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내 얼굴이 마음에 들어요”
이현이 고개를 갸웃 하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입을 맞추려는 것처럼 점점 가까워져 오는 그의 얼굴에 해연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의 입술이 닿지 않아 눈을 슬금 떴다가 얼굴을 붉혔다. 그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가 키스할 거라고 생각했다. 무안해 입술을 깨물자 그가 더 크게 웃었다.
“이러지 말아요, 정말.”
“예뻐서 계속 봤어요.”
화내지 말아요. 이현은 뒤로 물러서려는 해연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별로 화가 난 것은 아니지만 괜히 삐진 척하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자 그가 해연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 * *
남자와 자신의 침대에 함께 누워 있는 것이 생경해 해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침대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계속 안겼음에도 자신의 집에서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런 자신과는 달리 이현은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었다.
분명 그가 곁에서 자고 있음에도 해연은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꼭 이 모두가 자신이 잠시 꾼 백일몽 같다. 그와 처음 만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해연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현.”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 보니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던 남자가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다시 한번 부르려는데 붉은 입술이 벌어져 해연의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읏.”
“자꾸 자극하지 말아요.”
그러고는 해연의 손가락을 길게 핥았다.
“이름도…… 부르지 말고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이현. 해연은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남자는 한숨을 쉬고 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몽롱하게 흩어져 해연을 바라봤다.
“겁도 없이.”
나른한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위협적인 면이 있어 해연은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해연이 조용해지자 남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는 것 같다. 잠을 자 보려 노력을 해 봤지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해연은 억지로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그를 바라봤다. 빛이 사라진 공간에서도 남자의 하얀 피부가 선명하게 보였다. 피부가 너무 하얗고 창백해서 꼭…… 살아 있지 않은 시체처럼 보였다.
조금 전보다 더 강렬한 불안감이 해연에게 몰아쳤다. 심장이 불안하게 떨려 숨이 턱 막혔다.
해연은 손가락 하나를 그의 코 아래에 가져다 댔다. 그도 모자라 그의 목에 손을 댔다. 두근두근 움직이는 맥박 소리를 느끼고 나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긴장해서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경고를, 했는데…….”
“……!”
해연의 몸이 남자에 의해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몸을 다 덮고도 남을 단단한 몸이 짓눌러 왔다. 죽은 듯이 자는 것 같던 남자는 잠기운이 완전히 걷힌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이래요”
“뭐, 뭐가요”
“남자 몸을 함부로 더듬는 버릇.”
“네”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게다가 자신이 그를 먼저 만진 것보다 그가 자신을 마음대로 만진 횟수가 비교도 할 수 없이 많다. 해연이 반박하려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내리눌렀다.
“자꾸 입술을 더듬는 건 무슨 뜻이에요”
다리와 다리가 교차해서 겹쳐지고 부드러운 해연의 가슴이 단단한 그의 가슴에 뭉개졌다.
“하고 싶어서”
“이, 이현…….”
남자는 해연의 입술을 훑었던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붉은 혀가 창백하고 긴 손가락을 핥는 장면은 도착적이었다. 해연은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 장면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러다 나른하게 풀어진 검은 눈과 마주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남자의 성기가 허벅지에 닿았다. 해연이 저도 모르게 흐읏, 신음을 흘리자 그의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
“당신도 젖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 또 육욕적이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려는 다리에 힘을 주며 해연이 그의 가슴을 밀었다.
“오늘은 정말 안 돼요.”
“……알아요.”
칫. 그가 붉은 입술을 툭 내밀었다. 해연은 이미 침대에 눕기 직전, 집안 온 구석에서 그녀의 냄새가 난다고 덤벼들던 그를 내일 있을 면접을 이유로 단호하게 밀어냈었다.
지금도 깜박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이성을 차릴 수 있었다. 해연은 그의 아래에서 몸을 꼬물거리며 빠져나왔다. 알고 있다는 남자의 말과는 달리 허벅지에 닿는 그의 성기는 더욱 부풀어 심상찮은 기세를 뿜어냈기 때문이었다.
“떨어져서 자요.”
“……먼저 건드린 사람이 누군데요.”
전등이 모두 꺼져 방은 어두웠지만, 이현의 시야에는 해연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였다. 흐응. 저 하얗고 가는 다리를 벌리고 들어가면 저를 환영하며 달콤한 물을 흘리는 곳이 있다. 그곳은 분명 그에게 황홀한 쾌락을 주겠지만, 그도 자신이 조금 심하게 그녀를 안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 처음 발정기를 맞은 짐승처럼 그녀를 안았다. 사실 지금도 그녀를 헤집고 싶지만, 오늘만큼은 참아야 했다. 인간 여자의 몸은 연약하니 이 정도는 배려해 주는 것이 좋겠지.
해연이 들었다면 기가 막혔을 생각을 하며 이현은 부러 담담한 표정을 가장했다.
“아무 짓도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 얌전히 자는데 해연이 건드려서 그런 거잖아요. 안고는 자게 해 줘요.”
“정말 그냥 잠만 자는 거죠”
“맹세해요.”
사뭇 무해한 표정으로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억울하다는 듯이 눈썹까지 축 늘어뜨린 것이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조금이나마 보였다. 해연은 설핏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현이 뒤에서 안아 왔다.
여태껏 잠이 오지 않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깊은 잠이 쏟아져 내렸다. 사락사락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섬세한 손길도, 그녀의 배를 문지르는 손길도 모두 좋았다. 미친 듯이 타오르던 열기와는 달리 상냥한 따스함이 해연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가 작게 속삭이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며 안락한 잠에 빠져들었다.
해연의 몸이 힘을 잃고 완전히 안겨 오자 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잔잔한 숨소리에 달콤한 냄새가 섞여서 흘러나왔다. 마치 손에 감길 듯 선명하다. 이현은 온 방에서 풍기는 여자의 냄새에 숨을 깊게 들이켰다. 혈액 곳곳에 그 냄새가 섞여 들었다 싶을 정도로 탐욕스레 들이키던 이현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었다.
인간의 형상이 짐승의 형태로 변했다. 검은색 갈기가 풍성하게 자라고, 날카로운 이빨과 흉포한 발톱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연약한 여자 따윈 금방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이 위협적이었다. 짐승은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해연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풍성한 검은색 꼬리가 바짝 세워진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길쭉한 콧등으로 해연을 툭 건드리니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이 반대 방향으로 굴렀다. 침대 끝까지 옮겨지자 짐승은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남은 공간에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거대한 발을 내밀어 해연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살짝 움찔 튀었던 여자의 몸이 풍성하고 부드러운 털에 닿자 긴장을 풀고 짐승의 품 안으로 더 깊이 안겨 들었다. 짐승이 저를 향해 입맛을 다시고 있는 줄도 모르고.
챕터 2
해연은 단정한 A라인 스커트와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색 코트를 마지막에 걸쳤다. 전신 거울을 보며 화장이 잘 됐는지 확인을 하는데 이현이 그녀를 따라와 물었다.
“몇 시에 끝나요”
“모르겠어요. 짧으면 한 시간 안에 끝날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어서요.”
“끝나면 전화해요.”
“알겠어요.”
“너무 예쁘게 웃지 말고요.”
제멋대로 뻗은 머리를 하고 엄격하게 경고를 하는 것이 왜 이리 귀여워 보이는 걸까. 해연은 러프한 니트와 슬렉스 차림을 한 이현을 보며 이런 남자는 백수여도 먹여 살릴 맛이 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껏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커다란 키와 넓은 어깨, 니트에 감싸인 날렵해 보이는 상체 안에 있는 단단한 근육. 그리고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자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집에 그를 두고 나오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을 마중한다고 현관까지 나와 헤어지기 싫다며 입맞춤을 조르는 남자를 상대로 빠지지 않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경사가 진 좁은 골목을 지나 지하철역에 다다랐을 때였다. 역 바로 옆에 큰 산부인과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 입구의 계단을 향해 내딛던 해연의 발이 우뚝 멎었다.
‘피임…….’
피임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자연스럽게 피임약이 연상됐다. 그리고 그게 여자 몸에 해롭다는 것도.
‘절대로 먹으면 안 돼. 피임 문제는 ’그‘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해연은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사고가 멈췄다. 지하철을 나오는 사람들은 입구에 가만히 서 있는 해연을 비켜 걸으며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고 지나쳤다. 누군가 부딪히기도 했지만, 해연은 살짝 비틀거리기만 했을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계속 그러고 있으니 사람들은 아예 그녀를 피해 지나갔다.
한참이 지난 후, 해연의 눈이 깜박였다.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주변을 돌아보다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면접 시간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았던 해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진짜 미쳤나 봐!”
무슨 정신으로 한가롭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해연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