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어린 미녀
교외 근처에는 행화촌(杏花村)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은 미녀가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행화촌의 여인들은 정말 살구꽃처럼 아리따웠다.
춘연(春燕)은 행화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였고, 13살 무렵부터 많은 사내들이 그녀를 흠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춘연은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2년여 전 마을에 어린 과부가 이사를 왔는데, 그때부터 제일 미녀의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춘연은 굴복하지 않았다.
‘아들이 딸린 어린 과부 따위가 어찌 나와 비할 수 있겠어?’
외출할 때마다 춘연은 늘 그 과부의 집을 향해 침을 뱉은 뒤에야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빨래를 하러 가곤 했다.
이때, 맞은편에서 스무 살이 넘어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다가왔다.
“진 오라버니, 물고기 잡으러 갔다 왔어?”
사내의 바깥에 드러난 팔엔 튼실한 근육이 잘 자리 잡혀 있었고, 다른 시골 사내들처럼 시커먼 피부색이 아닌 빛깔 좋은 고동색 피부였다.
큰 눈에 짙은 눈썹을 가진 단정한 이목구비의 사내는 처녀들과 젊은 부인들 사이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길을 거닐 때마다 많은 추파를 받곤 했다.
사내는 한 손엔 통발을, 다른 한 손엔 이름 모를 들꽃을 한가득 들고 있었고, 기분이 좋은지 경쾌한 발걸음으로 논밭 길을 걸어갔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 건지, 사내는 ‘마을의 꽃’인 춘연을 무시하고 지나쳐버렸다.
“진 오라버니, 불렀잖아!”
춘연이 발을 동동 굴렀고, 사내는 그제야 멈춰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였구나. 미안해. 못 봤어.”
춘연은 숨이 턱 막혔다.
‘나 같은 미인을 못 보고 지나쳤다고? 내가 아직 어려서인가?’
춘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제 가슴팍에 작은 만두만큼 솟은 봉우리를 쳐다보더니, 가슴을 활짝 펴고 다가갔다.
“오라버니, 손에 든 꽃 정말 예쁘다. 나 줘.”
“안 돼. 고양이 먹일 거야.”
‘고양이?’
춘연은 멍해졌다.
‘고양이가 들꽃을 먹어?’
마음에 둔 사내의 진지한 모습을 보자, 춘연은 망설였다.
‘그래, 고양이가 들꽃을 먹을 수도 있지. 키워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사내는 춘연이 멍한 틈을 타 손을 뻗어 한곳을 가리켰다.
“저쪽 산비탈에서 꺾은 꽃이야. 마음에 들면 가서 꺾어와. 아주 많더라고.”
그러고는 휙 떠나갔고, 통발 안의 물고기는 펄떡이며 춘연에게 물을 튀겼다.
춘연은 멀어지는 사내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 짜증 나. 들꽃은 고양이 거라 쳐. 그럼 물고기를 나한테 주면 되잖아!”
춘연은 문득 슬퍼져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꽉 쥐었다.
‘내 진 오라버니가 그 망할 과부에게 혼이 다 뺏겨버렸어!’
춘연의 추측이 옳았다. 사내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다가 어떤 집 앞에 멈춰 섰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집은 마을 안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하고 낡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이 담장 안의 것들은 모두 새것으로 바뀌어 있으리라 장담했다. 작은 마당도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석류나무도 한 그루 심어져 가지와 잎이 무성히 자라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사내가 집에 들어가 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정말 이상하지. 우리 마을에 문지기가 있는 집이 어디 있다고!’
사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안에서 열아홉 남짓한 아리따운 부인이 걸어 나왔다.
작고 깜찍한 외모의 부인이었다. 대야를 품에 안고 빠르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에 사내는 가슴이 아파 와 급히 부인에게로 다가갔다. 춘연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환한 표정이었다.
“저기,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부인은 사내를 흘끗 노려봤다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필요 없습니다!”
집 안엔 우물도 있었고, 빨래를 맡은 하인도 있었지만, 그녀는 냇가로 가 직접 빨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냇물이 손끝을 스쳐 흘러가고, 귓가엔 닭과 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왠지 기분이 편안해지기 때문이었다.
부인이 사내를 돌아 밖으로 나가자, 사내는 꽃다발을 부인 앞에 내밀었다.
“산비탈에 갔다가 꽃이 예쁘게 피어있길래, 그대의 집에 어울릴 것 같아 꺾어왔습니다. 받아주세요.”
“됐습니다. 멀쩡한 꽃을 꺾어오다니, 정말 아깝군요.”
사내는 억울했다.
예전에 하 소저가 들꽃을 들고 집에 돌아가는 모습을 본 적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하 소저의 환한 웃음은 사내의 심장을 두근두근 뛰게 했다.
‘분명 겉으로만 싫은 척하는 걸 거야. 절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지.’
사내가 통발을 부인에게 내밀었다.
“그쪽 말이 맞습니다. 꽃은 산비탈에 피어있는 게 제일 보기 좋지요. 하지만 이 통통한 생선은 딱 먹기 좋으니, 제가 대접해드리겠습니다.”
부인이 사내를 휙 밀치고 화를 냈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짜증나게 정말!”
부인은 빨래 대야를 안고 떠나갔고, 남은 사내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조용히 들꽃과 통발을 집 입구에 내려놓았다.
얼마 후 부인이 빨래한 옷을 들고 돌아오는데,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어린아이가 달려 나와 기쁘게 외쳤다.
“어머니, 돌아오셨어요? 집에 물고기가 아주 많아요. 아저씨가 물고기를 뒷마당에 있는 연못에 기르자고 하셨어요. 그럼 언제든 신선한 생선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요!”
부인이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땀을 닦아주며 꾸짖었다.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땀범벅이구나.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하렴.”
아이가 가슴을 탁탁 쳤다.
“걱정 마세요, 제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어머니, 제게 글자를 가르쳐주신다고 했잖아요. 언제부터 가르쳐주실 거예요?”
부인은 아이의 뺨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웃었다.
“이따 부를 테니, 우선 놀고 있거라.”
“네!”
아이가 신나서 다시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부인은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이런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니, 정말 좋구나. 여긴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유야가 바보였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지. 예전의 화려한 생활엔 미치지 못하지만, 매일이 행복해서 꿈에서조차 웃음이 나올 지경이야. 하지만 유야에겐 조금 미안해. 돈이 모자란 건 아니지만, 이런 시골에선 신선한 생선을 먹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니.’
이 부인은 바로 정동이었다.
정동은 생각에 잠겼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봐라―”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부인이 빠르게 걸어 나왔다.
“부인, 시키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생선은 어디서 가져온 거지?”
“아, 그건…… 입구에 놓여있었습니다. 들꽃 한 다발과 함께요.”
“또 그 대장장이 놈 짓이구나!”
정동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 사내를 떠올릴 때마다 속에 화가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사실 그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출신이 좋았다면, 수도에서도 출중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내가 내게 얼마나 잘해주든, 내게 그런 과거가 있는데 어찌 다시 혼인할 수 있겠어? 안 되겠다. 앞으로 더 거리를 두어야겠어. 얼마나 어렵게 얻어낸 평화로운 일상인데, 절대 잃을 수 없어.’
“생선과 꽃을 다 밖에 내다버려!”
하인이 쩔쩔매며 말했다.
“도련님이 점심에 생선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는걸요. 이미 두 마리를 잡아두었는데―”
정동은 기가 차서 한숨을 쉬었다.
“그럼 됐다. 그냥 두어라.”
‘그 사람이 준 것을 이런 식으로 내버려둔 게 벌써 몇 번짼지. 정말 짜증 나 죽겠네!’
이때, 갑자기 날카로운 고함이 뒷마당에서부터 들려왔다.
남자 하인의 목소리였다.
정동은 깜짝 놀라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시골에서 이삼 년간 생활해온 덕분에, 정동은 더 이상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았던 연약한 규수가 아니었기에 순식간에 뒷마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야!”
눈에 들어온 장면에 정동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얼른 달려들어 유야를 안고 고함쳤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사내가 당황하며 말했다.
“소…… 소인이 채소를 따러 간 사이, 도련님께서 연못에 빠지셨습니다…….”
“유야, 유야! 일어나보렴!”
정동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아 외쳤다.
“어서 의원을 모셔오지 않고!”
두 하인은 당황한 나머지 함께 밖으로 달려나갔고, 혼자 남은 정동은 유야를 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저…… 아이가 물에 빠졌다면, 의원을 모셔오기엔 시간이 모자랄 겁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동은 고개를 들어보았다. 담장 밖의 사내가 어느새 담을 뛰어넘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정동은 유야를 내려놓고 성난 표범처럼 달려들어 주먹으로 사내의 가슴팍을 힘껏 때렸다.
“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네가 생선을 두고 간 탓에, 우리 유야가 연못에 빠진 거야!”
“부인, 부인―”
“꺼져!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정동은 사내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주먹으로 때리는 것도 모자라 손톱으로 그를 매섭게 할퀴었다.
“쓰읍―”
사내는 숨을 들이켜며 정동의 팔을 붙잡더니 곧바로 정동을 안아 옆에 내려놓고는 화를 냈다.
“지금 이럴 때입니까? 아이를 살리지 않을 셈이에요?”
그러고는 유야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쭈그려 앉더니, 양손을 겹쳐 유야의 가슴에 얹고 여러 번 살짝 눌렀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유야가 물을 토해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정동이 기뻐하며 흐느꼈다.
“우리 아들, 정말 다행이구나. 이 어미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네가 없으면 이 어미는 어찌 살아간단 말이야?”
“어머니, 죄송해요―”
유야는 정동의 손을 붙잡더니, 사내를 보며 빙긋 웃은 채 말했다.
“아저씨, 저희 집에 생선이 있어요. 드시고 가세요.”
정동은 조용히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유야는 하필 이 사내와 사이가 좋단 말이지!’
“괜찮다. 아저씨는 배가 커서 생선이 모자랄걸.”
사내가 웃으며 유야의 젖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인, 어서 아이의 옷을 갈아 입혀주세요. 저는 우선 가보겠습니다. 누가 보면 괜한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사내는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으며 웃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세요.”
정동은 담벼락을 보며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어머니, 진 아저씨는 진짜 대단하시네요. 저희 아버지도 담장을 뛰어넘을 수 있나요?”
“너희 아버지는…… 담을 넘는 사람이 아니란다.”
폐태자를 떠올리자, 정동의 목소리는 절로 차가워졌다.
“그럼 진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보다 낫네요.”
유야가 중얼거렸다.
정동은 완전히 힘이 풀려 집 안에서 유야를 지키며 종일 외출하지 않았다.
밤이 되고 정동이 얕은 잠에 빠졌을 때,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정동은 하인을 불러 명했다.
“가서 바깥에 누가 왔는지 확인해 봐.”
잠시 후, 여자 하인이 들어와 말했다.
“부인, 부인의 어머니라 하시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정동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서 안으로 모셔.”
처량한 모습의 동 이낭이 안으로 들어서자, 정동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동 이낭은 부상을 입은 짐승처럼 경계하며 하인을 쳐다봤다.
“우선 물러나거라. 목욕물과 깨끗한 옷을 준비해주고.”
하인이 나가자, 동 이낭이 정동을 휙 끌어안으며 벌벌 떨었다.
“어미가 사람을 죽였다!”
정동은 순간 온몸이 굳었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어머니, 우선 옆방으로 가서 얘기해요. 유야가 자고 있어요.”
동 이낭은 푹 자고 있는 유야를 흘끗 쳐다봤다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유야는 바보가 아니니?”
정동은 조금 불쾌했지만 차분히 설명했다.
“여기 오기 전에, 셋째 언니가 몰래 치료해주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