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하늘보다 높은 마음
불억루의 뒤쪽 화원에는 꽃이 가득 피어있었고, 앞쪽 화원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달리 그윽하고 고요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곳이 기방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두 사람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들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동랑, 최근 말수가 적어진 것 같군.”
남안왕이 고개를 돌리고 작게 미소 짓자, 동랑은 남안왕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예전에는 남 공자셨지만, 지금은 남안왕이시지요. 남 공자 앞에선 제멋대로 굴 수 있어도 왕야 앞에서 어찌 무례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무슨 신분이든 간에 나한테 그대는 여전히 동랑이오.”
동랑의 마음이 무언가에 찔린 듯 아파 왔다.
동랑도 한때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적 있었다. 남 공자와 함께 사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남 공자의 마음속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특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남 공자는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애타고 있던 와중에, 남 공자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니 더 이상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쿨럭 쿨럭―”
남안왕이 기침을 하자, 동랑의 붕 뜬 마음이 다시 진정되었다.
“왕야, 최근 안색이 별로 좋지 않으십니다. 잘 쉬셔야 해요.”
남안왕이 웃었다.
“맞소, 최근 몸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지.”
태자 덕분에 그는 그제야 제 몸이 허약한 게 혈주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안왕의 혈주는 풀 수 없었다.
용씨 가문이 황가를 이어온 100년간, 지금의 태자처럼 부법에 정통하며 죽음까지도 기꺼이 함께하려 한 태자비는 없었다.
‘그나마 내게 후대가 없어 다행이지. 이 혈주가 후대에 이어지지 않을 테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남안왕은 고상하고 단정하여 여색을 즐기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그저 몸이 너무 좋지 않아, 하루라도 더 살고 싶으면 동정의 몸으로 살 수밖에 없을 뿐이었다.
남안왕이 혈주에 걸린 황실의 후손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이유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동랑, 남쪽으로 가 잠시 휴양할까 하는데, 함께 가겠소?”
“저는―”
동랑은 뜻밖의 제안에 기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방금 청청의 어리석음을 비웃어놓고 나도 같은 짓을 하려 하다니?’
이때, 어린 시종이 급히 다가와 외쳤다.
“동 마마, 큰일 났습니다. 앞쪽에 어떤 손님께서 술에 취하셔서 소매(小梅)와 동침해야겠다고 난동을 부리고 있어요―”
“왕야, 잠시 기다리세요.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남안왕은 급히 떠나는 동랑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그녀를 따라갔다.
사내는 술에 잔뜩 취해 소매를 방 안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공자님, 놓아주세요. 저는 동 마마를 모시고 있습니다. 손님과 동침하지 않습니다.”
“손님과 동침하지 않는다고? 이런 곳에서도 그런 걸 가린단 말이냐? 동 마마는 또 뭔데, 그게 뭐라고 나를 막는 게야?”
사내는 욕을 지껄이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만두세요!”
동랑이 쫓아와 고함을 질렀다.
사내는 가까스로 눈을 똑바로 뜨더니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오오, 이제껏 몰랐는데 동 마마야말로 불억루에서 손꼽는 미인이었군. 이 계집이 나를 모시고 싶지 않다고 하니, 네가 나를 모시면 되겠구나.”
사내는 소매를 놓아주고 비틀거리며 동랑에게 다가갔다.
동랑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역한 술 냄새가 풍겨왔지만, 아무렇지 않게 옆의 탁자에 있던 장식 병을 들고 사내의 머리를 내리쳤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병이 산산조각이 났고, 사내는 바닥에 쓰러졌다.
동랑이 발로 사내를 짓누르고 욕을 뱉었다.
“이 멍청한 것들. 보고만 있으면 어찌한단 말이냐. 깨진 조각 위로 쓰러졌잖아! 내일 어떻게 설명하려고? 어서 이 주정뱅이를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해라.”
멍하니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사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저…… 저 사람은 위 장군의 친척 동생인 것 같던데요―”
그 말에 동랑이 눈을 부라렸다.
“우둔한 것! 저 사람이 위 장군이라 한들, 저렇게나 취했는데 내일 아침에 이 일을 기억할 리 있겠느냐? 머리를 굴릴 줄 알아야지. 필요할 땐 동료가 위험에 처하지 않게 나서주어야 할 것 아니냐!”
“예, 알겠습니다.”
동랑은 머리를 정돈하고 천천히 밖으로 나가다가 입구에 서 있는 남안왕을 보고 멍해졌다.
“왕야―”
‘큰일 났다. 나 방금 엄청 사나운 모습이지 않았나?’
남안왕이 동랑에게 미소 지었다.
“동랑, 남쪽에도 불억루를 하나 지었는데, 거기에서도 동 마마를 맡아줄 수 있겠소?”
‘예전엔 내 몸이 좋지 않아, 좋은 아가씨를 마음에 두었음에도 놓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인생의 반을 넘긴 지금, 같은 실수를 또 저지르고 싶진 않다. 부부가 되지 않아도 좋다. 지기로만 지내며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동랑은 입을 꾹 다문 채, 남안왕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 빠져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 * *
청령진인은 몇 년 만에 다시금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
세상 사람들은 청령진인이 이미 신선이 되었을 거라 말했다.
정미와 북명진인만이 사부의 나이가 많아 이미 한계치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두 사람은 청령진인이 두 사람을 불러 당부했던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청령진인은 북명진인이 국사의 자리를 계승하여 황가와 세상을 수호하고, 정미는 황후가 되어 황궁의 기운을 다스리라 분부했다.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며 세상을 안정시켜 백성들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북명진인이 국사 자리를 계승하던 그날, 창경제와 태자 등 황궁의 주인들은 모두 현청관으로 와 계승식에 참석했다.
그 계승식은 현청관과 대량의 지난 100년 중 가장 성대한 의례였다.
긴 종소리가 울리자, 현청관의 모든 도사들이 관례대로 향했다. 낙엽을 쓸던 어린 도동들도 모두 빗자루를 내던지고 달려갔다.
도관 전체가 조용해지자, 관례대에서 들려오는 장엄한 음악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텅 빈 현청관의 어느 뜰 안, 여도사가 손에 든 작은 삽을 내려놓고 힘겹게 담장을 기어오르며 관례대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이고, 거기 올라가면 안 돼! 어서 내려와!”
수려한 외모의 어린 도사가 외쳤다.
여도사가 고개를 돌리더니, 어린 도사에게 손짓했다.
어린 도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말 안 들을 줄 알았어.”
그러고는 마당 입구로 달려가 크게 외쳤다.
“복지(伏地)야, 빨리 와봐! 아진이 채소를 심다 말고 담장을 넘고 있다고!”
잠시 후, 우람한 체격의 도사가 달려와 손을 뻗어 여도사를 끌어내렸다.
여도사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으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여도사의 혀는 반이 잘려있었다.
그녀는 어린 도사를 매섭게 노려보았고, 어린 도사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
“복지, 어서 방으로 데려가.”
여도사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고,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다신 열리지 않았다.
여도사는 결국 마음을 접고 방문에 기대 스르륵 바닥에 쓰러졌다. 눈엔 절망과 슬픔이 가득했다.
오늘 국사 자리를 계승한 사람은, 여도사의 사부였다.
‘제자로서 사부의 옆자리를 차지해 세상 사람들의 존경 가득한 눈빛을 받아야 하는데, 어째서 여기 고립되어있단 말인가! 사부님께서 고난은 만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니, 내 마음이 깨끗해진다면 다시 사부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거라 하셨지. 하지만 난 전혀 그런 걸 원치 않아. 사부님의 말을 믿지도 않고! 황실의 미움을 받은 내가 어찌 사부님의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겠어. 사부님께 날 지켜줄 마음이 있었다면, 내 혀가 잘리는 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셨겠지!’
소진은 다시 일어나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침상 아래에서 작은 삽을 꺼내 욕실로 들어간 뒤 어떤 석판을 들어 옮기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구덩이는 이미 아주 깊고 길게 파여있었다. 벽 밖까지 팔 수 있기만 하면 현청관에서 도망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현청관의 모든 도사가 계승식을 보러 갔으니, 도사 두 명만 따돌리면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이 감옥보다도 힘든 나날에서 벗어나고야 말 테다!’
소진은 강인한 표정으로 열심히 구멍을 팠다.
‘후회는 없어. 아버지가 상관의 미움을 사 억울하게 수감되고, 우리 집안이 완전히 몰락했을 때, 이번 생은 절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을 거라 맹세했으니!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북명진인의 제자가 되어도 만족하지 못했던 거야. 하지만 북명진인의 제자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 내가 원하는 건 세상 모든 도사들이 우러러보는 국사의 자리니까. 그 자리에 서면 아무도 나를 좌지우지 할 수 없어. 나만이 내 운명을 결정할 수 있지. 그래서 철저히 계획을 세워 많은 귀인들의 신임을 얻었지만, 결국 어린 계집 하나 때문에 다 망치게 되었구나!’
소진은 정미를 떠올리자 한에 서려 이를 악물었다.
‘정미가 아니었다면, 원래 태자비가 낳은 황손은 내가 병을 치료해주었을 거야. 그럼 황궁 사람들도 모두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고 따라주었겠지. 그리고 그 태자비가 황후가 되었을 때, 내 영향력도 무시무시했을 테고. 내가 굳이 사부님과 다투지 않더라도, 다음 국사는 분명 내가 되었을 거라고!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구나!’
소진은 이를 갈다가 손에 힘을 팍 주었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표정을 환히 밝혔다.
‘됐다!’
신선한 공기가 느껴지자 소진은 같은 바람임이었음에도 그 감옥 같은 집안보다 밖이 더 상쾌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곧 천천히 집안으로 돌아가, 침상 아래에서 미리 준비해둔 보따리를 몸에 둘러멘 후 다시 통로를 따라 밖으로 기어나갔다.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소진은 마침내 뜰 밖에 나와 긴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벗어났구나. 저 불태워도 시원찮을 집을 떠날 수만 있다면, 현청관을, 수도를 떠날 수만 있다면, 내가 벙어리가 되었다 한들 여태 배운 걸로 뭐든 할 수 있어. 저 집에서 천천히 썩어가는 게 아니라!’
소진은 땀을 슥슥 닦았다. 얼굴에 흙이 묻어 더러워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보따리를 쥐고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오늘은 현청관의 입구를 지키는 어린 도동들마저도 관례대에서 가장 가깝고 높은 곳으로 몰래 기어 올라가 구경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도, 문지기 도동들에겐 계승식의 음악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주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무려 국사의 계승식인걸. 저번 계승식은 내 할아버지도 태어나기 전이라고!’
어린 도동들은 이 생각이 들 때마다 감격스러운 마음에 펄쩍 뛰고만 싶을 정도였기에, 제가 맡은 일들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덕분에 소진은 생각보다 훨씬 순조롭게 도망칠 수 있었다.
소진은 냇가로 돌아가 얼굴을 씻은 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빠르게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