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6화 (6/113)

6화.

“네 ……아, 잠시만요.”

해연의 하얀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유영은 핸드폰에 저장된 테이림의 피디와 팀장의 전화번호를 해연에게 보냈다.

“제가 먼저 말해 놓을게요.”

“응. 고마워, 유영아.”

해연은 강아지 같은 유영의 동그란 머리를 쓱쓱 쓸었다. 동그란 눈에 가득한 걱정을 보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텁텁했다. 요즘은 공기 좋은 날이 너무 드물었다.

“요즘 비가 안 오네.”

“네 저번 주 금요일에 비 엄청 왔었잖아요.”

“응 비가…… 왔었다고”

해연이 유영을 돌아봤다. 유영은 왜 기억을 못 하냐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언니도. 같이 퇴근했잖아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편의점에서 우산도 샀는데.”

“……그래. 그랬지.”

유영의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해연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버스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미적거리며 제 눈치를 살피는 유영을 억지로 보낸 뒤, 해연도 지하철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비가 왔었다고 하지만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뭘까. 뭐가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결론이 나지 않는 생각이 길어지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통증이 밀려왔다. 퇴근하는 사람들 틈새에 끼어 지하철을 타고 내리면서도 해연은 의식도 없이 익숙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집에 도착해 거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내가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하지만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안녕하세요, 한해연 님. 테이림의 LM팀 팀장 강기욱이라고 합니다. 유영 님께 들어서 연락 드립니다. 혹시 통화 가능하신지요]

“…….”

이직하기로 마음을 먹긴 했지만, 막상 직접 연락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해연은 [안녕하세요, 한해연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합니다.] 라고 답장을 썼다. 전송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벨이 울렸다.

“네, 한해연입니다.”

-안녕하세요, 강기욱입니다. 늦은 시간에 연락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직 생각이 있으시다는 말을 들어서 마음이 조급했다며 거듭 사과하는 강기욱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기분이 묘해서 해연은 괜히 거실을 오가며 서성였다. 지금 있는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없애고 싶어 하는 쓸데없는 존재로 취급당하고 있는데, 지금 회사보다 몇 배나 규모가 큰 회사에서 어떻게든 잡고 싶어 하는 게 기분 좋으면서도 씁쓸했다.

-피디님께서 되도록 빨리 날을 잡자고 하셔서요. 괜찮으실까요

“……네,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세요”

-해연 님만 괜찮으시다면, 삼 일 뒤인 목요일 어떨까요

“저도 괜찮습니다.”

일 진행이 상당히 빨랐다. 워낙 큰 기업이라 꽤 오래 걸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원래 기업이 커지면 쓸데없는 것까지 절차가 까다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미팅까지 시간을 조금 유예해 줘서 부담이 적었다.

-그럼 약속 장소에 대해서는 피디님과 상의 후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희 쪽에서는 해연 님께서 꼭 입사를 해 주셨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모쪼록 좋은 쪽으로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강기욱이 전화를 끊기 전에 한 말이었다. 낯이 화끈해질 정도로 노골적인 말이라 제대로 된 대답도 못 하고 있는데, 그런 해연의 심리를 아는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 쉬세요. 먼저 전화 끊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상당히 짧은 대화였고, 본론만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끊어서 그런지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일할 때도 이런 성격일까.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강기욱이라는 사람의 성격이 보였다. 상사로서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사설 없이 본론만 이야기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게 평소의 성격이라는 가정하에서다. 자세한 건 면접을 보면서 차차 판단하면 될 테고, 유영과 함께 이동하면 적응하는 데 큰 무리도 없을 것이다.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제의였다.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는데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해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요즘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다 보니 뭔가를 계속 깜박깜박하는 모양이었다. 다시금 이직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퇴사를 하겠다고 말하고 나면 이 스트레스 역시 금방 사라질 것이다.

* * *

밤이 되자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꽉 닫힌 창문이 덜컹덜컹 요란한 소리를 냈다.

집 안의 불을 모두 끄고 침대에 누웠던 해연은 핸드폰 불빛을 의지해 스탠드를 켰다. 가장 약한 불빛으로 조도를 조정한 뒤 다시 누우니 그나마 덜 불안했다. 혼자 사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럴 때는 무서웠다. 고작 바람 소리가 조금 거세다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집에 들어와 위협을 가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잠시 후, 흔들리던 창이 잠잠해졌다. 바람 소리도 잦아들었다. 조금 전의 요란한 소음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요한 침묵이 돌았다. 해연은 잦아든 바람을 위안 삼아 눈을 감았다. 몸이 나른하다. 일을 힘들게 한 것은 아닌데도 피곤했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그 정도로 심했었던 걸까. 몸이 안 좋은 탓인지 평소에는 누우면 못해도 삼십 분은 뒤척이다 잠이 들었는데 오늘은 눈을 감자마자 의식이 빠르게 사라졌다.

조금 뒤, 아담한 침실엔 옅은 숨소리와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남았다. 그때 팟, 하고 스탠드의 조명이 꺼졌다. 방은 다시 어두워졌고, 바람 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요란해졌다. 누군가가 거세게 두드리는 것처럼 창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해연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평소라면 진작 잠에서 깨어났을 텐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평온했다.

이윽고 거칠던 바람이 멎었을 때, 검은 어둠을 뚫고 나온 새하얀 손이 해연의 말간 얼굴에 닿았다. 창백했던 피부에 빠르게 생기가 돋아났다. 하얀 손의 주인은 그런 해연을 잠시 바라보았다.

남자는 손가락 끝을 깨물어 피를 냈다. 붉은색의 피 한 방울이 허공으로 떠올라 그의 뜻을 따라 해연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듯하게 누워 있던 여린 몸이 남자의 피를 먹고 가늘게 경련했다. 피부가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오고 혈관이 툭툭 꺼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진 남자의 피가 벅찬지 해연은 숨을 헐떡거리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남자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채 지켜보기만 했다. 제 피를 감당할 수 있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온몸의 혈관이 터져 죽을 것이다. 혹, 인간도 짐승도 아닌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잔혹한 경우의 수를 생각했지만, 그는 이 여자가 버텨낼 것을 알았다. 이 여자는 청혈이니까. 제 피를 삼켜 내지 못할 거였으면 애초에 심장이 멎었다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의 예상대로 비정상적으로 부풀었던 해연의 몸이 시간이 지나자 제 모습을 찾아갔다. 여전히 숨결은 거칠었지만, 그래도 안정적이었다. 살아남은 여자를 보는 차가운 눈이 나른하게 풀렸다. 그리고 몸을 굽혀 여자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얇은 피부의 끝만 살짝 스치는 정도의 접촉이었다. 하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몸이 뜨거워졌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 짙게 웃었다.

드디어 잡았다.

* * *

드물게 컨디션이 좋은 날이었다. 퇴사하기로 마음먹어서 그런가 신기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해연은 피디가 출근하자 바로 면담을 요청했다. 잠시 해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피디는 픽 웃으며 회의실로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다.

대화를 길게 끌 생각이 없어 바로 본론을 말하자 생각대로 피디는 해연의 퇴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팔 년이나 일한 회사인데, 퇴사 일정은 다음 주 금요일로 잡혔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빨랐다.

“굳이 출근할 필요 있어요 다음 주 금요일에만 잠깐 와서 서류에 사인만 하고 가요.”

그동안 고생했으니 유급휴가를 주겠다며 피디가 웃으며 말했다. 해연은 피디가 자신을 향해 웃는 것을 이날 처음 봤다. 그렇게 가시 같던 존재가 떨궈져 나간다고 하니 기분이 매우 좋은 모양이라고, 해연은 냉소적으로 그를 비웃었다.

배려해 주는 척하지만, 속은 뻔했다. 괜히 남아 있는 사람들 심란하게 들쑤시지 말고 빨리 꺼지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의였던 터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퇴사할 때까지 회사에 나와 기분 나쁜 얼굴들을 보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히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직 이직할 회사가 완전히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테이림이 아니어도 이직할 수 있는 곳은 많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침부터 지인들에게 입사 제의 관련으로 연락이 많이 왔던 탓이다.

해연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회의실을 나왔다. 자리로 돌아와 작업물을 백업해 회사 공유 폴더와 개인 USB에 옮겨 담았다.

파일이 이동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정리했다. 작은 상자에 짐을 넣고 바로 택배를 부쳤다. 마지막으로 회사에 두었던 칫솔 등의 아주 사소한 물품마저 쓰레기통에 버리니 회사에서 그녀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자리를 정리하니 파일이 모두 전송된 뒤였다. PC에서 USB를 뽑아 가방에 넣으니 더 이상 할 것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커피를 마시러 가자는 팀원들과 수다를 나누며 짧은 정리를 했다. 대부분이 팀장과 피디, 부팀장과 관련된 뒷담화였다. 어지간히 쌓인 게 많은지 대화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가만히 듣기만 하는 해연을 향해 유영이 몰래 한쪽 눈을 찡긋했다. 별거 아니지만 같은 비밀을 공유한 공모자 같은 시그널을 보내는 귀여운 행동에 해연은 그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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