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사무실로 돌아가는 팀원들을 먼저 보내고 해연은 야외 테이블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어차피 가방을 가지고 나와서 다시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바람이 써늘했지만, 속이 복잡해서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팔 년의 정리가 이렇게 쉬운 거였다. 회사에 정을 붙였던 시간이 허망했다. 씁쓸한 마음이 새삼스레 들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한산한 거리를 바라보는데 위아래로 검을 옷을 입은 키가 큰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이어서 창백한 피부가 유난히 눈에 뜨였다.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피지컬이 좋아서 모델이 아닐까 잠시 생각하던 찰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노골적으로 봤던 걸까.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남자는 해연을 향해 걸어왔다. 선선한 바람에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남자가 가려던 방향에 자신이 있는 거겠지, 라며 생각하려고 해도 그는 딱 해연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남자는 서늘한 바람을 몰고 오는 것처럼 차가웠고, 아름다웠다.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는 어느새 해연의 앞까지 도달했다. 나태하게 의자에 몸을 묻었던 해연은 괜히 등을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앉아도 돼요”
남자는 대답도 듣기 전에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남자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그는 마치 제 것처럼 해연의 커피까지 마셨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리를 뜨거나 뭐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냥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상할 정도로.
“강이현이에요.”
“저는 한해연……, 아!”
아무 생각 없이 이름을 말해 버렸다. 강이현이라는 남자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름을 말해서 경계심도 없이 굴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의 해연이 손으로 제 입을 막자, 남자가 웃었다.
“지금 바빠요”
“……왜요”
“안 바쁘면 나랑 놀아 달라 하려고요.”
할 일이 없고 심심하다는 남자의 눈은 정말 무료해 보였다. 아니, 무료하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검은 눈동자는 꽉 채워져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낮은 목소리도 어감이 묘했다. 말끝이 눅눅하게 늘어져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홀린 듯 그를 보고 있던 해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경계해도 모자랄 판에 넋을 놓고 보다니.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시선은 자꾸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의 피부는 창백하도록 하얗고, 입술은 유난히 붉었다. 검은 속눈썹은 저보다 길고 촘촘했다. 해연은 계속 그의 얼굴을 탐사했다. 잡티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모공의 존재조차 모를 정도로 피부가 매끄러웠다. 남자는 미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사실은 졸려요.”
요즘 잠을 못 자서. 남자는 몸을 숙여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해연의 손에 볼을 기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할 행동이 아닌데 당연한 듯 자연스러웠다. 서늘한 피부가 매끄러웠다. 차가운 체온……. 유난히 창백한 피부와 더불어 눈을 감은 남자의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아름답게 조형한 인형을 떠올리게 했다. 섬뜩함이 심장을 찔렀다. 그런데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마치 모든 신경이 그에게 강제로 고정된 기분이었다.
홀린다는 게 이런 건가. 해연은 이 강이현이라는 남자가 왠지 무서웠다. 긴장감을 와르르 무너뜨리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응”
그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물으니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컨대, 저 남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여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 안에 해연은 결코 포함될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나이도, 사는 곳도, 성격도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름만 아는 남자에게 홀려 버렸다. 뭔가가 계속 잊혀지고 있었다. 해연은 자신이 무엇을 잊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그만 바라봤다.
“계속 그렇게 보면 곤란한데…….”
“뭐, 가요”
“유혹하는 것 같아서요.”
당신이, 나를. 남자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유혹이요”
내가 남자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장에서 산소가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꽉 조였다. 길게 늘어진 낮은 목소리가 귀를 통과해 뇌를 주무르는 것 같았다. 이런 쉬운 단어조차도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 해연의 말간 다갈색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어졌다. 말도 늘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음…….”
정말 곤란한데. 남자는 재차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딘가 난처한 것도 같고, 또 배가 부른 것도 같은 포만한 얼굴이었다. 아래로 내려간 긴 눈매와 어우러져 시선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해연의 손등에 볼을 대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해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그 순간 맑았던 하늘은 어느새 짙은 구름이 끼어 폭우를 쏟아 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날벼락을 맞은 듯 허둥지둥 뛰고 있는 것도 해연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보고 나른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만 보였다. 커다란 파라솔의 표면을 뚫을 듯 찍어 내리는 거친 빗줄기는 뿌연 물안개까지 만들어 냈다.
이상했다. 세상에 오직 그와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처음 만난 남자인데. 이런 기분을 느껴선 안 되는데. 하지만 그 모든 이성을 앞서는 것은 남자를 향한 미친 듯한 이끌림이었다.
남자의 손을 잡고 있던 해연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작게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꼭 제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물에 빠진 사람이 제 앞에 떨어진 동아줄을 필사적으로 움켜쥔 것 마냥, 그렇게 해연은 남자의 손을 움켜잡았다.
“놓지 않아도 돼요. 손을 떼어 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따라 해연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숨소리처럼 가냘픈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남자는 완벽한 선을 긋는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짐승이 먹이를 두고 입맛을 다시는 것 같은 야만한 표정이었으나 해연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홀린 듯이 그의 눈만 바라봤다. 어딘가 광적인 열망마저 보일 정도였다.
남자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른거렸다.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 꽉 조여진 심장이 아파 해연의 숨이 헐떡거렸다.
“지금부터 나쁜 짓을 할 건데……, 싫으면 내 손을 놔요.”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의 표면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너무 가까웠다. 몽롱해진 시야에 그의 검은 눈이 흐릿하게 번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대답처럼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그가 다가왔다. 입술이 겹쳐지고 점막이 닿았다. 숨결이 얽힐수록 정신이 혼곤해졌다.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 안 그래도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입술이 맞닿자마자 거대한 빛이 번쩍거렸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입술을 핥았을 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지러웠다. 하늘과 땅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그곳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 남자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는 것도 모르고, 해연은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남자의 손이 해연의 뒤통수를 잡아 앞으로 눌렀다. 작은 입안을 침략한 야만한 짐승이 영토를 늘리는 것처럼 제멋대로 휘저었다. 축축한 소리가 겹쳐진 입술 사이로 요란하게 새어 나왔다. 해연은 이곳이 길거리라는 생각도 못 했다. 그저 남자를 감당하는 것에 급급해 숨을 헐떡헐떡 뱉고 삼켰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냥 스쳐 지나갔다. 무슨 비가 이렇게 미친 듯이 오냐며 젖은 머리카락을 털거나 옷가지를 툭툭 털며. 바로 곁을 스쳐도 해연과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다. 각기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 철저하게 유리된 세상이었다.
* * *
해연은 남자가 자신을 안아 들었다는 것도 몰랐다. 남자는 여전히 입을 맞춘 채 어딘가로 그녀를 데려갔다. 탁― 문이 닫히는 작은 소리와 함께 해연은 좁은 공간에 갇혔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등에 닿는 바닥이 푹신했다. 남자의 몸이 그대로 해연의 위에 겹쳐졌다. 다리와 다리가 교차해서 겹쳐지고 흥분으로 부푼 가슴이 단단한 무언가에 뭉개졌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본가 별채로.”
<네.>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렸다. 해연의 혀를 빨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낮게 쉰 목소리가 갈라져서 흘러나왔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에도 성감이 자극돼 다리 사이가 젖었다. 해연이 등을 뒤로 젖히고 간지러운 신음을 흘리자 남자는 언제 떨어졌냐는 듯 다시 몸을 붙여 왔다.
잠깐이라도 떨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잠시 입술을 떼어 내면 그녀가 다시 붙었다. 그리고 그녀가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뒤로 빼면 그가 다시 잡아당겼다. 목 끝까지 단정하게 여몄던 블라우스의 단추가 모조리 떨어진 채 벌어졌다. 브래지어가 위로 올라갔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부드러운 가슴을 움켜잡았다.
해연의 유두가 바짝 솟아 남자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천천히 쓸어 올렸다 내리며 둥근 젖가슴을 애무하는 손길이 대담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그가 손가락 사이로 유두를 잡아당기자 늘씬한 등이 위로 튕겨 올랐다. 다른 손이 그 등줄기를 훑어 올라갔다.
늘씬한 허벅지에 뜨겁게 부풀어 오른 무언가가 눌려 있었다. 남자의 허리가 섹스를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해연은 그가 만지는 대로 움직이는 대로 신음하고 떨었다.
너무 어두워서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따라 길고 촘촘한 속눈썹까지 떨렸다.
몽롱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물기가 살짝 어린 반질반질한 눈에는 선명한 욕구가 서려 있었다. 남자가 그녀의 입술에서 혀를 떼어 내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요”
“……좋아.”
꿈속을 걷고 있는 듯한 몽롱한 목소리는 허공을 둥둥 떠다니듯 가볍고 아슬아슬했다. 불필요한 살이라고는 찾을 수도 없는 가녀린 팔이 남자의 목에 감겼다. 탄탄한 허벅지가 여자의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갔다. 바지로 가려진 음부에 바짝 밀착해 예민한 곳을 문지르자 목을 감고 있는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