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가깝고도 먼 사람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 정동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머니, 누굴 죽이셨어요?”
“네 조모 말이다!”
정동은 잠시 멍해졌다.
동 이낭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어미도 고의로 그런 게 아니다. 정말 고의가 아니었단 말이야. 네 조모가 계속 욕을 퍼붓기에 순간 욱해서…… 정신을 차려보니 베개에 깔려 숨을 거두신 뒤였다.”
정동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 이낭이 머뭇거리며 정동을 쳐다봤다.
“너도 이 어미가 두렵다면, 이대로 떠나마. 그저 널 한 번 보고 가려 했던 것뿐이란다.”
정동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뇨, 잘하셨네요!”
“동아?”
“걱정 말고 여기 머무세요. 어쨌든 그 사람들은 저흴 찾지 못할 거예요.”
정동은 수도를 떠난 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동 이낭에게 거처를 알렸다. 마당의 석류나무에 묶은 붉은 끈이 바로 그 표시였다. 하지만 다시 만날 날이 정말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동 이낭에게서 최근 수도에 일어난 일을 들은 정동은 몹시 통쾌해했고, 제 어머니에게 목욕을 할 수 있게 안내한 뒤, 유야를 돌보러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희미한 촛불 아래, 정동은 따스한 눈빛으로 유야를 쳐다보다가 문득 유야의 두 뺨이 조금 붉은 것 같아 만져보았고 순간 깜짝 놀랐다.
‘열이 나고 있잖아!’
낮에 물에 빠졌던 일이 떠오르자, 정동은 마음이 급해졌다.
마을엔 의원이 한 명밖에 없었다. 사실 의원이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환자가 오면 약초를 한 줌 쥐여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걸 먹고 나으면 행운이었고, 먹고 더 나빠지면 그것도 환자가 감당할 몫인 수준이었다.
괜찮은 의원은 진(鎭)으로 가서 모셔와야 했고, 진으로 가려면 큰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정동은 눈앞이 점점 캄캄해졌지만,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에 유야를 등에 업고 걸어 나갔다. 그녀는 집을 나서기 전, 하인 한 명도 불러왔다.
“진에 같이 가주렴. 유야가 열이 나는구나.”
산길로는 마차를 탈 수 없었기에 걸어서 산을 넘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깊은 밤 산길은 더욱 위험했다. 남자 하인은 등불을 정동에게 건네주고는 유야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이 대문을 나섰을 때, 이웃 대장장이 집의 문이 열렸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정동은 건장한 대장장이를 보았다가, 다시 허리를 꾸부정하게 숙이고 있는 남자 하인을 쳐다보았다.
‘저 사내가 유야를 업고 진에 가주면 좋을 텐데. 발이 빠르니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평소 저 사내에게 내가 얼마나 매정하게 굴었는데, 이렇게 도움을 구하기엔―’
그러나 아들을 위한 일이었기에, 정동은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이가 열이 나서 진에 가려고 합니다.”
“의원을 모시려고요? 마침 잘됐네요. 제 친척이 진의 의원인데, 오늘 마침 여길 방문했거든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제가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 * *
며칠 뒤, 유야의 상태가 거의 좋아지자, 정동이 기회를 틈타 사내에게 물었다.
“사실대로 말하세요. 그날 정말 우연히 친척 의원이 당신 집에 왔던 게 맞나요? 그쪽 집엔 아무 친척도 없다고 들었는데.”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아이가 물에 빠졌으니, 혹시라도 열이 날까 봐 진에 가서 의원을 미리 모셔왔지요. 정말 열이 나면 빨리 진료를 봐야 하니까요.”
“유야가 열이 나지 않았으면? 시간을 허비한 셈 아닌가요?”
“그게 뭐라고요. 의원을 다시 보내드리면 되지요. 어쨌든 돈은 지불했으니까요.”
정동은 사내의 바보 같으면서도 찬란한 웃음을 보자 고마운 마음을 느꼈지만, 왠지 씁쓸하기도 했다.
‘내게도 이렇게 진심으로 잘 대해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구나.’
“어, 설마 제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또 화내실 건 아니지요?”
사내가 손을 빌어대자, 정동이 그를 흘끗 노려봤다.
“화내면 어쩔 건데요?”
사내는 다급히 새로 잡은 생선 두 마리를 정동에게 내밀며 우물쭈물 말했다.
“그, 그럼 이 생선이라도 드릴까요?”
정동은 대답도 하지 않고 뒤돌아갔고, 대문 입구에 서서 뒤돌아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마침 유야도 몸보신을 해야 하니.”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따 점심 식사나 같이해요.”
대문이 닫히자, 사내는 그제야 머리를 긁으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때 문이 갑자기 다시 열리더니, 정동이 머리를 내밀고 비웃었다.
“그만 긁어요. 머리에서 종일 생선 비린내가 나니까!”
* * *
남 군주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오라버니인 용흔이 혼사를 거절당한 뒤 정미에게 따지러 갔던 그 겨울날, 용남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를 급히 쫓아가다 어떤 사내와 부딪혔다.
용남은 그 사내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사내는 사씨 가문의 장자 사철이었고, 용남에겐 어찌 보면 친척 오라버니인 셈이었다.
하필이면 눈이 많이 내린 날이어서일까, 평소엔 생각 없었던 사람이 저를 품에 안자마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국공부가 경왕세자비 증 씨와 관계를 끊은 이후로, 용남은 더 이상 위국공부에 아무렇게나 찾아갈 수 없게 되었고, 사철을 만날 기회도 사라지게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용남은 혼기가 꽉 찬 나이가 되었지만, 마음에 잊히지 않는 사철의 모습 때문에 아무와도 혼인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 부군이 그 사람보다 못하면 어쩌지? 만약 내가 부군을 은애할 수 없으면? 만약…….’
사실 모든 고민은 그저 사철과 이루어지고 싶은 마음에 생긴 핑계였다. 용남도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경왕세자 또한 시집가지 않으려는 딸의 마음을 캐물은 끝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도의 날씨는 점점 더워졌고, 용남은 더운 날씨가 찾아올 때마다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리 이른 아침부터 마음이 들떠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용남의 시종이 몇 번이고 확인한 끝에, 손님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용남은 치맛자락을 들고 응접실로 달려간 뒤 병풍 뒤에 숨었다.
‘아버지께서 드디어 사씨 집안에 혼사를 꺼내는 걸 허락해주셨어. 성사될지 어떨지는 오늘 중매인과의 대화에 달렸겠지.’
응접실 안에 경왕세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실 이런 일은 원래 집사람이 맡아야 하는데, 최근 집사람의 몸이 좋지 않아 내가 직접 나서게 되었소. 이(李) 형, 사씨 집안의 반응은 어떻소?”
용남은 긴장 되어 손수건을 꽉 쥐었다.
‘이 형’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사씨 집안과 위국공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평범한 중매인을 보내는 건 적절치 않았다. 사가 부인과 잘 아는 부인을 보내 떠보는 게 오히려 나을 터였다.
‘그리고 오늘 찾아온 이 대인의 부인이 바로 사 부인과 잘 아는 사람일 테지.’
응접실 안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집사람이 사 부인의 뜻을 넌지시 떠보았는데, 사 부인은 이미 아들과 혼인시킬 아가씨를 생각해두었다 하셨다는군. 아쉽게 되었소.”
뒤의 대화는 더 이상 용남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용남은 입을 꽉 틀어막은 채 병풍에 기대 스르르 쓰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님이 떠난 뒤, 경왕세자가 병풍 뒤에 나타난 뒤에도 용남은 여전히 머리를 묻고 조용히 흐느꼈다.
경왕세자가 딸을 일으키며 한숨을 쉬었다.
“남아, 울지 말거라. 우리 남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가씨라는 건 이 아비도 잘 알고 있단다. 다만―”
“다만 뭐요?”
용남이 멍하니 물었다.
“다만 사가의 노부인은 위국공부 단 노부인의 친여동생이지 않으냐. 그러니 네 어머니와 위국공부 사이에 생긴 응어리를 모를 리 없고―”
경왕세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남은 얼굴을 가리고 뛰쳐 나가버렸다.
용남은 곧장 세자비 증 씨의 처소로 찾아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증 씨는 최근 몸이 점점 안 좋아져 지금 시간에야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용남이 들어오자, 증 씨의 눈이 반짝이더니 감동한 듯 말했다.
“남아, 왔구나.”
‘그날 밤’ 이후, 증 씨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부군이 저를 찾지 않음은 물론이고, 자식들마저 어미인 저를 멀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옷도, 맛있는 음식도, 증 씨에겐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자식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증 씨에겐 마치 딴 세상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왜 그런 짓을 하셨어요?”
용남이 입술을 꾹 깨물고 증 씨를 쳐다보자, 증 씨의 입술이 떨렸다.
“남아, 아직까지도 내가 미운 게냐?”
용남이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어머니, 다들 뭐라고 얘기하는지 알고 계세요? 한옥주의 가장 친한 벗이었던 어머니가 한옥주의 아름다운 외모를 질투해서 그런 사고가 난 거라고, 그래서 위국공부가 이 사실을 안 뒤 어머니와 관계를 끊게 되었다고―”
“터무니없는 소리다!”
증 씨가 용남의 말을 단호히 끊어내더니 감정이 몹시 격해진 듯 말했다.
“그 사람들이 뭘 안다고? 증거라도 있느냐?”
“어머니―”
용남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에겐 증거 따위 필요 없어요. 다들 그냥 그렇게 믿는 거예요.”
‘그래서, 난 연모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잃게 되었고!’
“어머니, 어쩔 땐 정말 어머니가 미워서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에요!”
용남은 창백하고 야위어진 증 씨를 쳐다봤고, 차마 더 이상 모진 말을 이어갈 수 없어 치맛자락을 들고 뒤돌아 달아났다.
‘어머니가 내 평생의 행복을 앗아갔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자식들은 부모의 덕을 누리는 대신, 부모의 업보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법이니까.’
노란 치마를 입은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증 씨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화 귀비가 못된 마음을 먹고 한옥주의 순결을 빼앗은 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내가 이 집안을 지켜온 것도, 내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는데. 어찌 자식들마저 나를 질책한단 말인가?’
“세자비마마, 식사하시지요.”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증 씨는 입맛이 전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치우고, 너희끼리 나눠 먹거라. 양유(羊乳)는 맹맹(萌萌)한테 주고.”
부군과 자식들이 저를 멀리하기 시작한 뒤로, 증 씨는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했고, 맹맹은 세 번째 고양이였다.
곧 증 씨의 생각이 바뀌었다.
“맹맹을 데리고 오거라. 내가 직접 먹이마.”
증 씨에게 고양이는 이미 자식과도 다름없는 존재였다.
어쩔 땐 증 씨는 고양이들이 모두 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들 허약해 병을 자주 앓더니, 어찌 마음을 다해 보살펴도 벌써 두 마리가 떠나고 말았고, 맹맹도 골골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녀가 맹맹을 데리고 오자, 증 씨는 양유를 손에 따라 맹맹에게 먹였다.
맹맹은 몇 입 정도 할짝대더니 더 이상 입을 대지 않았다.
“맹맹아, 착하지. 좀 더 먹어보렴. 잘 먹어야 튼튼해지지.”
주인이 재촉하자, 맹맹은 억지로 몇 입 더 먹어보더니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증 씨는 사랑스럽다는 듯 웃더니 고양이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정말 까탈스러운 녀석이라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증 씨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증 씨의 무릎 위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그새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증 씨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완전히 무너진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마―”
옆에 있던 시녀는 세자비의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증 씨는 그저 고개를 숙여 꿈쩍도 하지 않는 고양이를 쳐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마마, 소인이 맹맹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증 씨가 침묵하자, 시녀가 고양이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증 씨는 계속 멍하니 앉아 있다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려다 손바닥이 끈적이는 느낌에 고개를 숙여 손바닥을 비벼보았다. 손바닥엔 마른 양유가 들러붙어 있었다.
증 씨의 눈빛이 굳더니, 은침을 찾아내 양유가 담긴 그릇에 살짝 넣어보았다. 그러자 은침의 색깔이 희미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증 씨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뒷걸음질 쳤다.
‘이제 다 알겠구나. 내겐 늘 양유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고, 입맛이 없을 땐 고양이에게 주었지. 어쩐지 내 몸이 갈수록 약해지더라니, 어쩐지 고양이들이 이유 없이 죽어버리더니! 누가 양유에 독을 탄 거지?’
증 씨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여봐라!”
“마마, 부르셨습니까?”
한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세자를 모셔오거라!”
시녀는 머뭇거렸다.
최근 2년 동안 경왕세자가 증 씨를 찾지 않은 건, 집안 하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세자비가 사람을 보내 모셔 오려 한 적도 있었지만, 매번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서!”
증 씨는 감정이 격해진 듯 말했다.
“세자께서 오지 않겠다 하시면, 오늘 내가 세손과 군주 앞에서 죽을 것이라 전하거라!”
“예. 바로 전하겠습니다.”
시녀는 놀라 밖으로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