과 얼기설기 얽힌 그의 가지런한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봤다. 적당히 서늘한 온도가 천천히 해연의 체온과 비슷해졌다. 그 작은 변화가 뭐라고 기분이 이상해진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걷던 해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깍지를 낀 그의 손이 계속해서 그녀의 손등을 쓸어내리는 바람에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만 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속에서 뭉근하게 끓고 있는 열기를 가라앉혀 주지는 못했다.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이현의 차가울 정도로 정갈한 얼굴이 보였다.

시선을 느낀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무심하던 눈이 그녀를 향해 달콤하게 휘었다. 순식간에 온도가 올라가는 그의 변화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금 전의 표정과 완전히 달라진 얼굴이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한껏 부풀었던 열기가 단번에 가라앉을 정도로. 해연이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이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 순간 해연의 속에서 싹 틔웠던 경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치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는 듯이.

“왜 그렇게 봐요”

“……이제 뭐 하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

정말 한결같았다. 순진한 척 무해한 얼굴을 했지만,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여기서 말려들면 분명 집 밖으로 나올 일이 요원해질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해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그럼 여기서 헤어져요”

“왜 헤어져요”

“집에 가고 싶다면서요.”

당신은 당신 집에, 나는 내 집에. 해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 기울이던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길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난 당신하고 떨어져 있을 생각이 없는데.”

“그, 그렇다고 계속 같이 살 수는 없잖아요. 우리가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쓸데없는 말을 했다. 해연은 황급히 말을 돌리려 했지만, 이현이 환하게 웃으며 말꼬리를 잡았다.

“결혼해 줘요.”

정말 이 남자는 대책이 없었다. 기가 막혀서 웃음만 나왔다.

“우리 만난 지 이제 삼 일 됐거든요”

“얼마나 만나면 결혼할 수 있어요”

“그건…….”

“한 달”

“그것도 너무 일러요.”

“그럼 두 달이면 돼요”

“……하아.”

이현은 그녀가 알고 있는 기존의 상식과 너무 거리가 먼 존재였다. 하지만 계속 어린애처럼 보채는 그에게 넘어가고 있는 자신도 문제였다. 자꾸 이렇게 그녀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구니까 신중해지려는 이성이 점점 사라져만 갔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해연은 연애에 관심도 없었고, 하물며 결혼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꾸 이현과 함께 있으면 그와 연애를 하는 것도,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난 지 고작 삼 일이 됐을 뿐인데, 그 사실을 계속 잊게 된다.

“나하고 결혼하기 싫어요”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그와 함께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문제였다. 해연이 고개를 젓자 잠시 모호한 표정을 짓던 남자가 나른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상한 초조함에 바짝 마른 입술을 핥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부모님이 안 계세요.”

“……고생했겠군요.”

“네. 그것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어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은 해연의 잘못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그녀에게 무수한 상처를 주었다.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더 이상 상처 입고 싶지 않다는 보호 본능 아래로 사라졌다.

그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아직은 결혼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그가 자신의 거절에 뒤돌아서지 않길 바랐다.

‘날 이해해 줘요. 우리 천천히, 천천히 가요.’

새파랗게 맑던 하늘에서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 얼굴에 스치던 물방울이 짙어지고 있었다. 더 많이 내리기 전에 이동해야 할 텐데. 하지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꺼내지지 않았다. 해연은 얼굴을 스치고 지나는 물방울을 맞으며 이현을 올려 봤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할까.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이현은 해연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뭐, 가요”

“이런 말을 하면 당신에게 상처가 되겠지만…….”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해연의 심장이 불안하게 떨렸다.

“당신이 힘들게 살아서, 살아가는 것에 급급하느라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이라는 걸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가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했다. 해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길고 곧은, 섬세한 손이 그녀의 볼을 쓸었다. 볼에 묻었던 빗물이 그의 손가락에 붙어 사라졌다. 이현은 줄곧 해연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결혼을 보채지는 않을게요.”

“…….”

“대신 나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 주세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어떻게든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애원하는 것 같은 속삭임은 진득한 늪처럼 그녀의 발목을 잡고 더 깊숙한 곳으로 질질 끌고 갔다.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아주 작았던 빗방울이 조금씩 두꺼워지고, 수없이 많아졌다.

“저쪽으로 가요.”

해연은 가만히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이현의 손을 끌고 근처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일기예보에 없었던 비였다. 갑자기 내린 비에 당황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닌지, 길거리는 소란스러워졌다.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는 사람들, 외투를 머리에 쓰고 비를 피해 상가로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얼마나 내리려나.

살짝 하늘을 올려다보니 잠시 내리고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았다. 해가 조금 남아 있던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 많이 맞았…….”

이현에게로 고개를 돌려 묻던 해연은 제게로 다가온 하얀 손에 말을 멈췄다.

“젖었어요.”

볼에 달라붙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떼어 내는 손길이 매우 느렸다. 눈가를 부드럽게 스치는 손가락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손길이 멈췄을 때,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약간은 서늘해서 더 자극적인.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졌다. 축축하게 젖은 점막이 붙었다 가볍게 떨어졌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닿았다. 섹스의 전초전과 같았던 평소의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간지럽고 설레는 풋풋한 기분이 드는 입맞춤이었다.

맞닿은 입술에 심장이 있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고 감았던 눈을 들어 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에도 똑같은 감정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해연은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내려간 시선에 깍지를 끼고 얼기설기 겹쳐진 두 개의 서로 다른 손이 보였다.

살결은 둘 다 하얗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곧고 긴 손가락이 해연의 손등을 덮고 있었다. 가지런한 손톱, 티끌조차 보이지 않는 완벽한 조형의 손가락은 감탄이 새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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