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유영을 먼저 사무실에 들여보낸 뒤 해연이 향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아팠다면 멍이라도 크게 들었을 것 같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치마를 걷어올리고 탁자에 부딪혔던 허벅지를 살폈지만, 멍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의 조명이 조도가 낮아서 안 보이는 걸까. 하지만 손으로 만져도 역시 아프지 않았다.
유영이 하도 걱정해서 다쳤던 것도 잊었다는 듯 행동했지만,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해연 본인이었다. 아까 그 통증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게 부딪힌 것도 아닌데…….
혹시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해연은 다시 치마를 내려 정돈을 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보며 얼굴을 살폈지만, 다행히 화장을 다시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식은땀이 많이 났던 것에 비하면 상태는 괜찮았다. 그건 해연이 화장을 최대한 간략하게 하는 편이기도 했고 기본 피부가 좋아서인 이유도 있었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사무실로 돌아가니 낮부터 그녀를 괴롭혔던 진규호가 해연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해연의 표정이 확 굳었다.
“무슨 일이세요”
“와, 해연 씨 점심시간 끝난 지가 언젠데 이제 들어온 건가요”
진규호의 목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서 크게 튀었다. 또 시작이구나. 해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눌렀다.
“잠깐 화장실 다녀온 건데요”
“잠깐은 무슨. 팀장님 안 계시다고 너무 풀어진 거 같은데…….”
“규호 씨.”
“규호 씨 엄연히 부팀장이라는 직책이 있는데, 해연 씨가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니까 일반 사원들도 따라서 부르는 거 아닙니까”
진규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주위 사원들은 유치하고 황당한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대우를 받고 싶은 걸까. 고작 이름 하나에 저렇게 바르르 떨 만큼
솔직히 진규호가 직책에 맞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아니, 못 한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력이 없으니 사원들을 컨트롤 할 재주는 없고, 자존심은 주제에 맞지 않게 높으니 만만한 해연을 잡는 거였다. 공식적인 직책은 없지만, 실력으로서는 누구보다 인정받는 해연을 잡아 눌러 본보기로 삼기 위해. 피디 라인을 타고 들어온 팀장을 빽으로 두고 있으니 정도를 몰랐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직책을 불러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회사 내의 규칙이니까. 그런데 이상한 오기가 들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능하고 권력만 밝히는 인간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면 자신 역시 더러워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호칭 문제를 고친다 하더라도 이들의 괴롭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그녀를 괴롭힐 또 다른 핑곗거리를 만들어 낼 게 분명하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여기서 버텨야 하지
기껏해야 생각만 잠시 해 봤을 뿐인 이직에 대한 마음이 확 부풀었다. 그래, 뭐가 아쉬워서 이런 대우를 받고 여기서 버텨 그동안 이 회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일했던 결과가 이런 거라면 제가 먼저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끔찍했지만, 유영과 함께 간다면 그리 힘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해연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이제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들어 엎고 속 시원하게 이직해 버릴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이 계속 참아 주니 건드리는 수위가 도를 넘고 있었다.
“적당히 하시죠 지금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 잡고 계시잖아요.”
“회사 분위기 좀 읽고 사람 존중을 해 달라는 게 말도 안 되는 겁니까”
날카롭게 올라간 고성에 사무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대체 누가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회사 분위기를 못 읽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진규호였다. 오전에는 작업물 가지고 트집을 잡더니, 오후가 되자마자 또 시작이었다. 차라리 팀장이 있는 게 나았다. 팀장이었다면 보는 눈을 의식해 해연을 따로 불러 얘기했지, 이렇게 사람들이 다 듣는 사무실 내에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네, 진규호 부팀장님. 앞으로 조심할 테니 이제 일을 해도 될까요”
“……한해연 씨. 지금 짜증 내는 겁니까”
“짜증은 진규호 부팀장님께서 내고 계신 것 같은데요”
해연은 일부러 사근사근 웃으며 진규호의 속을 긁었다. 눈을 접어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말에 담긴 뜻은 짜증 나니까 꺼지라는 거였다. 해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피식 웃는 소리가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진규호의 얄팍한 얼굴이 붉어졌다.
“한해연 씨, 지금……!”
“이제 그만하자고요.”
해연이 웃는 낯으로 경고했다. 입술을 웃고 있었지만, 눈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이것도 많이 참은 상태였다.
그녀도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워낙 사람이 많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직종이었기에 해연은 새로 들어온 피디 라인에 최대한 맞출 생각이었다. 사소한 꼬투리를 잡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을 주었다가 어렵게 마치고 나면 그 일정 자체를 없애 버리는 짓을 하면서 사람을 괴롭히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도 부족해 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깔아뭉개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가만히 참아 주는 것도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피디와 사장이 사무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원들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황급히 돌렸고, 해연은 꾸벅 목을 숙여 인사했다.
“또 두 사람이야 자꾸 시끄럽게 만들 거야 김 피디, 둘 다 면담 좀 하세요.”
“……해연 씨, 부팀장. 회의실로 오세요.”
사장이 혀를 차고 사장실로 들어가자, 차가운 얼굴로 해연과 진규호를 호명한 피디가 앞장서서 빈 회의실로 향했다. 진규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유로운 얼굴로 피디를 뒤따랐다. 해연은 잠시 그대로 서서 바닥을 보다 숨을 깊게 들이켜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피디가 먼저 자리에 앉자 진규호가 잽싸게 피디 옆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해연은 혼자 두 명을 상대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피디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진규호에게 먼저 사건의 진위를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해연 씨가 계속 자리에 없어서 조심 좀 해 달라고 했더니 그걸로 짜증을 내더라고요.”
“하, 제가 언제요”
“그만 싸워! 해연 씨 요즘 일 제대로 안 해요”
“……피디님.”
“부팀장이 사무실 내에서 대놓고 그럴 정도면 해연 씨가 일을 제공한 거 같은데…….”
해연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미 처음부터 피디는 진규호의 편에서 시작한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책상 아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점심시간 끝나고 화장실 들렀다 오느라 십 분 늦게 돌아온 게 다예요. 진규호 씨가…….”
“아, 그러고 보니 해연 씨. 부팀장으로 발령 낸 지가 언제인데, 왜 아직도 이름으로 불러요 사내에서 연차수가 높은 해연 씨가 앞장서서 직책으로 불러야 자연스럽게 굳어질 것 아닙니까”
사회생활 초짜도 아니고. 짜증이 섞인 피디의 말에 진규호가 해연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은 해연이 납작 수그리고 들어오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빨리 여기서 꺼지라고 종용하는 중이었다. 자리를 비운 팀장을 합쳐서 저 세 명이 작당을 한 것이다. 이런 예민한 문제에 끼기 싫어하는 비열한 성격의 팀장이라면 오늘 일부러 연차를 냈으리라. 해연은 합리적인 추측을 했다.
윗라인 전체가 교체됐을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하물며 이렇게 노골적으로 판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해연은 자신이 이 회사에서 나름대로 단단한 기반을 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을 쳐내는 것보다 흡수하는 쪽을 선택하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수그려도 봤고 괴롭힘 또한 감내했다. 결국 참지 못해 폭발했지만…….
‘미련했어.’
참지 말걸. 이직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거라고 그렇게 미련하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 되니 저들의 수작보다도 제 미련함만 크게 부각되어 보였다.
“조심 좀 해 줘요.”
“……네.”
“그럼 이제 나가 봐요. 부팀장은 잠깐 남고.”
“네, 피디님.”
자리에서 일어나는 해연의 시야에 저를 비웃고 있는 진규호의 야비한 얼굴이 스쳤다. 해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꽤 긴 시간 동안 주변의 이직 제의도 거부하고 다닌 회사에 대한 정이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오기를 부렸는지도 모른다. 먼저 수그리고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무시한 채 온당한 대우를 받길 바란 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건 자신의 실수가 맞았다. 그럼에도 신기할 정도로 후회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춰 가며 남을 만큼 이 회사가 값어치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 가만히 모니터를 보고 있으니 메신저 창에 불이 들어왔다. 유영의 이름을 보고 그냥 창을 꺼 버렸다. 지금은 누군가와 대화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퇴근할 때까지 진규호는 해연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었고, 해연에게 부팀장님이라는 호칭을 받아 냈다. 드디어 길을 들였다고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사원들은 계속 해연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해연의 얼굴이 태연했다.
사무실에서도,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도 해연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던 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왔다.
“언니 괜찮으세요”
“아니, 나 안 괜찮은 거 같아.”
“언니…….”
꾹 참고 있던 화가 유영의 손길로 확 번져 나왔다. 해연은 입술을 꾹 깨물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유영아.”
“네”
“테이림 쪽 연락처 좀 알려 줄래”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