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15화 (15/113)

15화.

반가운 사람을 만나서일까. 머리에 남아 있던 두통이 바람에 먼지가 흩날려 사라지는 것처럼 날아갔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해연은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언제 연락 주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기서 기다렸어요 어떻게 알…….”

강기욱이 보냈던 문자를 이현이 먼저 봤다는 것을 깨달은 해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했잖아요.”

“보고 싶어서요.”

창백한 손이 바람에 살짝 헝클어진 해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오래 기다린 걸까. 얼굴에 닿는 이현의 손가락이 차가웠다. 시원하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기가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해연은 눈을 살짝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는 계속 해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이현이 마치 눈치챘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면접은 어땠어요”

“다른 곳을 더 알아보려고요.”

“별로였나 봐요.”

“아니요. 면접은 괜찮았어요. 굉장히요. 그래도 다른 곳도 보면서 비교는 해 봐야죠.”

해연은 이현과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말을 돌렸다.

“이왕 밖에서 봤는데 오늘 데이트할까요”

“좋아요.”

“어디 갈까요”

“음.”

해연의 떠넘김에 이현이 살짝 눈을 굴렸다. 데이트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으니 갈 만한 곳을 떠올릴 수 없어서였다. 해연과 함께하는 곳은 어디든 좋았지만, 가장 좋은 곳은 그의 침대 위였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하면 타박만 받을 게 분명했다.

“당신이 정하는 게 좋겠어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말하면 혼날 것 같거든요.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해연의 볼이 붉어졌다.

“짐승이냐고요.”

“내가 뭐라고 했다고 짐승이라고 해요 무슨 상상을 한 건데요”

“……!”

“와, 짐승.”

똑같이 되돌아온 말에 해연이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이현은 짐짓 관대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나는 해연이 짐승 같을수록 좋으니까. 제가 더 힘낼 테니 계속 짐승으로 있어 줘요.”

“뭐라는 거예요”

길거리에서 투닥투닥하다 결정한 것은 영화였다. 무난하기도 하고, 요즘 잘나가는 게 뭔지 알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트렌드에 민감한 직종이기 때문에 해연은 영화나 드라마, 예능, 게임 등을 자주 살피곤 했다. 감이라는 건 방심한 사이 순식간에 멀어지기도 해서 아무리 쉬기로 했어도 유행과 가까이 있어야 했다.

해연은 이현과 함께 근처 영화관을 향해 걷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부담스러운 시선이었지만, 사람들이 왜 보는지 해연은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현은 보기 드물게 잘생겼으니까. 새까만 검은 머리카락과 나른하게 휘어진 긴 눈매가 유난히 매력적이었다. 해연이 그를 바라보자 정면을 보고 있던 이현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봐요”

“잘생겨서요.”

진짜 너무 잘생겨서 무서울 정도였다. 왜 저런 남자가 자신을 원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자 문득 이유가 궁금해졌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말이에요. 왜 그때 내 자리로 왔어요 정말 심심해서”

“모르겠어요. 해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어요. 당신만 보여서.”

그건 해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본 순간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만 보였다. 시선을 뗄 수도 없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마치 홀린 것처럼.

그게 아니었더라면 처음 만난 남자와 섹스를 할 일도, 당연하다는 듯이 사귀는 일도 없었으리라.

지금까지는 남자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고,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의심했다. 이현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남자를 만난 이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라는 것을. 그저 본능이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을 뺏긴 이후에 그걸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자 차후에 이유를 찾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해연은 그때 왜 내 손을 잡았어요”

해연은 살짝 볼을 붉힌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도 당신만 보였어요.”

“그렇죠”

이현은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살짝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본 해연의 입가도 부드럽게 휘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핸드폰 전원을 껐다. 해연은 저를 보고 있는 이현을 향해 말했다.

“전원 껐어요 아니면 무음으로 돌려 놔요.”

“……꼭 그래야 해요”

“영화관이니까요. 소리 나면 다른 사람한테 민폐라 꺼 놓는 게 매너예요.”

해연의 말에 이현이 잠시 침묵하다 그녀에게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해 줘요.”

“뭐예요. 애처럼.”

이현의 핸드폰을 받아 무음으로 바꾸려던 해연은 사소한 어플조차 깔지 않은 텅 빈 화면을 보고 멈칫했다.

“산 지 얼마 안 됐어요”

“두 달 됐어요.”

“두 달이면 얼마 안 되긴 했지만, 핸드폰 별로 안 쓰나 봐요. 어플이 하나도 안 깔려 있네요.”

“어플이 뭔데요”

“……네”

농담하는 건가 해연이 고개를 들어 이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현이 부루퉁 입술을 내밀었다.

“왜요 모르면 안 돼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 몰라요”

“이건 전화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물론, 그게 기본적인 거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스마트폰을 전화기로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옛날이야 전화만 되면 감지덕지였지만, 요즘은 작은 컴퓨터나 마찬가지였다. 컴퓨터를 켜지 않고도 이 작은 핸드폰 하나로 일을 볼 수도 있는 세상에 어플이 뭔지도 모른다니.

“설마 영화관도 처음 오는 거 아니죠”

“맞아요.”

“…….”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살았던 걸까. 장난치는 것 같지 않아서 더 황당했다. 해연은 혹시나 싶어 통화 목록을 들어가 봤다.

“이거, 나한테밖에 안 써요 왜 내 이름만 있어요”

“그럼 누구한테 전화해요. 목소리 듣고 싶은 사람은 당신밖에 없는데.”

“……일단 영화나 봐요.”

해연은 이현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무음으로 바꿀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전화 올 일도 없을 테니까. 해연은 이현이 말을 걸려고 하자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살짝 꼬집었다.

“쉿. 이제 조용히 해요.”

“……얼마나요”

“두 시간 반이요.”

마침 광고도 끝날 무렵이었다. 의자에 등을 바짝 붙인 채 앞만 바라보자 이현도 포기했는지 자세를 바로 했다. 영화는 인간과 늑대인간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였다. 클리셰에 치중한 흔하디흔한 소재였지만, 그래서 대중에게 먹히는 요소였다. 그리고 해연도 좋아하는 소재였다.

산에서 나타난 늑대가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의자가 흔들렸다. 4D 영화에서는 흔한 일이어서 해연이 더 영화에 몰입하고 있을 때, 이현이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그의 품에 얼굴을 박게 되자 해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의자가 흔들리잖아요.’

‘여긴 원래 그래요. 빨리 놔 줘요.’

‘…….’

평일 낮의 상영이라 관객이 얼마 없긴 해도 인기 있는 영화라 군데군데 사람이 있었다. 이현은 그들을 살핀 후 해연을 놓아 줬다. 그 뒤에도 포그가 깔리거나 물이 튀길 때마다 이현은 몸을 움찔거렸다. 당연히 옆에 앉은 해연도 영화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네.’

해연은 팔걸이에 올린 제 손등을 꽉 잡은 이현의 손을 보고 픽 웃었다. 의자가 흔들릴 때면 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정면을 보고는 있지만, 그의 얼굴이 은근히 경직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두고 볼까 하다가 결국 그를 끌고 극장 밖으로 나왔다.

“괜찮아요”

“뭐가요”

“완전 긴장했던데. 은근 겁이 많네요”

“인간은 정말…….”

“네”

“별 이상한 걸 다 만들어 내요.”

“혹시 산이나 동굴 같은 곳에서 살다 나왔어요 어린애들도 익숙한 걸 왜 당신이 몰라요”

누구보다 세련되게 생겨서는 현대 문명에 무지하다니. 본 게 있으니 정말이긴 할 테지만,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은 아니었다.

“내가 굳이 사용할 이유가 없었거든요.”

“아…….”

맞다. 말만 하면 알아서 대령해 주는 금수저였지. 물론 그걸로 의문이 다 해소된 건 아니지만, 해연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뭐가 문제냐는 듯 도리어 의아해하는 이현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자신과의 격차를 더 느껴 봤자 도움 될 게 없기도 했고.

여섯 시. 해연은 시간을 확인한 후 이현을 향해 물었다.

“식사는 했어요”

“아뇨. 배고파요.”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식사를 안 했어요 언제부터 안 먹었는데요”

“해연이 나가고 나서부터.”

“……너무 오래 굶었잖아요! 왜 말 안 했어요 진작 말했으면 식당부터 갔을 텐데.”

영화를 끝까지 안 봐서 차라리 다행인 상황이었다. 어딜 가지. 영화관 건물에도 음식점은 있었지만, 이현을 데려가긴 너무 가벼웠다. 해연은 근처의 괜찮은 식당을 떠올리며 이현을 끌고 영화관을 나갔다. 이현은 순순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졸졸 따라왔다.

“왜 안 먹었어요”

“당신이 없잖아요.”

“……그동안은 저 없이 어떻게 지냈는데요”

말도 안 되는 칭얼거림이 황당하면서도 귀여워 해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해연의 웃음이 멈출 기미가 없자 이현이 그 붉은 입술을 툭 내밀었다.

“해연이 없을 때는 계속 잠만 잤어요.”

“잠을 자더라도 식사는 했겠죠.”

“안 먹었어요.”

“아, 그러세요”

“정말이에요.”

해연은 이현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주변을 살피며 갈 만한 음식점을 찾았다.

“식사해야죠. 뭐 먹고 싶어요”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돼요”

“당연하죠. 말만 해요.”

자신이 사겠다고 말하려던 해연을 이현이 끌어안았다. 벌어진 코트 안의 단단한 몸에 안긴 해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랫배에 닿은 이현의 하체가 불거져 있었다. 그는 해연의 몸을 자신의 코트로 감싸고 더 바짝 끌어안았다.

“먹고 싶어요.”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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