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70화 (369/375)

외전 5화. 기습

시녀의 보고를 들은 뒤, 경왕세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증 씨의 거처로 향했다.

그는 입구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발소리가 들려오자, 증 씨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드디어 오셨군요.”

“아무 일 없다면 다시 돌아가겠소.”

“너희 모두 물러나거라!”

증 씨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자 하인들 모두가 밖으로 나가 방 안엔 부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증 씨는 그제야 뒤돌아서 경왕세자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증 씨가 피식 웃었다.

“세자, 사갈 같은 여인과는 동침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요. 저는 청풍명월(淸風明月) 같은 세자께서 본인에겐 조금의 오점도 용인할 수 없어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홀대를 받고, 소원해지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살아왔던 건데. 세자처럼 선량한 사람이라면, 언젠간 마음을 돌리고 다시 나를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경왕세자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래서요?”

증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저는 바보같이, 세자께서 제게 이런 걸 먹이고 계신 줄도 몰랐던 겁니다!”

증 씨가 양유를 가리키며 슬픈 눈빛으로 외쳤다.

‘경왕부에서 몇 년간 세자비에게 조금씩, 천천히 독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자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경왕세자는 침묵했다.

“어째서입니까.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그간 쌓아왔던 부부의 정은 다 잊으셨다 해도, 저는 결국 흔이와 남이의 어미이지 않습니까!”

경왕세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이 그 아이들의 어미이기 때문이지. 이제 이유를 알겠소? 태자비는 태자와 관계가 아주 두텁고, 태자비에겐 당신이 한옥주를 해쳤다는 증거는 없기에 지금 당장은 가만히 둘지 몰라도, 태자가 즉위한 뒤에는? 당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경왕부 전체가 피해를 입어야 한단 말이오?”

“그래서 제가 몇 년간 아프다 죽으면 태자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세자의 짓이라 의심하지 못할 테고, 경왕부도 더 이상 그 일에 연루되지 않을 테고, 세자께선 세상 사람과 우리 자식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겸손한 군자이자, 자애로운 아버지로 남게 되겠군요! 참으로 총명하십니다, 세자!”

증 씨가 슬프게 웃으며 뱉은 말에도, 경왕세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나라도 뭔갈 해야 하지 않겠소. 흔이를 보시오. 지금까지도 혼인하지 않고 마음에 둔 여인에겐 말을 꺼낼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있지. 남이는 당신 때문에 혼연이 끊겼고!”

“그럴 리가요. 제가 한 모든 일은 다 아이들을 위해서…….”

“당신은 총명한 사람이니, 알아서 처신하리라 믿고 있소.”

세자는 이 말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음 날, 시녀가 급히 세자를 찾아와 보고를 올렸다.

“세자비마마의 정신이 이상해지셨습니다.”

“그래? 그럼 가묘로 보내거라.”

경왕세자는 찻잔을 들고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 *

북쪽의 하늘은 유난히 높고 요원해, 구름이 층층이 두껍게 쌓여도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드넓은 초원에 모인 양떼처럼 보일 뿐이었다.

바람이 부는 초원 위, 두 아가씨가 말을 타고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진홍색 승마복을 입은 아가씨가 말채찍을 휘두르더니 성이 나서 말했다.

“위무행은 정말 밉다니까요. 서강에 출정한 공로로 여기에 오자마자 총수가 되고, 늘 우리를 여린 아가씨로만 여기며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고만 하고 말이에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한 장군이 여기 계실 때가 나았어요.”

나머지 한 명은 동그란 얼굴에 조금 어려 보이는 아가씨였는데, 웃을 때 예쁜 보조개가 드러났다.

“가복, 왜 그렇게 화를 내. 그래도 우린 평범한 여인들보다 더 자주 나와 놀 수 있잖아. 위 장군은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한 장군처럼 우리를 다르게 볼걸.”

붉은 옷의 여인이 씩씩대며 말했다.

“공주 전하께선 성정도 좋으십니다.”

동그란 얼굴의 여인은 다섯째 공주 면면, 그리고 붉은 옷의 여인은 서가복이었다.

2년여 전, 덕소 장공주는 딸을 낳은 뒤 다른 일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다섯째 공주는 정식으로 출사(出師)하게 되었다. 마침 북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참이었기에, 다섯째 공주는 스스로 출정을 지원하였다. 고모이자 사부인 덕소 장공주가 그 지원을 허락하자, 창경제는 어쩔 수 없이 다섯째 공주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서가의 첫째 아가씨인 서가복은 이 일을 알게 된 뒤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다섯째 공주의 출정에 함께할 거라 소란을 피워댔다.

그러자 서 대인은 고민에 빠졌다.

‘가복은 벌써 스무 살이 넘은 처자인데, 수도에 온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도 혼인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북쪽에서 지내다가 젊은 장병과 눈이 맞아 돌아오는 게 그나마 가능성 있지 않겠는가.’

서 대인이 상서를 올리자, 창경제는 곧바로 윤허했다.

늙은 황제는 제 딸이 혼자 북쪽에서 외로이 지낼까 걱정하던 참이었기에, 서가복의 출정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두 아가씨는 군량과 지원품을 운송하는 대열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벌써 2년이 지나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 장군이 위국공의 지병이 재발한 연유로 수도로 돌아오자, 그 직무는 서쪽에서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대장 위무행이 이어받게 되었고, 두 아가씨의 일상에는 그 이후로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다섯째 공주는 그나마 참을만했지만, 성정이 거친 서가복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벌써 위무행과 몇 번이나 다투었는지 몰랐다. 서가복은 자신들을 여린 꽃처럼 감싸려고만 드는 위무행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가복의 투정에 다섯째 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드높은 하늘과 광활한 초원에서 달리는 나날이 수도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자유로운걸. 위 장군도 진짜로 우릴 구속할 순 없을 거야. 이틀 전에 정미가 서신을 보내왔는데, 또 회임을 했대. 황궁에서 감옥에 갇힌 것처럼 생활하고 있어서 우리 둘이 아주 부럽다고 하더라.”

서가복이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그 말도 맞네요. 아무리 좋은 사내라 한들, 황궁의 생활이 편할 리는 없으니까요. 우리처럼 고기와 술을 마음껏 먹지도 못하는 데다가, 적이나 몇 명 죽이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좋지 않은 기분을 풀지도 못하니 말이에요.”

2년간의 군영 생활에 서가복의 부드러운 피부도 조금 거칠어진 채였다. 이에 타고난 씩씩함까지 더해지자, 서가복이 웃으면 왠지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영지에 도착해 말에서 내리자, 키가 큰 사내가 두 손을 팔짱 끼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공주 전하, 그리고 서 아가씨,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바깥은 위험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서가복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가서 잠깐 돌아다니다 온 거예요. 걱정도 많으십니다. 공주 전하, 이만 가지요!”

위무행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인은 정말 어렵다니까. 예전에 정 형제와 서쪽에서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칠 때가 좋았어. 에이, 그만 생각해야지. 정 형제는 이미 태자가 되었고, 내 부장은 두 아가씨가 맡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쉽구나.’

밤이 되자, 위무행은 부대 하나를 이끌고 계획대로 북제 군영을 습격했다.

신발에 부드러운 천을 두른 위무행 부대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서가복은 조용히 눈을 뜨고 막사를 나와 다섯째 공주의 막사로 들어갔다.

뜻밖에도 다섯째 공주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공주 전하, 왜 주무시지 않았나요? 위무행이 야간 습격을 나가는 걸 보셨나요?”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 또 우릴 내버려 두고 말이에요.”

서가복이 이를 갈며 말했다.

“전하, 따라가지요.”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위 장군이 나보고 영지를 지키라 했어. 적군의 습격을 대비해서.”

서가복의 눈이 커졌다.

“왜 저는 몰랐지요?”

다섯째 공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긴 했으나, 머릿속에선 위무행의 말이 맴돌았다.

‘서 아가씨는 성질이 급하니, 영지는 공주 전하께 맡기겠습니다.’

“가복, 우선 돌아가. 우리가 영지를 지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니.”

서가복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뒤돌아 나갔다. 막사로 돌아온 뒤에는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채찍을 허리춤에 두르고 몰래 친위대를 소집해 군영을 빠져나갔다.

* * *

불빛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어둠이 사방을 가렸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무수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위무행이 손을 크게 휘둘렀다.

“후퇴한다!”

‘기습에 성공해 북제군의 군량 대부분을 불태웠으니, 술이나 한잔해도 되겠군.’

그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영지로 돌아왔을 땐, 영지도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다섯째 공주가 군장을 입은 채 피 묻은 망치를 들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위무행이 깜짝 놀라 다가갔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위 장군의 예상대로 밤에 적군이 쳐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미리 준비를 해둔 덕분에 모두 무찌를 수 있었지요.”

위무행은 코를 만지작대며 으쓱함을 숨겼다.

‘정말 적군이 습격했단 말인가? 양쪽에서 같은 날에 야간 습격을 계획하다니. 참 교묘하군. 큼큼, 그냥 두 아가씨를 영지에 남겨두려고 두른 핑계였을 뿐인데.’

“서 아가씨는 어디 갔습니까?”

‘이런 상황에 막사 안에서 자고 있을 리는 없고.’

“계속 안 보이더군요. 방금 막 상황이 끝나 부르러 간 참입니다.”

다섯째 공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친위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전하, 서 장군께서 막사에 안 계십니다. 장군의 친위대도 보이지 않고요!”

공주와 위무행이 서로를 쳐다봤다.

“공주 전하, 습격한 적군의 수는 어느 정도 됩니까?”

“4-50명 정도 됩니다.”

위무행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큰일 났군요. 적군이 겨우 그 정도 병사만 보냈을 리 없습니다. 분명 병력을 나누었을 텐데, 그중 하나가 서 아가씨와 맞닥뜨린 것 같습니다. 전하, 군영을 맡아주십시오. 제가 서 아가씨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위무행은 곧장 부대를 이끌고 영지를 떠났다. 병력을 나누어 각각 서가복이 있을 가능성이 큰 방향으로 보냈다.

밤은 점점 깊어져 별빛도 희미해져갔지만, 위무행은 그간 쌓아온 출정 경험으로 점점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바람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지더니, 곧이어 바닥에 쓰러져 이리저리 뒤엉킨 시체들이 보였다.

친위가 시체를 뒤집어보더니 보고를 올렸다.

“장군, 시체들은 북제군과 아군이 섞여 있습니다.”

위무행은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 손을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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