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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아내-4화 (4/113)

4화.

“아, 신규 들어간다던 그 팀”

“네!”

테이림이라면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회사였다. 메신저를 기반으로 여러 가지 분야로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는 거대한 공룡 같은 기업이다. 워낙 큰 기업이니 복지나 여러 가지 모든 측면을 따지면 지금 회사보다 대우는 좋을 것이다.

게다가 유영이 말한 프로젝트는 테이림이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다고 업계에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이미 기획단계가 끝나고 몸을 불리는 단계여서 인재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실력자라고 소문난 사람들이 업계 최고 대우를 받으며 입사하고 있었고, 대체 얼마나 대단한 프로젝트를 만들려나, 하고 세간의 주목을 받는 상태였다. 이직할 생각이 없는 해연조차도 알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흐음. 해연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그런 해연의 행동에 유영의 얼굴이 활짝 폈다. 평소라면 생각 없다고 툭 쳐 버렸을 텐데, 오늘은 반응이 달랐다. 여지가 있는 것이다.

“거기 팀장님이 언니 이직 생각 있으면 한번 식사 자리 갖자고 하더라고요.”

어제 갑자기 연락이 와서 당황스러웠다며 유영이 호들갑을 떨었다. 유영은 겉보기엔 활발해 보여도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성격이다. 물론 자신과는 특별히 친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적인 영역은 확고히 선을 그었다. 그런 유영이 왜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지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자신이 이직하면 회사도 달라져 아무런 이득도 얻을 수 없었다. 해연의 묘한 표정을 보고 유영이 씩 웃었다.

“저도 거기로 갈 거거든요.”

“정말”

해연의 눈이 커졌다. 유영이 헤헤 웃었다.

“저는 연봉협상만 남았어요.”

“으음.”

“언니이, 우리 같이 가요. 네”

“생각 좀 해 볼게.”

“아니, 생각할 게 어디 있어요. 여기보다 거기가 백 배 낫죠. 아니, 백 배가 뭐야. 만 배는 낫겠다.”

“다 먹었지 일어나. 우리 커피 마시러 가자.”

유영은 이미 한참 전부터 젓가락을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해연이 지갑과 핸드폰을 들고 먼저 일어서서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유영이 오기 전에 먼저 계산을 해 버렸다. 뒤늦게 따라온 유영이 카드와 영수증을 돌려받고 있는 해연을 보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어, 언니 저 현금 없는데. 이따가 계좌이체 해 드릴게요. 아니면 커피 제가 살까요”

“아니야. 그것도 내가 사야지.”

“네”

“잘 되면 더 맛있는 것도 사 줄게.”

“언니 진짜 생각 있어요!”

“목소리 낮추라니까.”

해연의 경고에 유영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면서도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해연이 피식 웃으며 가게를 나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계산대 옆에 있는 탁자 모서리에 허벅지를 부딪쳤다.

“……!”

“언니”

해연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세게 부딪힌 것도 아닌데 다리가 너무 아팠다. 칼로 쑤셔 박는 듯한 통증에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으으……!”

“언니 세게 부딪혔어요 어떡해.”

“어머, 괜찮아요 식은땀까지 흘리네.”

“아뇨…… 잠깐만…….”

계산대에 있던 사장까지 해연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생살이 잘려 나가는 것처럼 아팠던 통증은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가라앉았다. 헐떡헐떡 내뱉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주 안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괜찮다고 몸을 일으킨 해연의 곁에 유영이 바짝 붙었다.

“혹시 모르니까 병원 가 볼까요”

“아니야. 이제 괜찮아.”

정말이었다. 아까는 끔찍하기까지 했던 고통이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라졌다. 그녀는 식은땀에 젖어 얼굴과 목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치워 냈다. 사장이 휴지를 뽑아 해연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후 해연은 유영의 손을 잡고 음식점을 나왔다.

“언니, 해연 언니. 정말 괜찮아요 병원 안 가도 되겠어요”

“응. 정말 괜찮아. 이제 안 아파.”

“언니가 그렇게 아파하는 거 처음 봤어요.”

해연은 신기할 정도로 건강했다. 생리통도 없었고, 감기에 걸린 적도 없었다. 뼈대도 얇고 호리호리하게 말라 연약하게 생겼으면서 누구보다 튼튼했다. 야근이 일상인 그들의 직장에서 가장 늦게까지 일하고도 멀쩡할 정도였다. 조금만 무리하면 힘들어하는 유영과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부럽다고 생각해 왔는데, 고작 탁자에 살짝 부딪힌 정도로 그렇게 아파할 줄은 몰랐다.

지금은 본인의 말대로 안색이 괜찮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혹시 겉보기와는 달리 심각한 병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유영의 얼굴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짜 괜찮다니까. 이제 커피 마시러 가자.”

“그래도…….”

해연은 아예 유영의 손을 붙잡고 그들이 자주 가던 카페로 향했다. 계속 해연의 다리를 힐끔힐끔 살피던 유영은 멀쩡한 걸음걸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했다.

* * *

“모카프라프치노와 카페라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연은 음료 두 잔을 들고 유영이 앉아 있는 자리로 갔다. 음료를 건네주자 유영이 바로 빨대를 꽂아 들이켰다. 투명한 아이스 컵의 1/3이 순식간에 훌쩍 줄었다. 해연은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받쳐 들며 이 추운 날씨에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 유영을 대단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안 추워”

“실내인데 뭐가 추워요.”

원래 얼어 죽어도 아이스라며 유영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저러다 또 탈 날 텐데. 날이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유영은 유난히 장이 약했다. 조심하라는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꾹 내리눌렀다. 예전에 장염으로 고생할 때 한번 말했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 한다고 외치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집이 센 아이니 더 말을 해도 들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해연은 말없이 따뜻한 라떼를 들이켰다.

그나마 유영이가 회사에 있으니 조금이나 숨통이 트이는 거였다. 회사에서 만난 인연이지만, 평생 이어지길 바랄 정도로 마음이 잘 맞았다. 성격은 극과 극인데 그래서인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줬다. 둘 다 고아로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해연은 이제 음료의 절반 이상을 해치우고 있는 유영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음료에 집중하던 유영이 멋쩍은 얼굴로 슬그머니 컵을 뒤로 밀었다.

“테이림 말이야. 어땠어”

“언니 정말 생각 있어요”

“일단 생각만.”

“지금까지 이직의 이자만 꺼내도 칼같이 쳐냈던 언니가 생각이 있다는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게임 끝이죠.”

“아니야. 진짜 아직 모르겠어.”

해연은 이미 이직하는 것으로 확정 지으려는 유영에게 제동을 걸었다. 확실한 것은 없다. 그녀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걸 싫어했다. 그건 어릴 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로 확실한 기반 없이 친척 집을 전전하던 영향이 컸다. 한곳에 오래 머물고 싶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확실히 옮겨야 할 결정적인 명분이 없는 이상은 그 자리 그대로 있고 싶었다. 새로운 곳에 갔을 때의 그 황량한 기분을 다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거지만.

“좋아요. 일단 생각까지만 이라고 쳐요. 아무튼 아까 질문에 대답하자면, 저는 테이림 피디가 여자여서 더 마음에 들었던 건 있어요.”

“피디가 여자야”

“네. 솔직히 최고 결정권자가 여자인 곳은 거의 없잖아요. 면접 잠깐 본 걸로 판단하긴 좀 그렇지만, 성격이 시원시원하더라고요.”

“그래”

“네. 뭐 아닐 가능성도 크지만, 똑같이 개 같을 바엔 차라리 여자 상사 비위 맞추는 게 더 낫잖아요. 조건도 훨씬 좋고, 큰 프로젝트니까 잘만 되면 이력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저는 연봉협상만 잘 되면 옮길 거예요.”

그러니까 언니도 같이 가자고 유영이 해연을 유혹했다.

“저 언니하고 계속 같이 회사 다니고 싶단 말이에요. 같이 가요.”

“그런 분이 저한테 말도 안 하고 다른 데 홀랑 면접을 보셨어요”

해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코웃음 쳤다. 유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솔직히 언니는 그냥 가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프리패스인데 저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저부터 확정 지어야 오류가 안 생길거구……. 헤헤.”

“내가 거기 안 갈 수도 있잖아.”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아쉽지만, 서로 인생 대신 살아 주는 것도 아닌데 제가 강요할 수 없는 거니까요.”

유영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해연은 설핏 미소 지었다. 제게 의지하는 척해도 유영이는 선이 확실한 편이었다. 어떨 때는 선이 너무 확실해서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래서 더 기특했다. 혼자 잘 살아왔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해연이 손을 뻗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유영이 그녀의 손에 머리를 들이밀고 더 만져 달라고 비벼 댔다.

“더, 더, 더요! 더!”

“어휴, 우리 애기 장하다 장해.”

해연이 더 열심히 유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난치는 것 같지만, 유영은 해연이 만져 주는 걸 아주 좋아했다. 다른 사람이 건드리면 눈에 보일 정도로 싫은 티를 냈지만, 해연에게만은 달랐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전엔 이리저리 계산하며 거리를 두고 대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확 가까워졌다.

계속 쓰다듬느라 유영의 머리가 헝클어졌다. 해연은 조심조심 유영의 머리를 정돈해 주고는 손을 뗐다. 완전히 손이 떨어지자 유영이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언니는 신기할 정도로 기분 좋게 만져요.”

몇 번 들었던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해연은 제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평범하게 만지는 거 같은데”

“으음. 아니요. 약간 뭐랄까……. 엄마가 만지는 느낌이에요. 따뜻하고 편해져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머리가 아플 땐, 하루 종일이라도 만져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같이 회사 옮겨요!”

유영의 맥락 없는 말에 해연이 소리 내 웃었다.

“뭐야. 갑자기 띄워 주더니 본론이 그거였어”

“아잉, 언니두. 겸사겸사죠. 아무튼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요. 네”

“알았어. 이제 일어나자. 시간 다 됐어.”

“아아, 진짜 싫다아아.”

회사로 돌아가자는 말에 밝았던 유영의 얼굴이 대번에 우울해졌다. 먼저 일어선 해연을 향해 두 팔을 쭉 뻗더니 일으켜 달라고 칭얼거렸다. 해연은 짐짓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서 일어나세요. 아니면 버리고 갈 거니까.”

“너무 냉정해. 흑흑.”

유영이 우는 척을 하며 먼저 등을 돌린 해연을 따라가 찰싹 달라붙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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