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74화 (373/375)

외전 9화. 소년의 속마음

다음 날.

태양이 산 뒤로 넘어갔을 때쯤, 정미는 공주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다시 숙비의 거처를 찾았다.

암실 안, 정미는 아혜와 마주 앉아 있었고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혜의 손에 있는 영골만이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빛은 아혜의 심장으로 들어갔다가 미간에서 다시 나오기를 반복했다. 공주의 눈은 점점 푸른색으로 변했다.

이윽고 미간에서의 빛이 옅은 푸른색의 꽃으로 변했을 때, 아혜가 갑자기 눈을 떴다.

아혜가 정미를 보며 작게 말했다.

“정미, 이제 갈게.”

“아혜―”

정미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아혜는 정미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잘된 일이잖아? 나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어. 다음 생엔 너처럼, 서로 진심으로 은애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

빛이 흩어졌고, 정미에게는 아혜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 혈주를 풀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지. 그러니까, 너희가 나한테 사람에 대한 믿음을 심어준 거야……. 바보 같은 계집, 넌 정말 바보 같다니까…….”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정미가 숙비에게 말했다.

“공주가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말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정말이냐?”

“예, 다 나았습니다.”

정미는 곧 새로운 삶을 살게 될 아혜가, 분명 잘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 * *

모든 사람의 마음속엔 아주 소중한 사람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었다. 그 사람은 애인일 수도, 가족일 수도, 친우일 수도 있었다.

화서에겐 그 ‘소중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하나는 제 외조모인 단 노부인이었고, 하나는 사촌 누이인 정미였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머니가 모욕을 당해 낳은 자식인 화서였지만, 단 노부인은 단 한 번도 그 이유로 화서를 싫어하지 않았고 매년 생일과 명절 때마다 외조모의 사랑이 담긴 선물을 보내곤 했다.

단 노부인에게 화서는 한지나 한평처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손주였다. 화서의 출신 때문에 쉬쉬하며 숨기지 않고 창피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화서는 이따금 생각했다.

‘어떻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 내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인 악당이잖아! 나 자신조차도 내가 미운데! 하지만 외조모님은 늘 말씀하셨어. 내 어머니는 나를 몹시 아끼셨다고. 내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외조모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지.

<순결을 잃었으니, 이제 시집을 갈 수도 없게 되었겠지요. 그러니 피가 이어진 자식과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건, 불행 중 다행인 일입니다.>

외조모님은 모든 아이들은 하늘의 별이 어머니의 배 속에 떨어져 태어난 거라 말씀하셨어. 그리고 나는 내 어머니의 행운의 별이고. 아주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

아아, 선량하고 자애로우신 내 외조모님. 제 딸을 해친 사람의 아들을 위해 이렇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지어내시다니.

어머니께서 정말 그리 생각하셨다면, 왜 나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자결하셨단 말인가. 어머니는 외조모님처럼 선량하셔서, 내가 아무리 미워도 나를 죽일 수 없었을 뿐이겠지.’

화서는 줄곧 이렇게 믿어왔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자결하신 게,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어느 날, 화서는 정미의 설명을 들은 뒤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18살이 된 화서는 몸도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을 정도로 건강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연약한 소년처럼 울고만 싶었다.

“응, 화서. 이모님은 당연히 널 아끼셨어. 할 수 있다면, 네가 커가는 모습을 보려고 하셨을 거야. 하지만 그땐 위협을 받고 계셨고, 자결하지 않으면 그 나쁜 사람들이 네 목숨까지 해치려고 했겠지. 그래서 자신을 희생해 널 지킬 수밖에 없으셨던 거야.”

정미가 진지한 말투로 화서에게 말했다.

정미는 어쩔 땐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화서의 몸은 완전히 좋아졌지만, 마음은 늘 병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악당의 배후를 알게 되고 그 배후의 결말까지 보았지만, 화서에게는 아직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화서 자기 자신이었다.

화서의 슬픈 모습에서 느껴지는 석연함에, 정미는 비로소 화서의 응어리가 풀렸음을 알게 되었다.

이날은 화서가 수도를 떠나기 전 정미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었다.

화서는 다시 교외에 있는 위국공부의 온천마을로 돌아갔다.

* * *

날씨가 점점 추워졌다. 사실 화서는 이제 더 이상 온천마을에서 요양할 필요가 없었다. 정미가 화서의 몸을 완전히 낫게 해준 뒤로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부러운 티를 내지 않았지만, 화서는 새해와 정월 대보름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아주 좋아했다.

예전엔 명절에 함께할 수 없었지만, 몸이 나은 뒤론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정월 대보름에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온천마을에 찾아갔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마을을 거닐던 화서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익숙한 풀과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늘 여기서 도망치고만 싶었는데, 찾아올 필요가 없게 되니 되레 그리워지다니.’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본 화서는, 곧 웃음기가 사라지고 차갑게 표정이 굳었다.

“세손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화서가 주먹을 꽉 쥐며 차갑게 묻자, 이 우연한 만남에 용흔도 몹시 당황했는지 더듬대며 말했다.

“오…… 올해는 여기 안 올 줄 알았어…….”

“여긴 세손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나가세요!”

“화서―”

용흔이 다가가 화서의 손목을 잡자, 화서가 휙 뿌리쳤다.

“건들지 마십시오! 세손의 모친이 내 어머니와 친우인 척했다고, 세손도 똑같은 짓을 하실 셈입니까?”

용흔은 잠시 멈칫했다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화서,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럼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예전처럼 세손과 함께 온천이라도 들어갈까요? 같이 양고기라도 먹을까요? 죄송하지만, 우린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화서의 말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용흔의 마음에 깊게 박혔다.

용흔이 한걸음 물러나며 슬프게 웃었다.

“화서,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도 잘 알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

‘내 못난 계집도, 이젠 추억과 꿈에서만 만날 수 있으니. 난 도대체 누굴 원망해야 할까. 누굴 원망해야, 내 못난 계집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부부가 되는 건 바라지도 않아. 최소한 다시 어릴 적처럼 나와 투닥거리기도 하고, 같이 웃고 떠들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차마 얼굴조차 못 보겠다고. 황실의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다 거절하고 있고. 못난 계집이 나를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대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

용흔의 처량한 모습에 화서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왜 여기 오신 겁니까?”

“황백부님께 부탁드려서, 봄이 되면 북쪽에 가 경험을 쌓기로 했다.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몰라.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냥 여기 와보고 싶어서 와봤지.”

화서가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자, 용흔이 한 걸음 다가섰다.

“화서, 네가 날 미워하는 걸 알아. 차라리 날 실컷 패거라. 괜찮으니까.”

화서가 고개를 돌렸다.

“때리는 걸로 풀리는 일이었으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요.”

용흔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 평생 나를 원망하며 원수로 여길 셈이냐?”

화서는 용흔을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최소한 지금은 도저히 세손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요. 우선 가세요. 저는 볼일이 있으니.”

화서는 앞으로 나아갔고, 남은 용흔은 한참을 그곳에 멈춰 서있었다.

마을의 끝에는 월계수가 한 그루 있었다.

그 나무는 전에 화서가 정미와 함께 소원을 빌었던 그해보다 더 아름답게 자라있었다.

화서는 나무 아래에 서서 고개를 들고, 한동안 나무를 쳐다보다가 함께 소원을 써서 던졌던 끈을 찾아냈다.

화서의 끈은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걸려있었다.

화서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당시 몸도 힘도 약했던 나는 소원 끈을 몇 번이나 던져도 나무에 걸리지 않았고, 결국 끈에 적은 소원을 정미와 철 형님에게 들키기까지 했지. 철 형님의 응원 덕분에, 새 끈에 더 좋은 소원을 적어 위로 던질 수 있었어. 그리고 그때 적었던 소원은 정말 이루어졌고.’

화서는 나무 아래 머물러 있다가 품속에서 새 끈을 하나 꺼내 힘껏 위로 던졌다.

나뭇가지에 끈이 걸렸고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렸다.

화서는 뒤돌아 힘찬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세상은 아주 넓어. 그리고 이번 생엔 끝내 이 넓고 아름다운 세상을 둘러보지 못하고, 허약한 몸을 아쉬워하며 떠나게 될 줄 알았지. 하지만 정미가 내게 기회를 주었어. 역시 정미는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어릴 때도, 소년일 적에도, 그리고 아주 아주 먼 미래에도, 정미는 여전히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일 거야. 언젠간 이 넓은 세상 속에서, 정미처럼 좋은 아가씨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래,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동안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던 소원을 월계수 나무에 걸어놓았으니까.’

화서가 멀리 떠난 뒤에도 월계수 나무에 걸린 끈은 여전히 나풀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용흔도 조용히 나무 앞으로 가 화서와 마찬가지로 끈을 힘껏 던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떠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더 성숙한 사람이 된 뒤에도, 월계수 나무에 걸린 끈은 소년의 속마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리라.

* * *

수도의 불억루는 방탕하면서도 고상함을 잃고 싶지는 않은 사내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불억루의 명기 청청(靑靑)은 그 돈 많은 사내들의 관심을 받으며 근 2년간 점점 유명해져 갔다.

그러나 이날, 동랑은 차가운 표정으로 청청에게 말했다.

“청청, 정말 속신(*贖身: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함)하고 그 공자를 따라갈 셈이냐?”

청청은 확고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동랑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꽤 실망한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럼 가보거라. 행운을 빌지.”

청청은 동랑에게 큰절을 올리고는 치맛자락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청청이 입구에 다다랐을 때, 동랑이 말했다.

“청청,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거라.”

청청이 뒤돌아섰다. 공손한 표정에는 약간의 불쾌함이 스쳤다.

“감사합니다, 동 마마.”

청청이 떠난 뒤, 동랑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의자에 기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랑, 청청이 좋은 곳으로 간다는데, 왜 굳이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동랑의 시중을 드는 늙은 하인이 묻자, 동랑이 피식 웃었다.

“좋은 곳이라니? 나를 이렇게 오래 따라다녔으면서, 속신한 아가씨들이 결국 어찌 되었는지 다 잊은 건가? 우리 같은 사람이 사내와 평범한 부부가 되어 존중받으며 지낼 수 있을 것 같나? 헛된 꿈이지. 사내들은 잠깐의 쾌락을 즐길 뿐, 흥미가 떨어지면 기생이었던 여인 따위 어찌 취급할지 뻔하지 않나!”

늙은 하인은 한숨을 쉬었고, 동랑은 창밖의 파초나무를 보며 작게 말했다.

“작년에 내가…… 남안왕의 동의를 얻어 자수 마을을 하나 만들었다. 나이가 찬 아가씨들을 그곳으로 보낼 수 있게. 그래서 몇 년 뒤면 청청을 자수 마을로 보내 그곳을 관리하게끔 하려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동랑이 고개를 젓더니 중얼거렸다.

“기생은 늘 사내를 우러러보며 비위를 맞춰야만 하니, 자유 따윈 꿈도 꿀 수 없구나.”

이때, 어린 소녀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남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동랑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뒤에 대답했다.

“들어오시라 하렴.”

어린 소녀와 늙은 하인이 밖으로 나가자 이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동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니, 발소리만 들어도 알겠구나.’

동랑은 입꼬리를 올리고 뒤돌아 아름답게 웃으며 말했다.

“왕야, 오셨군요. 노래를 들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바둑을 두러 오셨습니까?”

남안왕이 온화하게 웃었다.

“노래도, 바둑도 아니오. 동랑, 오늘은 나와 함께 산보나 하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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