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새로운 삶
정미는 힘겹게 눈을 뜨고 웃었다.
‘이제 아무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어. 심지어 죽음까지도. 오라버니는 총명하고 대단한 사람이니까, 오라버니가 모두 대비해놓았다면 우리 아조도 무사히 자랄 수 있을 거야. 아조는 발에 붉은 반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분명 복도 많을 거라고.’
정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많은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그리고 얼굴이 흐릿한 어느 부인까지도 스쳐 지나갔다.
그 부인은 계속 정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정철과 정미가 전에 춘시의 압사 사건에서 제 아들을 구해준 것에 대한 인사였다.
부인은 앞으로 매년 사원에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며, 정철과 정미 두 은인이 백발이 될 때까지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길 빌겠다고 했다.
의식이 끊어질 때쯤, 정미는 생각했다.
‘혹시 그 부인이 사원에 기도하러 가는 걸 까먹어서 이렇게 된 걸까? 아니면 그 사원의 향불이 문제였나? 그 사원이 설마 현청관은 아니겠지?’
정미는 마지막으로 정철의 손을 꽉 붙잡았고, 이후 몸에 완전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줄곧 벗겨지지 않던 팔찌가 갑자기 빛났다가 다시 어두워지더니, 소리 없이 손목에서 벗겨졌고 침상을 따라 굴러 청옥 바닥에 떨어져 청량한 소리를 냈다.
문밖을 지키던 환안과 화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문을 밀고 들어왔다가 짙은 피 냄새에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얼른 병풍을 돌아 침상으로 달려갔다. 그 과정에서 환안이 실수로 팔찌를 밟자, 팔찌는 구석으로 굴러 가버렸다.
화미는 휘장을 휙 걷어보았다.
나체 상태인 두 사람이 피범벅이 되어있었고, 휘장 꼭대기에선 향낭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화미와 환안은 눈에 들어온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환안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화미의 입을 틀어막고는 울며 말했다.
“소리 지르면 안 돼. 우선 아가씨와 둘째 공자님께 옷을 입혀드리자!”
그녀는 주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기척을 눈치챈 궁녀들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얼른 정미와 정철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 * *
태자와 태자비가 동시에 암살당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태후와 황상에게 전해졌고, 당직 태의들은 눈이 내린 밤, 동궁 시위들에게 끌려가다시피 달려갔다.
태자는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린 채였고, 태자비는 금비녀로 심장을 찔린 상태였다. 태의들은 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전심전력으로 둘을 살리려 애썼다.
동궁의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고, 태후와 창경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모후, 우선 돌아가서 쉬시지요. 짐이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태후는 순식간에 10년은 늙은 듯한 모습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애가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이때 무겁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문이 열렸고 삐걱대는 소리가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창경제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자는 어떤가?”
가장 앞에 있는 태의가 거의 흐느끼며 대답했다.
“폐하, 태자 전하는 숨이 붙어계십니다.”
창경제는 의자에 털썩 앉아 저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흘렸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그리고 잠시 멍하니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태자비는 어떤가?”
“태자비마마께선―”
태의가 망설이더니 결국 말을 이었다.
“금비녀가 마마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다행히 깊이 찔리진 않았지만, 깨어날 수 있을지 어떨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습니다.”
“알겠다. 다시 태자와 태자비를 살피러 가거라.”
창경제는 손을 내저은 뒤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폐하, 조정에는―”
주홍희가 조심스럽게 얘기하자, 창경제가 눈을 떴다.
“짐의 몸이 좋지 않아, 오늘 조회는 하지 않겠다고 전하거라. 태자의 일은 절대 흘러나가선 안 된다. 입을 함부로 놀린 자는 짐이 구족을 멸할 것이야!”
“예. 소인이 곧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날이 점점 밝고 햇살이 창틈으로 비춰 들어올 때쯤, 정철이 마침내 천천히 눈을 떴다.
정철의 눈에 익숙한 가구가 들어왔고, 휘장만 다른 색으로 바뀌어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르르 정철을 둘러싸며 외쳤다.
“전하, 깨어나셨군요!”
정철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태자비는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중 하나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마마께선 전하를 돌보느라 지치셔서 쉬러 가셨습니다.”
정철이 대답한 사람을 빤히 쳐다보자, 그 사람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사실대로 고하라. 태자비는 어떻게 되었는가?”
정철이 침상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그런데 몸이 예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앓아왔던 고질병이 완전히 나은 것처럼…….
이는 좋은 일이었지만, 정철은 오히려 더욱 불안해졌다.
“전하, 아직 더 쉬셔야 합니다―”
정철은 눈앞의 사람을 휙 밀쳐내고 새하얀 중의(中衣)를 입은 채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방문이 활짝 열리자, 겨울날의 햇살이 비춰왔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햇살이었지만, 정철에겐 뼈가 시릴 만큼 차갑게 느껴질 뿐이었다.
“경아, 어찌 밖으로 나온 것이냐?”
기척을 들은 창경제가 응접실에서 걸어 나왔다.
“부황, 태자비를 보러 가려 합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창경제는 처음으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훌륭한 제 아들도, 평범한 사람처럼 눈에 유약함과 위태로움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눈빛에 창경제는 모든 의문을 뒤로 넘겨둘 수밖에 없었고 내시에게 명했다.
“태자를 안내하거라.”
정미를 안치한 방은 사실 바로 옆에 있었다. 정철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태의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고 태자가 눈에 들어오자 어리둥절해 했다.
정철은 순간 앞으로 다가가기가 겁이 났다.
“태자비―”
겨우 뱉은 한 마디에, 가슴에 거대한 바위가 내려앉은 듯 숨이 막혀왔다.
태의들은 그 모습에 아무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정철은 눈을 질끈 감더니,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가 마침내 정미의 침상 앞에 도착했다.
정미는 새하얀 옷을 입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은 백지장보다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태자비는 어찌 된 것이냐?”
정철이 떨리는 손으로 정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말하라! 태자비는 어찌 된 것이냐!”
늘 온화하던 태자가 갑자기 엄하게 소리를 지르자, 태의들은 깜짝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태자비마마께선…… 심부가 금비녀에 찔려…….”
정철의 몸이 비틀거렸고, 침상 난간을 붙잡은 채 숨을 깊게 들이켰다.
“가망은 있느냐?”
“사…… 사흘 안에 깨어나실 수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정철은 뒤돌아 떨리는 어깨를 애써 진정시켜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태의들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물러났다.
태자비가 깨어날 수 있는지는 완전히 하늘의 뜻에 달렸기에, 태의들은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 *
이틀 뒤.
태후는 근심으로 인해 입가에 물집이 가득 올라온 채였다.
“태자는 여전합니까?”
창경제가 힘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태자비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미련한 녀석, 정말 미련한 녀석이야. 만약 태자비가 떠나면, 저도 함께 갈 셈인 건지!”
창경제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정철의 행동에 화가 났지만, 하마터면 제 아들을 다시 잃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자 질책할 마음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가서 아조를 태자에게 안겨주거라.”
태후가 명을 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정철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계속 정미만을 쳐다봤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아주 작은 두 손이 정철의 등을 토닥였다.
정철이 고개를 돌리자, 아조가 유모의 품에 안겨 정철에게 환히 웃고 있었다.
태후도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유모의 품에서 아조를 건네받고는 정철의 품에 안겨주었다.
“안고 있거라. 네 아들이지 않더냐. 나쁜 생각 말고, 네 자식을 생각해야지.”
정철은 아조를 꽉 안았다. 아무 걱정 없이 웃는 아들을 보자 눈가가 점점 촉촉해졌다.
“예, 알겠습니다.”
정철은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고는 찻주전자를 들고 바로 입에 대고 마셨다.
태후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 왔지만, 정철을 말리지 않았다.
‘그래, 뭐라도 먹어야지. 차라리 그게 낫지.’
아조는 아버지가 우습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는 손뼉을 치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에 정철은 가슴이 찔린 듯 아파 왔고 아조를 안아 정미 앞으로 다가갔다.
아조는 웃음을 거두고 정미를 잠시 살펴보더니, 갑자기 입을 삐쭉이고 크게 울어댔다.
“엄마, 엄마―”
아조는 정미의 품에 안기려는 듯 두 팔을 벌리며, 왜 어머니가 저를 아는 척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억울하게 울어댔다.
그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마음이 쓰라려 왔고, 환안과 화미는 참지 못하고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정미의 속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 * *
한 달 후.
혈색을 많이 회복한 정미는 침상 머리맡의 병풍에 기대어 함께 놀고 있는 정철과 아들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나와 오라버니가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었다니. 앞으로 보통 사람의 절반 정도밖에 살지 못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천운이지.’
“오라버니, 내가 기절한 이틀 동안 어떤 꿈을 꾸었어.”
“무슨 꿈?”
“우리 선조인 정교를 만났어. 그리고 혈주에 걸린 사람이 스스로 피를 바꾸는 부법을 멈추길 원하고, 부법을 시행한 사람의 심혈이 독이 담긴 피와 뒤섞이면 혈주가 풀리는 거라고.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라면서, 부군과 아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해주었어.”
정철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겠네.”
“응. 정교의 말을 듣고 나니까, 아조의 울음소리가 들렸거든. 그래서 눈을 떴고.”
정철이 정미를 껴안더니, 다시 아조를 품에 안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 아들은 대단하다니까.”
아조는 정미가 가까이 있자, 정철을 밀어내고 정미의 품으로 달려들어 가슴을 정확하게 붙잡았다.
“이 녀석, 얼른 놓지 못할까!”
정철이 어두운 표정으로 꾸짖었고, 정미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나의 악몽이 끝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그렇게 인생이 뒤바뀐 건, 당연히 정미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교난』 본편 완결
지금까지 <교난>을 애독해 주신 독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후 공개되는 외전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