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73화 (372/375)

외전 8화. 해 뜰 날

한추화는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품에 있던 물건을 설융에게 건넸다.

설융이 깜짝 놀라 손을 휘저었다.

“한 아가씨, 이건…… 남녀 사이에…… 아니, 아니, 제 말은…….”

설융은 한참을 더듬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속으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마 내게 사랑의 정표를 주시려는 건가?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 아가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진 않은데. 아가씨는 좋은 분이시니까.’

한추화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함을 열어 보였다. 안에는 은표가 들어있었다.

“학당을 여실 거라 들었습니다. 돈이 많이 들 테지요. 하지만 저는 여인이라, 선생과 협력할 수 없습니다. 대신 제가 그간 모은 돈과 장신구를 조금 판 돈을 모아 선생께 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마음으로 받아주세요.”

“아가씨―”

설융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양하지 마세요. 제가 사내였으면 분명 선생과 함께했을 겁니다.”

설융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가씨, 사실 이미 국공야께 대답을 드리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족학에 남아 수업을 하기로요. 국공야께서 족학을 증축하여 빈곤한 아이들을 입학시켜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정말입니까?”

한추화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도 언제든 설 선생과 만날 수 있잖아…….’

“그럼, 외출하시는 겁니까?”

한추화가 함을 다시 거둬들였다.

‘백부님이 나선다면 내 돈은 쓸 필요 없겠군.’

“예. 친우들에게 알리려고요.”

한추화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럼 어서 가보세요.”

한추화가 조용히 뒤돌아서자, 설융은 순간 머리가 복잡해져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사실…… 저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자 한추화가 멈칫했다. 이윽고 찬란하고 수줍은 꽃이 한추화의 얼굴에 피어났다.

그 꽃은 은은한 행복의 향기를 퍼트리고 있었다.

* * *

“채운(彩雲) 언니, 갑자기 왜 천천히 걸어요?”

어린 소궁녀가 등롱을 들고 옆의 궁녀에게 물었다.

채운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참고 손을 뻗어 가리켰다.

“효연(曉鷰)아, 저 앞이 무슨 궁인지 알아?”

효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넌 신입이니까 모를 만도 하지.”

“언니, 저 궁이 뭔데요?”

채운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아. 내 손 꽉 잡아, 얼른 지나가자.”

그런데 효연이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래?”

“언니, 저기 좀 봐요. 누가 누워있어요!”

“어디?”

채운이 사방을 둘러봤다.

“방금 언니가 가리킨 곳이요. 기절했나 본데요? 꿈쩍도 하지 않아요.”

채운은 그쪽을 자세히 보자마자 깜짝 놀라 혼비백산했다.

효연이 말한 ‘누워있는 사람’은 기괴한 자세로 밖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꺅, 귀신이다―”

두 궁녀는 깜짝 놀라 등롱도 던져버리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다음 날, 오래전 잊혀졌던 장춘궁은 다시 궁인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번엔 태후와 황상에게까지 그 소식이 닿았다.

왜냐하면 어젯밤 두 궁녀가 본 여자 귀신은 다름 아닌 아홉째 공주였기 때문이다.

아홉째 공주는 화 귀비가 키우던 공주였지만, 화 귀비가 죽은 뒤 창경제는 어린 공주를 여빈(麗嬪)이 맡아 키우도록 했었다.

겨우 10살밖에 되지 않은 공주가 어째서 밤에 장춘궁에 나타났는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공주는 잠에서 깬 뒤 그저 멍한 표정이었기에, 공주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 * *

태자의 동궁.

정미도 아홉째 공주가 충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올케로서 병문안을 해야 마땅했지만, 태자비가 또 회임하여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도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태자비마마, 소인이 선물 목록을 준비해두었으니 검토해보세요. 문제가 없다면 바로 아홉째 공주 전하께 보내겠습니다.”

정미는 목록을 한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 준비해두렴. 내가 직접 가지고 찾아뵈마.”

“마마―”

“괜찮다. 이 정도 개월 수면 그리 위험하지 않아.”

정미가 약간 부풀어 오른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태자비는 홑몸이 아니었기에 황궁 안에서도 가마를 탈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받았던 바였다.

가마를 타고 가던 중 정미가 갑자기 외쳤다.

“멈추어라.”

옆에 있던 대궁녀가 깜짝 놀라며 작게 말했다.

“마마, 여기서 멈추시다니요. 여긴 장춘궁 아닙니까.”

정미는 가마에서 내려와 담담히 말했다.

“본궁은 그저 장춘궁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뿐이네.”

대궁녀는 정미의 성정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말리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장춘궁은 아주 으스스했지만, 하필이면 황궁 안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기에 평소 어느 곳을 가든 꼭 지나쳐야 했다.

정미는 장춘궁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다가 입구에서 멈춰 섰다.

예전에 정미가 장춘궁에 원혼이 있음을 확인했을 땐, 분명 화 귀비의 원혼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땐 정철의 혈주와 아조를 신경 쓰느라 여념이 없던 데다가 이후 중상까지 입게 되었고, 겨우 몸이 완전히 나았을 땐 또 회임을 하게 되어 장춘궁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홑몸이 아니었기에 그저 와볼 수만 있을 뿐 뭔가 행동을 할 수도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사형께 부탁드려야겠어. 사부님은 갈수록 뵙기 힘드네.’

정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때 궁녀 둘이 정미를 막아섰다.

“마마, 오늘 아침에 황상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아무도 장춘궁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정미는 정신이 들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들어가지 않을 거야. 여기 서 있기만 하마.”

두 궁녀는 서로를 잠시 쳐다보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정미는 눈을 감은 채 넓은 소매 안에 숨겨진 손가락으로 조용히 부적을 그린 뒤, 장춘궁으로 날렸다.

잠시 후, 정미가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떴다.

‘정말 이상하네. 그때 분명 원혼이 궁녀 완수의 목숨을 앗아갔고, 이번에 또 사람을 해치려고 했으니 힘이 더 강해져야 마땅한데, 오히려 다른 평범한 궁처럼 깨끗해졌잖아? 설마 회임 때문에 내 부법이 정확하지 않은 건가?’

정미는 의혹을 품은 채 소순궁으로 향했다.

* * *

아홉째 공주가 까닭 없이 장춘궁에 나타났으니, 창경제는 여빈이 잘 보살피지 못한 탓이라고 노여워하며 공주를 숙비의 궁으로 보냈다.

“태자비, 어찌 된 일인가? 홑몸도 아닌데 푹 쉬어야지.”

숙비는 예전처럼 무기력한 모습이 아니라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몸 상태가 꽤 좋아서 공주를 뵈러 왔지요.”

숙비는 정미를 공주의 방으로 데려가 한숨을 쉬었다.

“어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은 건지, 아직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구나.”

정미는 공주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마마, 제가 부술에 꽤 능통하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혹시 잠시 공주와 단 둘이 있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치료할 수 있는지 시도해보려 합니다.”

“그건―”

숙비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정미의 아랫배를 쳐다봤다.

“걱정 마세요, 마마. 무리하지 않을 겁니다.”

숙비는 정미의 진료를 받은 적 있었기에, 부적을 그릴 때 안정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숙비는 급히 궁인들을 내보낸 뒤 정미와 공주만을 남겨두었다.

사람들이 다 나간 뒤, 정미는 조급해하지 않고 침상 위의 사람을 내려다봤다.

“공주, 내게 할 말이 있지요?”

공주는 눈을 끔뻑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미는 갑자기 공주의 손목을 휙 잡아들었다.

소매가 스르륵 내려가자 가녀린 손목이 드러났다. 그곳엔 특이한 무늬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공주가 손을 빼내며 웃었다.

“역시, 넌 못 속이네.”

갑자기 사라져 찾지 못했던 팔찌를 빤히 쳐다보던 정미는 복잡해진 심정에 마른 목소리로 벗의 이름을 불렀다.

“아혜―”

“그래, 나야. 근데 넌 회임해서 상급 부법을 쓰지 못할 텐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아챘어?”

“너를 보러오기 전에 장춘궁에 먼저 들렀거든.”

정미가 설명했다.

“아홉째 공주의 일로 원기가 더 강해져야 마땅한데, 평범한 궁전처럼 완전히 깨끗해졌더라고. 분명 그 원혼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소멸했을 거라 생각했지. 그리고 혹시나 했던 생각이 적중했고.”

“제법인데.”

아혜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공주의 몸을 빼앗은 거야?”

“아니, 잠시 머무르는 거야. 오늘 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널 찾아갔을 거고.”

정미가 흠칫하자, 아혜가 웃었다.

“내가 아무 몸이나 뺏을 수 있는 줄 알아? 그럼 뭐 하러 너한테 그렇게 매달렸겠어.”

“뺏으려 하기만 해봐!”

정미가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그러자 아혜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정미,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꽤 되었지?”

“응.”

“어찌 되었든 간에, 나도 네게 많은 도움을 주었잖아. 특히 네가 네 부군과 죽으려 했을 때도.”

“역시 네가―”

아혜가 웃었다.

“내가 없었으면 네가 어찌 깨어날 수 있었겠어? 널 깨우느라 내 혼력을 아주 많이 썼다고. 몇 년 동안 수양해서 아홉째 공주를 찾아 화 귀비의 원혼을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고…… 마워.”

정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혜와 오랫동안 지지고 볶아왔지만, 지금은 어떤 사이인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네.’

“그럼, 그 원혼은 역시 화 귀비였던 거네?”

“그래. 후궁에서 죽은 뒤, 원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 그 원혼이 내게 도움이 될 줄이야.”

정미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나쁜 짓을 실컷 저질러놓고선, 원한이라니!”

“넌 모르겠구나. 화 귀비는 제가 20년 동안 키워온 아들에 의해 죽은 거야. 조카에게 탄탄대로를 깔아주려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어? 게다가 나중엔 시신까지 산산조각이 났으니, 원혼은 갈 곳을 잃고 내세에 인간으로 태어날 기회조차 사라지게 된 거야. 정말 비참하지 않니?”

정미는 조용히 아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조금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했다.

“넌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아혜가 제 미간을 톡톡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원혼을 삼켰으니, 화 귀비의 중요한 기억은 다 내 머릿속에 있지.”

정미가 기뻐하며 물었다.

“그럼 내 이모의 죽음이 화 귀비와 관련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어?”

“잠시만, 떠올려볼게.”

잠시 후, 아혜가 입을 열었다.

“쯧쯧, 역시 화 귀비는 악독한 사람이었구나. 네 이모가 겁탈당했던 사건은 화 귀비가 제 오라버니에게 부탁해 사람을 보낸 거였어. 다른 여인이었다면 가문에게도 수치가 된 셈이니 얼마 안 가 죽었겠지만, 네 이모는 평범한 여인보다 훨씬 강인한 사람이라 꿋꿋이 아이까지 낳았지. 그리고 그 아이의 세삼례를 치를 때, 화 귀비가 경왕세자비를 통해 몰래 어떤 선물을 보내게 돼. 네 이모는 그 선물을 보고 자결한 거고.”

“무슨 선물이었는데?”

정미가 화를 참으며 물었다.

“춘화 한 장.”

아혜는 정미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체가 된 네 이모가 그려져 있었어. 가슴엔 복사꽃 모양의 반점이 있었고, 그림 옆에는 ‘혼자 즐기는 것보다, 둘이 즐기는 게 더 좋지 아니한가?’라고 적혀있었지.”

정미는 뒷걸음질 쳤다. 화가 치밀어 올라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주 악독하고 후안무치한 사람이로구나! 이모를 겁탈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악마 같은 짓을 저지르다니. 겁탈당한 뒤, 그런 그림을 모두의 앞에서 보였는데 어느 여인이 버틸 수 있단 말이야?’

“유골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사람으로 환생할 수 없다 했지? 참 잘됐어!”

정미가 노여워하며 말하자, 아혜가 물었다.

“더 물어볼 거라도 있어?”

정미는 고개를 저었다.

‘더 알아봤자 살아있는 사람만 더 고통스러워지는 과거일 뿐이지. 이모가 왜 죽었는지 알아냈으니, 모든 건 화 귀비와 함께 잊어버리자.’

“그럼 마지막으로 날 도와줘.”

“아혜?”

아혜가 웃었다.

“넌 겉으로만 강한 척하지, 속은 유한 사람이니까 거절하지 못할걸.”

“우선 도울 일이 뭔지나 말해봐.”

‘아혜의 말이 맞아. 나는 겉으로만 강한 척하는 사람이고 아혜의 도움에 고마워하고 있으니, 부탁을 쉽게 거절할 순 없지. 하지만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될 테니 신중히 결정해야 해.’

“내가 네 몸을 차지했을 때, 기억나?”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가 정가촌에 가서 조택에서 어떤 물건을 꺼냈잖아? 그건 내 영골(靈骨)이야. 그걸 네 거처인 비서거에 숨겨두었어.”

아혜는 자세한 위치를 정미에게 알려주고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 몸을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내 영골을 찾아와줘. 그럼 드디어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갈 수 있게 돼. 이 팔찌 안에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외로운 혼으로 남아있는 게 아니라.”

“알겠어. 도와줄게.”

회인백부는 현재 봉쇄된 채 아무도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물건을 찾아오는 것쯤은 정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미가 정철에게 상황을 알리자, 정철은 그날 밤 바로 암위를 보내 아혜의 영골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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