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나도 당신 거고. 서로 공평하게 처음을 주고받았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게 어디 있겠냐며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아니, 내 질문은 이게 아닌데……. 게다가 처음으로 관계를 했다고 해서 그게 끝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논리였다. 남자의 말에 논리적인 어폐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해연은 자신의 손가락 끝을 이빨로 무는 남자를 조용히 바라봤다.
“우리, 이상한 것 같아요.”
“이상해도 돼요.”
그는 문밖에 서 있던 여자를 호출해 죽을 새것으로 다시 가져오라고 말했다. 여자는 조금 전과는 달리 딱 달라붙어 있는 그들을 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죽여 웃었다.
너무, 너무 빠르다. 이런 관계는 이상한 게 분명할 텐데…….
해연은 저를 단단하게 안고 있는 이현을 올려다봤다. 이현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겠다. 그와는 이게 맞는 것 같았다. 그에게 안겨 있는 지금이…… 가장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은 이상한 게 맞다고, 조심해야 한다며 경계하라고 말했지만, 해연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음악 소리가 울렸다.
“제 핸드폰 어디 있어요”
“……여기요,”
이현은 썩 내키지 않은 얼굴로 음식이 올려져 있던 탁자의 서랍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해연에게 건네주기 전 화면을 확인한 이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 말고 다른 남자 있어요”
“네”
“강기욱이란 남자가 내일 약속 장소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아.”
해연은 그제야 내일 면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 뻔했다. 해연의 대답이 늦자 이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누구”
내가 처음이라면서요 날 선 이현의 질문에 해연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진 사람처럼 변명해야 했다.
“면접 볼 회사의 팀장님이에요. 내일 면접이 있어요.”
“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억지로 누르는 듯 이현의 낯이 찌푸려졌다. 해연은 슬쩍 눈치를 살피며 그의 손에 들린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오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더 멀어졌다.
“입 맞춰 줘요.”
그럼 줄게요. 이현의 말에 해연이 머뭇거렸다. 키스로 끝이 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가 정염이 가득한 목소리로 한 번만 더, 하고 조르면 해연은 언제나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확인하고 해 주면 안 돼요”
“안 돼요.”
“알겠다고 답장만 보내면 돼요.”
“급하지 않은 건가 봐요.”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끼긱. 핸드폰의 테두리에 살짝 금이 가는 것이 해연의 눈에 선연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급하게 이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현은 자신에게 시달려 부르튼 입술을 기꺼이 맞이했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려는 해연의 얄팍한 수작은 먹히지 않았다. 남자의 손이 해연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타액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덮었다.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났다가 바로 닫혔다. 해연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남자의 단단한 몸이 그녀를 짓눌렀다. 정신없이 입술이 빨리고 숨이 얽혔다. 이현은 항상 그녀에게 미친 것처럼 달려들었다. 다리가 벌려진 것도 몰랐다. 아니, 자신이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를 부추기듯 엉덩이를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 하으응. ……아!”
고작 입을 맞추었을 뿐인데, 벼락처럼 절정이 찾아왔다. 해연의 몸이 지나친 쾌락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다리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고, 그의 손에 짓눌린 가슴이 아플 정도로 예민해졌다. 그의 혀가 지배하고 있는 입안은 성기에 꿰뚫려 흔들린 비부처럼 아릿했다.
“하…… 하아. 흐응…….”
온몸을 휩쓸고 간 쾌락이 조금씩 멎어갈 때쯤, 남자가 상체를 바로 세웠다. 속옷을 적시고 있던 거대한 성기를 갑갑한 바지에서 꺼내 수음을 했다. 성기의 끄트머리에서 새어 나오는 정액이 성기를 움켜쥐고 천천히 움직이는 창백한 손을 흠뻑 적셨다. 해연은 제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남자의 것을 멍하게 응시했다.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성기를 흔들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해연의 팔을 잡고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제 하체 쪽으로 밀어붙였다. 순식간에 눈앞에 불뚝 선 성기가 있었다.
“빨아 줘요.”
“이, 이혀……으읍.”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성기가 파고들었다. 너무 컸다. 입이 한도 끝까지 벌어져 턱이 얼얼했다. 이미 액을 뿜어내고 있던 성기가 해연의 입안을 더럽혔다. 귀두에 짓눌린 혀에 하얀 정액이 뚝뚝 떨어져 고였다. 남자는 그대로 허리를 밀어붙였다. 두꺼운 성기에 밀려 혀에 고인 정액이 해연의 목구멍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가 뿜어내는 것을 모조리 삼키고 난 다음에야 성기가 빠져나갔다. 콜록거리며 숨을 헐떡이는 해연을 남자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기침에 섞여 하얀 액체가 해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으읍!”
제 것으로 범벅이 된 입안을 샅샅이 훑고 나서야 남자는 완전히 해연을 풀어 주었다. 눈물로 갈색 눈동자가 뿌옇게 젖었다. 해연이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이현은 태연히 웃으며 해연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자요.”
“……하아.”
섬세한 손가락이 해연의 입술을 쓸었다.
“급한 거 아니었어요”
“당신은, ……너무 과해요.”
“이것도 참고 있는 건데요”
그가 해연의 손을 자신의 하체로 끌었다. 조금 전에 그녀의 입에 쏟아 냈던 성기가 다시 서 있었다. 해연은 질린 낯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아직 당신이 식사를 안 한 상태여서 참고 있는 거예요.”
“…….”
계속 굶어야 하나. 해연은 남자의 짐승 같은 성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손안에서 맥박 치며 부피를 키우는 것이 무서웠다. 황급히 손을 떼고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이현은 해연이 어떻게 답장을 하는지 계속 지켜봤다. 의처증이 심한 애인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최대한 담백하게, 그리고 짧게 답장을 쓰고 전송을 누르자마자 그에게 다시 핸드폰을 뺏겼다.
해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쳤나 보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남자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다른 남자가 이현과 똑같이 행동했더라면, 귀여워 보이기는커녕 불쾌감만 일었을 것이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제 물건을 타인이 멋대로 만지고 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왜 이 남자에게만은 제 기준이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걸까.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홀딱 넘어가 섹스를 한 주제에 고작 핸드폰 하나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아무래도 이 남자에게 강하게 나가긴 그른 것 같다. 해연은 자포자기한 채 그에게 왜 집에 가야 하는지 조근조근 설명했다.
“내일 면접을 보려면 집에 가야 해요”
“왜요”
“왜라뇨. 옷도 그렇고…….”
“꼭 면접을 봐야 해요”
“네.”
“흐음.”
해연은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최소 삼 개월은 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말을 하면 아마도 여기에 갇혀서 못 벗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제가 생각하고도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정답에 아주 근접했다.
이현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싶더니 이내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오늘은 당신 집에서 잘까요”
“……네”
* * *
이현은 그 특유의 느른한 말투와는 달리 극단적으로 행동력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바로 일어섰다. 해연은 올 때는 몰랐던 대궐 같은 한옥과 고아한 정원에 넋을 놓았고, 얼떨결에 운전사까지 딸린 세단을 타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아이처럼 설레는 얼굴을 하던 남자는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서자 표정이 굳었다. 해연은 제가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눈치를 봐야 했다.
부모님의 도움조차 받지 못한 해연으로서는 서울에서 자신의 집을 구했다는 것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어두워지지도 않은 저녁부터 스산하다 싶을 정도로 기분 나쁜 골목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초라하고 위험한 동네였다.
남자는 해연의 집 안에 들어와서도 말이 없었다.
“…….”
“아무래도 여기서 자기는 조금 그렇죠”
그의 방보다 작은 집이었다. 그나마 신축 건물이어서 깨끗했지만, 그렇다고 위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기가 침실인가요”
“네. 맞아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함께 있으니 집이 좁게 느껴졌다. 이현은 어색한 얼굴을 한 해연의 손을 잡고 그녀의 침실로 향했다. 작은 방 안은 그녀가 세심하게 고른 가구들과 침대, 바닥에 깔린 러그로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돋보였다. 방 안을 둘러보던 이현은 그녀의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해연은 그런 이현의 웃음에 안도했다가 이내 흠칫 놀랐다. 자신의 집이었다. 그의 집보다 작고 초라하다 한들 그녀에게는 소중한 집이었다. 그에게 평가를 받고 안도한다는 것은 이상했다. 그런데도 자꾸 이현의 반응이 신경 쓰이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그에게 깊게 빠졌기 때문이리라.
‘이 남자와 무슨 관계가 되고 싶은 건데, 한해연’
처음으로 가진 이성과의 깊은 관계. 자신은 연애에 대한 경험치가 너무 부족했다. 이렇게 무대포로 직진하는 남자의 속도에 맞춰 가는 것은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와 맞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이현이 돌아봤다.
“왜요”
“……잘생겨서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무심결에 뱉은 말이지만 해연은 정말 그의 얼굴이 좋았다. 아름다운 이목구비뿐 아니라, 타인을 향한 무심한 표정과 대비되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걸 보면 가슴이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자신은 꽤 독점욕이나 소유욕이 큰 편인 모양이었다. 한번 섹스를 했다고 저만 보는 남자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걸 보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