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빈 곳
젊은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는 짓이오?”
노점 주인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화를 냈다.
“더 실력 좋은 사람을 찾으셔야겠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모사하지 못합니다.”
‘나는 진사 출신에, 한림원도 들어갔었던 사람이라고. 살림이 아무리 어려워도 춘화를 그리는 수준까지 떨어질 순 없지. 게다가 이렇게 괴상한 장면이라면 말이야!’
젊은이는 제 제안이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는 듯 수치스러워했다.
“다시 묻겠소. 그리지 않겠다는 거요?”
노점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예, 못 그립니다.”
젊은이는 아주 노여워하며 침을 퉤 뱉었다.
“퉤, 글자나 그림 따위를 파는 노점상 주제에, 이 몸이 ‘선생’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놈이었군. 그리지 않겠다면 은을 이리 돌려내! 거기, 너희는 이 가게를 망가트려 버리거라.”
젊은이 뒤에 있던 두 하인이 곧바로 앞으로 나오더니, 한 사람은 노점을 밀어 넘어트리고 한 사람은 이를 짓밟기 시작했다.
“밟지 마시오. 밟지 말라니까! 법도도 모르는 거요!”
“법도? 동성에선 이 몸이 바로 법이다. 너 같은 가난뱅이가 감히 이 몸 앞에서 법도를 논해?”
젊은이는 노점 주인을 힘껏 발로 찼고, 이에 노점 주인은 바닥에 털썩 내팽개쳐졌다.
두 하인이 노점 자리를 완전히 망가트리자, 젊은이가 그를 내려다보며 콧방귀를 꼈다.
“주는 복도 못 받아먹는군. 너희는 앞으로 매일 여기 시장을 한 바퀴씩 둘러보며, 이자가 노점을 차리면 바로 망가트리거라!”
“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젊은이와 두 하인은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떠나갔다. 남은 노점 주인만이 처량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한동안 이웃 가게였던 행상인이 그를 일으켜 세우며 한숨 쉬었다.
“어찌 동성의 3대 깡패 중 둘째인 조씨네 도련님을 건드리셨소. 앞으로 여기선 장사를 이어가지 못하실 거요.”
노점 주인은 일어나 망가진 제 노점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행상인을 밀치고 씩씩대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 * *
“네, 네 노점이 망가졌다고? 그림을 그려주지 않아서?”
좁고 작은 침상 위에 누워있던 늙은 부인이 입을 삐쭉이며 욕을 퍼부었다. 입가로 침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쓸모없는 놈. 집안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따위 그림이 뭐라고? 겨우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나 싶었더니 다시 끊겨버렸구나. 내 약값조차 벌지 못하면 어쩔 셈이냐? 그래, 이제 난 움직이지도 못하는 폐인이나 마찬가지니, 너희 모두 내가 죽길 기다리고 있겠지!”
늙은 부인의 발음은 어눌했지만, 그간 부인과 지내온 가족들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 그게 아니라 정말 도저히 그릴 수 없어서―”
“퉤! 부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 내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세 형제 중에 널 가장 아꼈단 말이다!”
노점 주인은 바로 정미의 아버지 정수문이었다.
맹 노부인의 말에, 정수문은 고통스럽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간 몇 년간의 생활은 그에겐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작위를 뺏기고 회인백부에서 쫓겨난 뒤, 살림의 밑천이 되어주던 제생당마저 덕제당의 견제에 문을 닫게 되었고, 겨우 몇 개 남은 점포들마저도 연달아 문제가 생기면서 겨우겨우 적자를 메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인들은 떠날 하인은 모두 떠났고, 팔 수 있는 하인은 모두 팔아버린 상태였다. 셋째는 어머니의 독설에 화가 나 분가를 했고, 그때부터 매월 은전을 조금씩 보내올 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돈은 대가족에겐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는 금액이었다. 정수문은 서원(書院)이나 부잣집에 선생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일한 지 며칠 만에 집안의 내막을 들키고 말았다. 폐태자 사건과 연루된 사람을 감히 고용하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일말의 정도 없이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다 뜻밖에도 첫째의 딸 정옥이 자수방에 자수품을 보내러 갔다가 마흔이 넘는 절름발이 사내의 눈에 띄었다. 그는 정옥을 첩으로 삼으려 했고, 그 대가로 준다는 돈에 맹 노부인의 마음이 흔들려 사내의 요구에 응하려 했으나, 늘 고분고분히 노부인의 말에 따라오던 첫째 부인은 처음으로 맹 노부인에게 크게 따졌고, 다음날 바로 딸을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첫째는 그들을 찾으러 가겠다며 나가고는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큰조카인 정명마저도 제 처를 데리고 종적을 감췄다.
정수문이 몇 개월 동안 고생해도 첫째 형님 일가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살림을 버티지 못해 부모와 함께 동성으로 이사와 생활을 유지해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져만 갈 뿐이었다.
정수문은 효심이 가득한 아들이었지만, 귓가에 가득 울리는 맹 노부인의 어눌한 욕지거리에 짜증이 치솟기 시작했다.
“진정하세요, 어머니. 어머니의 병은 안정이 가장 필요하지 않습니까. 제가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정수문이 휙 뒤돌아 나가자, 맹 노부인의 욕설이 뒤에서 들려왔다.
“나리, 돌아오셨군요.”
동 이낭이 반쯤 수놓은 이불을 옆에 내려놓고 맞이했다.
정수문은 화가 치밀어 올라 동 이낭을 휙 밀쳤다.
“저리 가시오!”
동 이낭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털썩 쓰러졌고, 자수를 놓던 바늘에 손이 찔려 비명을 질렀다. 피가 흘러나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천을 적셨다.
하지만 동 이낭은 고통을 호소할 새도 없이 놀라 소리쳤다.
“나리, 이건 내일 납품해야 하는 물건이란 말입니다. 피가 묻었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동 이낭이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정수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기에, 동 이낭의 울음소리에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뺨을 두 대 내리쳤다.
“울어라, 울어. 우는 것만 알지. 우리 집안이 이렇게 된 것도 다 네 탓이다!”
“나리―”
동 이낭이 얼굴을 가렸다. 가슴도, 뺨도, 손도 너무나도 아팠다.
‘두 아들만 아니었어도, 차라리 죽어버렸을 텐데!’
“재수 없게 울지만 말고, 어머니나 모시러 가시오!”
동 이낭은 자수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맹 노부인을 보살폈다. 몸에 완전히 밸 정도로 익숙한 일과였기에, 그녀는 조용히 맹 노부인이 있는 방으로 갔다.
맹 노부인은 아들이 휙 떠나버린 것에 화가 나 있는 상태였고, 동 이낭이 들어오자 화풀이할 곳을 찾았다는 듯 곧바로 욕을 퍼부었다.
“또 울고 왔느냐! 내 목이 다 잠겼다. 내 목을 바짝 말려 죽일 셈인 게야?”
동 이낭은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르고, 맹 노부인을 반쯤 앉힌 뒤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
처음 중풍에 걸렸을 때는 말조차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 맹 노부인은 말을 할 수 있게 된 뒤로 잠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맹 노부인은 목을 축이고 다시 누운 뒤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재수 없는 것. 너를 정처로 올린 뒤 집안에 좋은 일이 하나도 없구나! 얼른 널 기방에 팔라고 해야겠다. 그럼 돼지고기라도 몇 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
동 이낭은 물잔을 꽉 쥐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정희와 정양의 어머니인걸요―”
“퉤!”
맹 노부인이 동 이낭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첩 따위가 어머니는 무슨 어머니! 내가 미쳤었지, 시골 출신 계집을 정처로 올리다니!”
동 이낭은 멍하니 맹 노부인의 독설을 듣다가 가슴이 점점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들 눈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래, 이 할망구는 친손녀도 절름발이 늙은이에게 팔아버릴 작자인데, 내가 뭘 기대한 거지? 결국 언젠간 나도 기방에 팔려나가겠지. 그럼, 난 어떡해야 하지? 내 아버지는 수재였어. 내가 대갓집 규수는 아니더라도, 절대 창기가 될 순 없다고! 차라리 죽고 말지!’
맹 노부인은 여전히 욕을 퍼붓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는 동 이낭에게 귓가에 날아다니는 파리 소리처럼 들려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름지고 못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 특유의 인자한 느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얼굴에 가득한 주름과 눈에 서린 독기는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듣지 마, 보지도 마!’
동 이낭은 얼굴을 가리려다가 손가락에 질척한 무언가가 닿아 다시 떼어보았다. 방금 맹 노부인이 얼굴에 뱉은 침이었다.
동 이낭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아무 베개나 들어 맹 노부인의 입을 틀어막고 무섭게 말했다.
“욕해보세요. 더 욕해보시라고요!”
얼마나 지났을까, 동 이낭이 손에 힘을 풀자 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맹 노부인의 동그랗게 뜬 눈이 드러났다.
동 이낭은 손을 뻗어 맹 노부인의 호흡을 확인하더니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시어머니를 죽였다고!’
동 이낭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다가 발이 어딘가에 걸려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자 천천히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해. 이 무서운 감옥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동 이낭은 베개를 침상에 다시 내려놓고 얇은 이불로 맹 노부인을 잘 덮어준 후 급히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가득한 술 냄새에 동 이낭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나리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드시니까.’
동 이낭은 침상 밑에 숨겨두었던 낡은 염낭을 꺼내 탈탈 털었다. 은 조각 몇 개와 동전 수십 개, 그리고 금비녀 하나가 나왔다.
‘이게 내 전 재산이구나.’
동 이낭은 잠시 고민하다가 금비녀와 동전을 제 염낭에 넣고, 낡은 염낭은 큰아들 정희의 방으로 들고 가 문틈 사이로 몰래 집어넣었다.
‘아들들은 여기 남겨두어야겠어. 정희도 다 컸으니, 동생을 잘 돌봐주겠지. 그 할망구도 죽었으니 여기서 지내기 그리 힘들진 않을 거야.’
상황이 정리되자, 동 이낭은 두려움과 불안 대신 통쾌함과 아쉬움만을 느꼈다.
대문이 조용히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아무도 동 이낭이 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술에서 깬 정수문이 외쳤다.
“이봐, 물을 내어오시오.”
몇 번이나 불러도 동 이낭이 나타나지 않자, 정수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그녀를 찾아다녔다.
이때 학당에서 돌아온 정양이 달려 들어왔다.
“아버지, 배고파요.”
“넌 배고프다는 소리밖에 할 줄 모르느냐? 네 형님은 어디 갔고?”
“형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머니도 안 보이고, 조모님도 주무시고 계셔요.”
정수문은 어린 아들을 내버려 두고 안팎으로 동 이낭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자 맹 노부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머리까지 얇은 이불이 덮인 맹 노부인의 모습에 정수문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천천히 이불을 걷었다. 그러자 파랗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뒤에 있던 정양은 깜짝 놀라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조모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정수문은 아무 말 없이 휙 뒤돌아 밖으로 달려나가다가 마당에서 큰아들 정희와 마주쳤다.
정희는 손에 염낭을 쥔 채 멍한 표정이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정수문의 시선이 정희의 손에 있는 염낭에 꽂히자, 정희가 다급히 말했다.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여니까 이게 보였어요. 어머니의 물건 같은데, 왜 제 방에 두셨는지 모르겠네요.”
정수문은 염낭을 휙 가로채 탈탈 털었다. 그러자 은 조각 몇 개가 그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차가운 느낌에 정수문은 문득 모든 걸 깨닫게 되어 이성을 완전히 잃었고, 정희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네 어미는 어디 있느냐? 말하거라! 그 천한 것, 반드시 잡아 죽일 것이다! 반드시 죽일 것이야!”
“아버지,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정희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정양이 달려들어 정수문의 팔을 붙잡았다.
“아버지, 형님을 놓아주세요. 형님을 놓아주세요!”
정수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정희를 빤히 쳐다보며 외쳤다.
“네 어미는 어디 있느냐? 말하지 않으면 너부터 죽이겠다!”
“아버지, 저는 정말 어머니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무슨 상황이 일어난 건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네 조모가 죽었다. 네 어미가 네 조모를 죽였어!”
정수문이 바보도 아니고, 맹 노부인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고 범인은 누가 봐도 갑자기 자취를 감춘 동 이낭이 분명했다.
“형님, 아버지의 말씀이 무슨 뜻이야?”
정양이 겁에 질려 두려워하자, 정희가 동생을 품에 안으며 달랬다.
“괜찮다, 괜찮아. 아버지께서 술에 취하셔서 하시는 말씀이야.”
“이 고얀 놈!”
정수문이 손을 번쩍 들었을 때, 순간 분노가 차올라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틀 뒤, 집안의 물건을 최대한 팔아 돈을 마련한 정희는 마차 두 대를 빌렸다. 한 대에는 굳은 표정의 아버지와 어린 남동생이 탔고, 다른 차는 마차가 아닌 짐수레로, 작은 관을 이끌 용도였다. 정희는 관 옆에 앉았고, 술에 취한 노백야는 마차에 타지 않고 정희와 함께 앉았다.
차 두 대가 교외로 천천히 나아갔다.
정희는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귓가엔 바퀴소리와 조부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다 부질없구나. 다 부질없어…….”
날이 어두워질 무렵, 마차는 마침내 정가촌에 도착했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마차를 막은 사람은 관직에 오른 정구백의 처, 곽 씨였다.
이제 정식 족장이 된 둘째 할아버지가 말렸다.
“이보게, 이리 매정하게 굴어선 안 되네. 베풀어야 복이 오는 법이지 않나.”
곽 씨는 그제야 몸을 비켜주며 콧방귀를 꼈다.
“족장님 덕분에 막지 않는 줄 아세요. 이 재수 없는 집안에 더 이상 관련되고 싶지 않네요.”
곽 씨는 뒤돌아 떠났고, 그녀의 매정한 말에 굳은 표정의 정수문은 순간 목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더니 또 피를 토했다.
정수문 일가는 이렇게 정가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리 마을에서 정방영 대신 소식을 전하러 온 진서택은 수도의 텅 빈 집터를 보고 어리둥절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어디 간 거지?”
때문에, 정방영의 서신은 결국 정수문 일가에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