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혈주를 풀다
날이 어두워지자, 바깥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깃털 같은 눈발이 바닥에 소복이 떨어지며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올해는 눈이 일찍 내리네. 많이 내리기도 하고.”
정철은 정미를 안은 채, 창가에서 눈을 구경하며 잡담을 나누었다.
정미는 눈을 좋아했다. 그리고 이 눈을 보자, 갑자기 육출화재가 떠올랐다.
“오라버니, 한수 선생은 아주 대단한 사람 같아. 혹시 한수 선생이 육출화재의 주인이 아닐까?”
육출화재는 벌써 전국 각지에 분점을 열어 대량의 가장 유명한 서재가 되었다. 그러나 육출화재의 주인과 한수 선생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바였다.
정철이 작게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왜냐면, ‘육출화(*六出花: 눈송이. 눈송이가 여섯 모의 결정을 이루는 데서 유래함)’와 ‘한수(寒酥)’ 모두 눈꽃을 뜻하는 이름이잖아. 한수 선생은 왠지 육출 화재에 앉아서 고급 차 한잔을 책상 위에 두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천천히 써내릴 것만 같아.”
“그럼 내일 같이 육출화재에 가서 한수 선생을 만나볼까?”
“만날 수 있어?”
정철이 정미의 멍한 표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지. 이제 나는 황태자고, 넌 태자비라고. 누가 감히 만나지 않으려 할 수 있겠어?”
정미가 정철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장난치지 말고!”
정철이 정미를 옆으로 안아 들자, 정미가 그의 옷섶을 꽉 붙잡고 소리쳤다.
“아직 시간도 이른데 뭐 하는 거야?”
“뭘 할 것 같은데?”
정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더 이상 토 달지 않았다.
3년 동안 둘은 늘 처음처럼 사이가 뜨거웠다. 게다가 정미는 제가 사랑하는 이 사내와 몸과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는 느낌을 아주 좋아했다.
어느새 휘장이 내려왔고, 정철이 정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미미, 아조한테 동생이 필요할 것 같아. 혼자 지내면 너무 외롭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해봐야겠는걸.”
정미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들어 앵두 같은 입술을 정철에게 맞추었다.
휘장의 불규칙한 흔들림이 멈추었고, 깨끗이 씻은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미가 조용히 눈을 떴다.
정미는 휘장 꼭대기에 달린 향낭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철이 깊은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는 살금살금 일어나 머릿속으로 몇천 번이고 연습했던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정철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깨어났다.
이불을 덮지 않은 듯 온몸이 차가웠지만, 피부 아래에선 따뜻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차가운 기운과 따뜻한 기운이 서로 뒤얽히는 이상한 기분에 정철은 눈을 뜬 뒤에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이내 정미의 행동을 눈치채고 정신을 퍼뜩 차리게 되었다.
정철과 정미는 완전히 나체인 상태로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부법을 진행 중인 정미는 미세한 변화도 아주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기에, 눈을 번쩍 떴다.
“미미, 이게 도대체―”
정철은 당황하다가 안색을 급격히 굳혔다.
그 미묘한 열기는 맞잡은 손을 통해 정철의 몸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고, 열 손가락이 맞닿은 곳에선 은은한 붉은 빛이 빛났다.
정철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려고 하자, 정미가 단호히 막았다.
“움직이지 마.”
정철은 조용히 정미를 쳐다보며 설명을 기다렸다.
한결같이 부드러운 정철의 눈빛엔 복잡하고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 감정은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버렸다.
모든 걸 깨달은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과 마주치자, 정미는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라버니 혈주를 풀어주려고 하는 거야. 자칫하면 실패해서 우리 둘 다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나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지?”
정철의 목소리에선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절망 끝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아 보이는 그 모습에, 정미는 마음이 괴로워져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정철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 차마 피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 아조를 생각해. 아조는 태자의 적장자야. 어머니는 없어도 되지만, 아버지는 반드시 있어야 해.”
정철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미미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하지만, 아조는 아버지 없이도 네가 잘 돌볼 수 있을 거야.”
“아냐, 달라.”
정미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철이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미미, 한수 선생을 만나보고 싶다며? 아직 만나지 못했잖아. 왜 하필 오늘 밤이야?”
“괜찮아. 이게 더 중요해.”
점점 피를 잃어가는 정미는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해 정철의 모습이 점점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만은 더욱 또렷이 들려왔다.
“바보야, 내가 바로 한수 선생이야. 네가 늘 만나고 싶어 하던 그 사람.”
정미가 눈을 살짝 크게 뜨자, 정철의 모습이 조금 선명해 보였다.
“거짓말하는 거지?”
정철이 부드럽게 웃었다.
“오라버니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 정미는 아리땁고 긴 눈을 천천히 감았다.
“어쩐지, 한수 선생이 쓴 책들은 다 내 마음에 쏙 들더라니.”
이때, 정미의 손바닥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열기가 다시 몸으로 세차게 밀려 들어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던 정미는, 눈을 번쩍 뜨고 아연실색하며 외쳤다.
“오라버니?”
정철은 짧은 복숭아나무 지팡이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지팡이 머리엔 화사하게 핀 복사꽃이 조각된 채였다. 그리고 피를 바꾸는 부법을 멈춘 투명한 액체가 그 꽃잎에서 뚝뚝 떨어졌다.
정철이 고개를 숙여 지팡이를 내려놓고 침착하게 맞잡은 두 손을 내려놓자, 입가에 곧바로 피가 흘러내렸다.
“오라버니―”
정미는 깜짝 놀랐다. 피가 다시 돌아와 생기를 회복했지만, 온몸에 힘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정미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정철을 바라봤다.
‘오라버니는 부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텐데, 어떻게 부법을 중단할 방법을 알고 있었지? 나조차도 저 복숭아 지팡이에 묻은 액체가 뭔지 모르는걸. 내 몸을 해치지 않는 동시에, 부법을 멈추기까지 할 수 있다니.’
정철이 정미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국사의 사부님이, 정교라는 사람을 알고 있대.”
‘정교?’
정미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한참 뒤에야 그 사람이 아혜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혜는 백여 년 전의 사람이고, 내 사부님인 청령진인은 백 살이 넘었으니, 아혜와 청령진인의 사부는 같은 시대 사람일 테고, 둘 다 뛰어난 부술 인재였으니 서로 아는 사이였겠지.’
정미가 힘겹게 정철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정철이 힘없이 손을 들며 말했다.
“미미, 무슨 일인지 다 알려줄 테니 걱정 마.”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국사께서 나와 남안왕에게 병이 있는 게 아니라, 혈맥에 전해지는 저주였다는 걸 알아채신 뒤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셨어. 현청관의 비전까지 뒤져보셨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지. 그래서 전임 국사께서 남긴 비밀 기록을 열어보셨어.”
정철이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전임 국사의 기록은, 관례대로라면 현임 국사의 목숨이 다다랐을 때 열어볼 수 있지만.”
“그럼 사부님께서 규칙을 어기신 거야?”
정미가 중얼거렸다.
정철은 묵인했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국사께선 내게 기록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려주진 않으셨어. 그저 전임 국사께서 태자를 치료한 뒤 수상쩍은 부분을 발견하셨다고 하셨지. 태자의 병은 다 나았지만, 혈주에 걸려 자손들에게 퍼지게 된 사실 말이야. 전임 국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저주를 건 사람은 당시 유명한 부의였던 정양의 딸, 정교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어. 그래서 전임 국사께서 어떤 처분을 내리셨지.”
정미는 가만히 듣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떤 처분?”
정철이 정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전임 국사는 스스로의 수명을 대가로 대량의 백 년을 내다보셨고, 어떤 결론을 내리셨지. 용씨는 백 년 뒤 황권이 다른 자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게 되고, 유일한 희망은 정가의 적녀에게 있다는 결론이었어. 그래서 그간 정씨 가문의 적녀는 태자비가 될 수 있었고.”
“유일한 희망?”
정미는 점점 깨닫게 되었다.
‘내가 바로 그 유일한 희망이구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혜를 만난 나인 거지. 내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제멋대로인 소녀였다면, 화 귀비의 아들이 황위를 계승 받았을 테고, 그렇게 황권이 다른 자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을 거야.’
정미는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부법을 멈추는 법은 오라버니가 사부님께 여쭤본 거야?”
정철이 입가를 닦으며 아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맞아. 왜냐면 우리 바보 아가씨가 분명 바보 같은 짓을 할 거라고 확신했거든. 내 목숨만은 미미에게 의지할 수 없어.”
정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그 입가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눈, 코, 그리고 귀에까지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미는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을 느꼈다.
“오라버니―”
정미는 정철을 꽉 껴안고 허둥지둥 피를 닦아주다가 결국 절망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죽지 마. 오라버니가 죽으면 나는 어떡해? 난 오라버니만큼 강하지 않단 말이야…….”
정철은 이제 눈도 뜰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지만, 가까스로 손을 들어 눈물범벅이 된 정미의 얼굴을 만졌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정철에게 아주 익숙하고,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미미, 내가 떠나면 팔근을 찾아가. 팔근이 육출화재의 모든 장부를 네게 줄 거야. 누군가 아조를 해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내가 다 대비해두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도 없는 인생이었지만, 정철이 유일하게 저지른 나쁜 일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평왕이든, 오황자든, 육황자든…… 내 아내와 아들을 해치려는 자는 그 누구든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죄를 저지르더라도, 남은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떠안고 편안히 눈감으리라.’
“오라버니, 그런 말 하지 마. 오라버니가 살아야 해!”
정미는 더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손에 가득 묻은 피와 눈물은 모두 정철의 것이었다.
“바보야, 청겸이라 부르라니까…….”
정철은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정미의 품에 기대 숨을 거두었다.
“청겸, 청겸?”
정미는 정철을 흔들어보다가 몸에서 혼이 나간 듯 넋을 놓고 말았다.
“태자비마마―”
방 안의 기척을 느낀 화미가 입구에서 외쳤다.
“나가, 아무도 들어와선 안 된다!”
화미의 목소리에 정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문밖은 다시 조용해졌다.
정미는 손수건으로 정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는, 차가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피 묻은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소리쳤다.
“아혜, 아혜! 나와!”
팔찌에서 아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계속 여기 있었어.」
“이제 만족해?”
정미는 울고 웃기를 반복하더니, 머리에서 비녀를 뽑아 심장을 향해 힘껏 내리꽂았다.
“필요하면 다 가져가. 복수하든 뭘 하든, 다 네 맘대로 해. 우리 아조만 잘 돌봐주면 되니까―”
「멈춰!」
아혜는 바깥이 보이지 않았지만, 정미가 죽으려 한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팔찌 안에 있는 유혼 따위가 이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뾰족한 비녀는 피부 깊숙이 찔렸고, 정미는 비명을 지른 뒤 정철 옆에 쓰러졌다. 두 사람의 피가 점점 뒤섞여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