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시간이 간당간당했지만, 다행히 늦진 않았다. 해연은 약속 장소인 태국 음식점 문 앞에 멈춰 서서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다듬었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서인지 바람에 헝클어졌던 탓이다.
빠르게 정돈한 후 안으로 들어가니 종업원이 다가왔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테이림이라는 이름으로…….”
종업원은 예약 장부를 살피더니 안내해 주겠다며 앞장섰다. 종업원은 홀을 지나 외부와 차단된 룸의 문을 열었다. 해연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앉아 있던 두 사람이 그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연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해연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아라고 합니다.”
“강기욱입니다.”
두 사람 역시 그녀를 향해 인사를 하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해연의 명함을 받은 이진아라는 여자는 묘한 표정으로 작은 종이를 바라봤다.
“곧 다른 명함으로 바뀌시겠어요.”
“아…….”
“피디님. 아직 이른 말인 것 같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하지만 어쩌죠. 저는 해연 님을 꼭 저희 팀으로 데려올 생각인데요.”
강기욱이 이진아를 말렸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눈매 끝이 살짝 올라간 여자는 서른 중반쯤 되어 보였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신규프로젝트의 총 책임자 직위까지 올라갔을 정도라면 능력이 좋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낙하산일 경우도 있겠지만 해연은 이진아의 당당한 얼굴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판단이 아직 섣부르다는 것도 염두에 둔 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회사도 해연 님께서 좋게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진아가 해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해연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옅게 웃었다. 인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이진아는 메뉴판을 먼저 해연을 향해 건넸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혹시 좋아하시는 음식 있으시면 부담 없이 시키세요.”
“피디님, 저도 마음대로 시키겠습니다.”
“기욱 님은 한도 있는 거 알죠”
“농담이시죠”
“진심인데요 이거 제 전용 법인카드예요.”
“피디님. 해연 님 앞인데…….”
격의 없이 농담하던 이진아가 강기욱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연을 바라봤다.
“죄송해요, 해연 님. 원래 기욱 님과 편하게 얘기하다 보니 생각 없이 실수를 했어요. 그리고 저 쪼잔한 사람 아니에요. 이거 모두 농담이었어요. 오해하시면 안 돼요.”
“피디님, 늦었습니다. 이미 다 들키셨어요.”
강기욱이라는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이진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모습에 해연은 조금 놀랐다.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엄연히 상하 관계의 사이인데 굉장히 격의가 없었다. 유영의 말대로 이진아 피디는 시원시원한 성격인 듯 보였다.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첫 느낌은 그랬다.
굉장히 오랜만의 면접이라 살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격의 없는 대화를 들으니 조금 긴장이 풀렸다. 아마도 이런 효과를 내려고 일부러 둘이 그런 식의 농담을 나눴던 것 같다. 하지만 해연은 풀어지려는 긴장을 다시 끌어 올렸다. 편한 분위기일수록 말실수는 더 잘 나오는 법이었다. 아무리 회사가 아닌, 사적인 공간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면접은 면접이었다.
대화는 이진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서글서글하고 대담한 성격에 중간중간 던지는 농담 속에서도 해연을 잡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부끄럽고 민망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영입하려는 태도가 기분 나쁠 리 없었다. 해연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은 선을 맞추려 노력하며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음식이 나오자 잠시 대화가 느슨해졌다. 접시에 음식을 덜다가 해연의 시선이 이진아에게 잠시 닿았다. 살짝 고개를 숙인 이진아의 표정이 어딘가 어둡게 느껴졌다. 한없이 당당해 보이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신경 쓰였다. 시선을 느낀 건지 이진아가 살짝 고개를 들고는 눈을 깜박이며 웃었다. 왜 그렇게 보냐는 말에 해연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예쁘셔서 저도 모르게…….”
“어머. 영광이에요.”
“이럴 땐 한 번쯤은 겸양의 말을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진아가 당당하게 해연의 칭찬을 받아들이자 옆에 앉아 있던 강기욱이 그녀를 타박했다.
“칭찬은 겸허히 받는 게 예의예요.”
“너무 뻔뻔하신데요.”
“해연 님, 제가 뻔뻔해요”
“아니요.”
해연이 손까지 내저으며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자 이진아가 그것 보라며 강기욱을 향해 콧대를 세웠다. 어색할 뻔한 상황은 다행히 이진아가 기분 좋게 받아 준 탓에 도리어 더 가벼워졌다. 긴장을 너무 풀었던 게 분명했다. 해연은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식사를 마치고 어느 정도의 정보를 서로 나누고 나니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 정도면 되는 걸까. 너무 오랜만에 보는 면접이라 해연은 물을 마시며 상황을 살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피디님.”
“그럴까요”
“본론이요”
지금까지의 대화가 끝이 아니었던 건가. 프로젝트가 어떤 방향성인지, 입사하게 된다면 그녀가 할 일이 무엇인지, 복지는 어떻게 되는지 등 일 차 면접에서 들어야 할 부분 이상의 대화를 나눈 뒤였다. 그런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박이는 해연을 향해 이진아가 말문을 열었다. 필요 이상으로 편한 분위기를 주도했던 아까와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혹시 희망 연봉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세요”
“네”
연봉협상을 이런 곳에서 보통 면접을 모두 마치고 인사팀과 연봉협상을 했던 오래전의 경험과는 사뭇 달랐다. 퇴사도 면접도 너무 빠르게 이루어진 탓에 희망 연봉에 대해서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던 해연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이진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해연에게 건넸다.
“먼저 이걸 봐 주세요.”
“…….”
서류는 연봉 계약서였다. 이미 자신의 이름이 적힌 계약서에는 해연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닐까. 몇 번을 다시 봐도 종이에 적힌 숫자는 여전했다. 해연이 당황해 입을 다물자 강기욱이 끼어들었다.
“혹시 부족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인사팀에 다시 승인을 받아 오겠습니다.”
“왜 이런 금액을 저에게…….”
“솔직하게 말하죠. 해연 님 움직인다는 소리에 저희만 연락한 건 아니라는 걸 압니다.”
“그건.”
“해연 님 같은 멀티플레이어는 드물어요. 심지어 멀티플레이어면서 스페셜리스트죠. 왜 그런 작은 회사에서 계속 계신 건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인력이 부족한 작은 회사에 있으면 이것저것 다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잡다하게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컨텐츠 기획자로 시작해 디자인은 물론, 홍보용 동영상까지 만들어 한 번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다.
회사에 문제가 생겨 사원들이 우르르 나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일을 떠맡아 한 것이라 그렇게 큰 반응을 받을 줄 몰랐다. 실력이라기보다는 운이 좋았다는 말이 더 맞았다. 이것저것 조금씩 할 수 있으니 멀티플레이어는 맞지만, 스페셜리스트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남들이 추켜세워 줄수록 자신을 단속했다. 그런 식으로 한번 반짝였다가 사라진 인재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찬이세요.”
“겸손이 지나치신데요.”
이진아가 옅게 웃었다.
“이건 절대적인 금액은 아니에요. 아, 물론 상한선이 아니란 뜻이에요. 그저 해연 님을 반드시 잡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면 돼요.”
“생각을 좀 더 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대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세요.”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덥석 잡을 만큼 해연의 사회경험이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사원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 이상을 뽑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디나 일을 적게 시키는 것은 아니니 기왕이면 돈이라도 많이 주는 곳이 낫겠지만, 예상보다 큰 금액은 오히려 경계심이 들었다. 돈을 주는 만큼 기대를 할 것이고,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테이림에서 제시한 금액은 전 회사에서 깎여 나갔던 자존감을 회복시켜 줬다. 그렇게 회사를 위해 일을 했음에도 순식간에 내쳐졌던 대우에 비하면 테이림은 아주 단편적으로 자신의 성과를 알면서도 제 가치가 이 정도라고 해 준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결국 사람을 가장 위로하는 것도 돈이었다. 가치의 직접적인 정의가 돈이었기 때문에.
해연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조금 전까지 사회 경험이니 뭐니 하며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 놓고 결국 돈에 흔들리고 위로받는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뭐, 나도 사람이니까.’
그녀는 저를 보고 있는 이진아를 향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 * *
생각보다 길어진 면접이 끝나고 그들은 음식점을 나왔다. 이진아는 해연과 악수를 청했다.
“내일 저녁 전에 해연 님 계정으로 메일이 갈 거예요. 확인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이 차 면접 때 다시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뵐게요.”
의례적인 대화를 끝으로 이진아와 강기욱이 먼저 몸을 돌려 걸어갔다. 해연은 그 뒷모습을 보다 음식점 앞에 놓인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사실 아까부터 미묘하게 머리가 아팠는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통증이 심해졌다.
정신을 놓고 앉아 있었더니 해가 어느덧 저물어 가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해연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라면 상쾌하게 느꼈을 텐데, 오늘은 뭔가 서걱서걱했다. 얼마나 그 자리에 있었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끝나면 연락한다더니.”
“……이현”
해연의 앞에 이현이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색 코트를 걸친 그는 여전히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현은 해연의 바로 앞까지 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