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72화 (371/375)

외전 7화. 죽음보다 못한 삶

문이 삐걱대며 열리자, 안에 있던 사람은 깜짝 놀란 새처럼 뒤로 몸을 움츠렸다.

한지가 그 모습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

“이 천한 것, 숨긴 뭘 숨어?”

한지는 여인을 끌고 딱딱한 침상에 던져버리고는 허리의 채찍을 풀어 여인에게 휘둘렀다.

여인은 익숙한 듯 신음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몸을 피하려 할 뿐이었다.

한지는 때릴수록 흥분하는 듯하더니, 마지막엔 두 눈이 시뻘게져서는 채찍을 휙 던져버리고 여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여인은 그제야 애원했다.

“싫습니다―”

“싫다니?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 아니더냐?”

한지가 피식 웃더니, 어디선가 밧줄 하나를 꺼내 여인을 망측한 자세로 만든 뒤 침상 기둥에 묶었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여인을 냉정히 쳐다봤다.

“이러지 마세요. 저도 사람이라고요!”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여인은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다.

“목욕을 하지 않은 지 꽤 되었지? 냄새가 엄청나군.”

한지가 여인을 향해 침을 퉤 뱉었다. 그러고는 이미 만족한 듯 밧줄과 채찍을 챙기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 있던 여인은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찌 이럴 수 있지? 나 정요가 이런 지경까지 몰락하다니!’

“이럴 순 없어. 이건 싫어!”

정요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죽으라고? 이렇게 죽을 순 없지. 난 분명 그 책을 봤는걸. 사람들이 모르는 걸 아주 많이 알고 있다고. 그러니 이렇게 당하기만 할 순 없잖아?’

정요가 갑자기 흠칫했다.

‘책? 그렇지. 이 세상은 원래 그저 한 권의 책일 뿐이었지. 그때 분명 책을 보다가 잠들었나 봐. 이 악몽에서 깨어나면 다 끝날지도 몰라. 그럼 다시 앞날이 창창한 산부인과 의사로 돌아가는 거야……. 어떻게 하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어떤 생각이 정요의 머리에 빠르게 떠올랐다.

‘죽음……. 그래, 내가 이 세상에서 죽으면 원래의 세상에서 깨어날 수 있겠구나!’

정요가 고개를 숙여 손목의 옥팔찌를 어루만졌다.

한지는 정요를 이곳에 가둔 뒤 비녀 하나조차도 모두 빼앗아갔었다. 정요에게 남은 건 이 평범한 팔찌뿐이었다.

팔찌는 이미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야윈 손목에서 쉽게 빠져나갔고, 정요는 팔찌로 침상 기둥을 쾅쾅 내리쳤다. 그러자 팔찌가 조각조각으로 부서졌다.

정요는 가장 날카로운 조각을 골라 이를 악물더니, 거침없이 손목에 휙 그었다.

아주 아팠지만, 팔찌 조각은 충분히 날카롭지 않아 살갗만 베여나갔을 뿐이었다.

“하나도 안 아파. 참아야 해! 반드시 돌아갈 거야!”

정요는 스스로를 최면하듯 중얼거리며 다시 몇 번이고 손목을 그었다. 지옥 같은 고통 끝에 드디어 피가 철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피를 흘리자, 정요의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 * *

정요의 시야는 깨끗한 바닥, 창백한 침구와 하얀색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침상 위에는 어떤 여자가 꿈쩍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여자에게 연결된 의료기기만이 여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오늘 환자에게 반응이 있었다고요?”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여자를 치료하는 의사에게 물었다.

“네, 21일 동안 혼수상태였고 사실 이미 뇌사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깨어나려는 조짐이 보였습니다.”

남자가 쥐고 있던 수첩을 품안에 넣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환자가 일어나면, 곧바로 제게 알려주세요.”

남자가 떠나자, 간호사들이 의사에게 몰려들었다.

“이 선생님, 정 선생님께서 정말 깨어나실 수 있을까요?”

이 선생이 유리 너머로 여자를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희망이 있는 것 같네.”

이때, 어떤 간호사가 외쳤다.

“이 선생님, 206호 환자가 찾으세요.”

“바로 갈게.”

이 선생이 나가자, 간호사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정 선생님이 정말 깨어나실까?”

어떤 간호사가 비웃었다.

“깨어나면 뭐가 달라진다고. 결국 감옥에 가야 하는걸. 차라리 깨어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

“려려(麗麗)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나한테도 알려줘.”

신입 간호사가 애원했다.

“사실 그렇게 숨기는 일도 아냐. 정 선생님은 원래 우리 병원 산부인과 의사였는데, 나이도 젊은데 벌써 박사에다가, 학교 다닐 때도 유명한 천재였대. 그런데 그런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누군가의 정부였을 줄이야.”

“그럼 교도소에는 왜 가는 건데?”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정 선생님처럼 학력도 좋고 능력도 좋은 여자가, 고작 정부로 만족할 수 있겠어? 근데 우연히 그 남자의 본처가 마흔이 넘어서 임신을 하게 된 거야. 우리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출산까지 했는데, 산모와 아이 모두 죽었어. 아이는 남자아이고, 3.5킬로였대.”

“진짜 불쌍하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그게 정 선생님이 한 짓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이후 경찰도 개입하게 되었으니 사실인 거나 다름없지 뭐.”

“그럼 정 선생님은 왜 이 꼴이 되신 거야?”

“인과응보지 뭐.”

다른 간호사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 남자랑 본처 사이에 딸도 있거든. 20살쯤 되었고. 정체를 숨기고 몰래 정 선생님한테 진료를 보러 왔다가 칼로 선생님을 찔러버렸대.”

신입 간호사가 입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럼 그 딸도 교도소에 가야 하는 거 아냐? 본처는 진짜 불쌍하다.”

“가지 않을 거야. 딸한테 정신병이 있다는 게 밝혀졌거든.”

간호사들이 피식 웃었다.

“그 남자는 아내도 아들도 잃고 딸만 남게 되었으니, 소중한 딸이랑 외국에 요양하러 갔다던데. 정 선생님이 이 꼴이 되었는데도 한 번도 안 와봤대.”

한편 중환자실 안, 정요의 미약한 영혼이 격렬히 발버둥 쳤다.

- 헛소리, 그 여자에겐 정신병 같은 거 없어. 교도소에 가야 하는 건 그 여자라고!

삐삐삐―

중환자실에 경고음이 울렸고, 간호사들은 깜짝 놀라 의사를 부르러 갔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뒤, 이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가족에게 알려. 환자가 사망했다고.”

어떤 간호사가 몰래 입을 삐쭉였다.

‘알리긴 누구한테 알려. 정 선생님의 가족들은 창피하다고 전화도 받지 않는데 뭐.’

* * *

정요는 다시 눈을 떴다. 극심한 고통이 느껴짐과 동시에 손목을 두껍게 둘러싼 면포가 보였다.

익숙한 환경과 사람이 눈에 들어오자, 정요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싫어, 여긴 다시는 돌아오기 싫다고!”

한지가 차갑게 웃었다.

“천한 것 같으니. 날 이 악몽 속에 빠트려놓고, 너만 도망칠 셈이었나? 꿈 깨시지!”

정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낯빛은 시체처럼 굳어버렸다.

* * *

승평 30년의 추시(*秋試: 향시(鄕試). 보통 가을에 치르기 때문에 추시라 부르기도 함) 결과가 나왔다. 위국공부의 족학(族學)은 큰 성과를 거두어 급제한 학생이 넷이나 되었다.

그리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위국공부의 족학이 3년 전의 추시부터 빛을 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추시에 급제한 사람은 두 사람이었는데, 둘 중 한 사람은 다음 해 춘시에도 급제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위국공부 족학의 선생인 설융을 주목했다.

이제 막 벼슬길에 오른 학자들은 설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승평 25년의 춘시 때는 설융의 폭로로 인해 재시험이 있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 덕분에 새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시의 결과가 나온 뒤, 수많은 족학과 서당에서 설융을 초대했다.

“그만두겠다고?”

수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위국공은 서재에서 설융의 말을 듣고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자식 농사는 거의 망했으니 손자라도 잘 키워볼 셈이었는데. 이런 좋은 선생이 있으면 위국공부의 족학도 걱정이 없고, 많은 훈귀 고관의 자녀들을 여기 데려와 인맥을 쌓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마음에 든 곳이라도 있나?”

“없습니다.”

몇 년 동안 선생 노릇을 해왔지만, 위국공 눈에 그는 아직도 맹해 보이는 서생이었다. 하지만 두 눈은 아주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간 위국공부의 보살핌 덕분에, 돈을 꽤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뜻이 맞은 친우들과 함께 학당을 하나 지으려고 합니다. 빈곤한 집안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오오.”

위국공은 의외라는 듯 눈을 둥글게 뜨더니 웃으며 말했다.

“선생도 알고 있듯이, 빈곤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당은 유지하기 아주 힘들다네.”

설융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건 저희도 고려해봤습니다. 학당은 두 곳을 지을 겁니다. 초급반은 6세부터 10살까지의 가난한 아이만 받고, 뭔갈 배우기보다는 글자를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둘 겁니다. 학당에서 식사도 챙겨줄 거고요. 그러다 재능이 출중한 아이가 있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할 거고요. 다른 반은 10살 이상의 학자를 받을 겁니다. 부잣집 자제들이 학생으로 들어오면, 그 학비로 학당을 유지하고요.”

말을 마친 뒤, 설융은 쭈뼛거리며 위국공을 쳐다봤다.

설융은 권세에 굴하는 자가 아니었고 다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다.

위국공은 오히려 설융의 이런 성정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사람은 성실하고 솔직하여 큰 성과가 없더라도 착실히 일을 해나가고, 한번 마음에 둔 일이나 사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기 마련이지. 추화가 설융과 혼인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아직도 혼인하지 못한 큰조카를 떠올리자, 위국공은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조카딸의 심성이 아들보다 훨씬 강인하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자마자 다른 여인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지만, 추화는 한 번도 투정부리지 않았지. 어른들에게 공손하고 동생들에게 늘 다정하게 대하며, 근 몇 년 동안은 거의 족학에만 신경 쓰며 여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 추화와 설융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종종 교류한다고 들었으니, 두 사람의 뜻이 비슷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설융이 기꺼이 데릴사위가 될 리는 없고.’

위국공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선생의 생각은 나쁘지 않네. 하지만 학당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모자라 식사까지 챙겨주려면, 아주 큰 유지비용이 들 걸세. 부잣집 자제의 학비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차라리 이렇게 하지. 선생은 위국공부의 족학을 떠나지 말고, 선생의 친우들을 여기 모셔오게. 내가 족학을 증축해 학당을 하나 지을 테니, 그곳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받도록 하게. 어떤가?”

설융은 조금 망설였다.

“여길 나가서 학당을 차리려면, 금전적인 지원 없이는 절대 유지할 수 없을 걸세. 그럼 그 학생들은 어쩐단 말인가? 선생의 좋은 뜻과 노력도 모두 물거품이 되지 않겠나. 차라리 위국공부에서 족학을 증축하여 선생과 친우들이 가르침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더 편하고 좋은 일 아니겠나.”

설융은 마침내 설득되어 읍을 하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곧바로 친우들과 상의하러 가보겠습니다.”

설융이 떠난 뒤, 위국공이 서재의 문을 열자 한추화가 급히 다가왔다.

“백부님, 설 선생은요?”

“방금 나갔는데―”

위국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추화는 급히 인사를 올린 뒤 밖으로 달려나갔다.

위국공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늘 침착하고 진중하던 추화가 이리도 급하게 굴다니.’

“설 선생, 잠시만요―”

한추화가 설융을 쫓아가며 외쳤다.

설융이 멈춰 서자, 한추화는 빠르게 설융에게로 다가갔고 머리를 정돈한 뒤 침착한 표정을 되찾고 말했다.

“족학을 그만두신다고 하던데요?”

설융은 달려오느라 상기된 한추화의 두 뺨을 보며 순간 넋을 놓았다.

‘며칠 못 봤다고 더 아름다워지셨네. 아니, 퉤퉤퉤! 내가 감히 무슨 생각을!’

설융은 가까스로 눈을 피했다.

한추화는 이를 묵인으로 받아들여 마음이 쓰라려 왔다.

‘그렇게 되면 앞으론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렵게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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