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63화 (362/375)

363화. 준비

창경제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말했다.

“큼큼. 짐의 생각엔, 태자비가 궁에 들어온 지 일 년 만에 황손을 낳았으니, 가장 고생이 큰 것이 분명하다. 태자비의 의중은 물어보지 않았느냐? 황손의 아명을 미리 생각해두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더냐.”

창경제가 태자비에게 일을 미루자, 태후가 곧바로 맞장구쳤다.

“황상의 말씀이 맞지요. 태자비가 애가보다 더 좋은 이름을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창경제는 반짝이는 눈으로 정철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태자비가 황손의 아명을 생각해두었든 아니든, 멀쩡한 이름을 반드시 내놓아야 한다, 아들아!’

“태자비가 생각해둔 이름은 있습니다. 다만, 두 분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말해 보거라!”

창경제가 조급해하며 말했다.

정철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조(*阿棗: 대추棗)가 좋을 것 같다 하더군요.”

“아조(*阿早: 아침早)말이냐?”

태후가 중얼거리며 되뇌더니 웃으며 말했다.

“입에 잘 붙는구나. 아이가 일찍 찾아와서 이런 이름을 떠올린 게냐?”

정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양수가 터졌을 때, 대추떡을 먹고 있었거든요…….”

태후는 말문이 막혔고, 창경제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아조가 좋겠구나. 그래. 분명 대추떡 덕분에 황손을 순산할 수 있었던 것일 테지. 모후, 어떻습니까?”

태후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흠, 어쩔 수 없지. 내가 지어둔 이름보단 별로지만, 그래도 쓸만하군.’

태후의 마음속 정미는 꽤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태후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조로 하자꾸나.”

태후가 떠난 뒤, 창경제는 소매로 식은땀을 닦더니 정철과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 황손의 아명이 하마터면 개나 오소리, 전갈이 될 뻔했구나!’

정미는 태후와 황상이 제가 지어둔 아명을 채택했다는 걸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정말 아조라 정하신 거야?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아채, 환랑, 계구.”

정철이 이름 세 개를 말했다.

정미가 당혹스러운 듯 눈을 끔벅였다.

“그게 무슨 뜻이야?”

정철은 등골이 오싹하다는 듯 말했다.

“미미 네가 지어둔 이름이 없었으면, 우리 아들의 아명은 이 셋 중 하나로 정해졌을 거야.”

“누가 지은 이름인데?”

“태후께서!”

정미는 동정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깊게 잠든 아들을 쳐다보다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역시 황가에서 지내는 건 고난의 연속이구나!’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순식간에 1년이 지났다.

화서는 마지막 배원부를 마신 뒤 지병을 완치했다.

정미는 마침내 마음의 짐을 하나 덜어낼 수 있었지만, 다른 짐은 여전히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 잡은 채였다.

‘이렇게 오래 버텼으니, 오라버니의 몸도 이제 한계치에 다다랐겠지.’

1년 동안 정미는 정철이 몰래 각혈하고는 사람들 앞에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내는 걸 조용히 지켜봐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파 왔지만, 혈주를 푸는 방법은 여전히 찾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마지막 방법밖에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최근 정미는 계속 그 방법을 떠올리다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아혜―”

정미가 팔찌를 살살 어루만졌다.

「또 무슨 일이야?」

한참 후, 아혜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그러니까 만약에 말이야, 네가 나와 함께할 수 없으면 어떻게 돼?”

정미의 진지한 말투에 아혜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그게 무슨 뜻이야?」

정미가 침묵하자, 아혜가 추문했다.

「무슨 일 있는 거지?」

그리고 멈칫하더니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알겠다. 네 오라버니가 한계치에 다다랐구나?」

아혜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럼, 드디어 내게 몸을 주기로 마음먹은 거야?」

정미가 단호히 부정했다.

“아니. 내가 말했잖아. 이 몸뚱이는 썩어 문드러져 흙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절대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을 거라고.”

아혜가 화를 냈다.

「정말 도움이 안 되네!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고 해도 이 팔찌는 뺄 수 없는 거야?”

정미가 차분하게 묻자, 아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미, 네 오라버니와 함께 죽을 셈이야?」

정미가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아니. 아혜, 넌 아직 모르지? 사실 오라버니랑 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생겼거든. 아조라고 하는데, 엄청 귀여워. 벌써 옹알이를 하기 시작했으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나를 엄마라 부르는 것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아조가 아버지도 잃고, 어머니도 잃게 할 순 없지. 만약 오라버니와 나 둘 중 하나만 아조와 함께할 수 있다면, 황궁 안에선 당연히 태자의 지위를 가진 아버지가, 어머니인 나보다 더 중요하겠지. 내게 가장 소중한 두 남자는, 반드시 무탈하게 살아가야 해.’

「그런 게 아니라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과부가 될 준비나 하라고.」

아혜가 차갑게 말하자, 정미가 피식 웃었다.

“아혜, 까먹었구나. 한 가지 방법이 있잖아.”

아혜는 침묵하며 정미의 말을 기다렸다.

“오라버니의 혈주는 처음부터 풀 방법이 있었어. 네가 네 과거를 알려줄 때 말해줬잖아.”

「그 방법이라면―」

“피를 바꾸는 거. 내 모든 피를 오라버니에게 주어서 혈주를 풀 거야!”

「너 미쳤구나? 완전히 미쳤어! 그럼 분명 죽을 거라고!」

아혜가 노발대발했으나, 정미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러니까 묻는 거야. 내가 죽으면 넌 어떻게 되는데? 팔찌 안에서 갇힌 채 나와 묻히는 거야,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까지 내 배려를 해준다고?」

아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고, 정미는 한참 침묵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혜, 사실 나는 네게 감사하고 있어. 네가 어떤 목적으로 나를 선택했든 간에, 내 인생은 결국 네 덕분에 바뀌었으니까.”

‘아혜가 없었다면, 내 인생은 이모처럼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겠지.’

「하하, 그래도 양심은 있네. 그럼 차라리 몸을 주지, 왜 그런 방법을 쓰려는 건데?」

아혜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다른 건 다 돼도, 그건 절대 안 돼. 네가 내 몸을 차지하면 내 오라버니의 아내 노릇도 하고, 내 아들의 어머니 노릇도 할 거 아냐?”

누군가 제 삶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떠올리면, 정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라버니는 몸이 바뀌어도 뭔가 눈치챌 수도 있지만, 아조는, 내가 열 달 동안 품어 낳은 내 아들은, 영원히 내 존재를 알지 못하겠지. 그래, 결국 나는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야. 절대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네가 죽을 때 팔찌를 어루만져. 그럼 네 손에서 팔찌가 빠질 거야.」

아혜의 목소리가 다시 나른해지더니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 그 이후에도 계속 팔찌에 있는 거야?”

아혜는 정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정미는 한숨을 쉬었다.

이때, 문밖을 지키던 환안과 화미가 들어왔다.

“태자비마마.”

두 사람이 나란히 절을 올렸다.

정미는 두 사람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지만, 환안과 화미는 정미의 침묵에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환안, 화미. 너희 둘 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조금이라도 어릴 때 너희에게 사내를 붙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마마, 소인은 계속 마마를 모시고 싶습니다!”

정미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궁녀들도 나이가 차면 밖으로 나가기 마련이야. 궁에서 늙어 죽는 궁녀는 없어. 나를 평생 모신다 해도, 황궁에서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거야. 그리고 너희가 시집을 가도 황궁으로 날 보러 올 수 있잖아.”

환안은 곧 스무 살이었고, 화미는 갓 스물이 넘은 나이였기에, 혼인을 미루어선 안 되는 나이긴 했다. 정미는 그간 자신을 성심성의껏 모셔온 시종들에게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마땅한 거처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정미의 의사는 아주 확고했고, 두 사람이 마음에 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정철에게 좋은 사내를 물색해달라 부탁했다.

정철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환안과 화미의 나이가 있으니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혼사가 정해졌다. 한 명은 태의서의 정8품 태의와, 다른 한 명은 국자감 종8품의 조교와 약혼하게 되었다.

두 사내 모두 그리 높은 관직은 아니었지만,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였고 정철이 고른 사람이니 성품도 믿을 수 있었기에, 정미는 그제야 안심했다.

동지 연회 이후 친가에 방문한 뒤, 정미는 느지막이 궁에 돌아왔다. 종일 단 노부인 등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속으로 조용히 작별 인사를 한 셈이었다.

* * *

보름날, 정미는 아조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평소처럼 아들을 놀아주는 듯했지만 조금 조급해 보이는 면도 있었다.

“아조, 엄마라 불러보렴.”

아조는 또래 아기들보다 키가 더 커 씩씩하고 늠름한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저를 놀아주자, 아조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품에 꼭 안겨서는 활짝 웃었다.

정미는 아들의 통통한 얼굴을 쥐며 말했다.

“이 바보야, 엄마라 부르라니까.”

아조는 고개를 들고 정미를 보며 깔깔 웃다가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조는 정미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더니 옷 너머로 정확하게 어머니의 젖꼭지를 깨물었다.

정미의 몸이 굳었고, 이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조, 놔!”

아조는 눈을 크게 뜨고 정미를 살펴보았고, 입을 떼기는커녕 두 손을 내밀어 정미의 가슴을 안고는 만족스러운 듯 헤헤 웃었다.

“이 돼지야!”

정미는 아조의 통통한 엉덩이를 살짝 쳤고, 아기의 순진한 눈망울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시큰해져 눈물을 흘렸다.

‘우리 아조가 날 기억해줄까?’

“왜 울어?”

정철이 어느새 걸어와 뒤에서 정미를 안았다.

정미는 급히 감정을 추스르고 정철에게 웃어 보였다.

“당신 아들이 나를 괴롭혀서.”

정철이 고개를 숙여보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아조를 정미의 품에서 떼어냈다.

아조는 정미의 옷섶을 꽉 잡고 놓지 않았고 다급하게 옹알대며 소리를 쳤다.

아버지가 저를 마침내 떼어내자, 아조는 입을 삐쭉이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정미를 보며 외쳤다.

“엄마―”

그러나 정미는 휙 뒤돌아버렸고, 눈물을 비처럼 흘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정철이 아조를 유모에게 건넨 뒤 정미를 안고 물었다.

정미는 정철의 품에 기대어 생각했다.

‘이런 든든함과 따스함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아.’

눈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자, 정미가 말했다.

“오라버니의 몸이 걱정돼서.”

‘오라버니는 너무 똑똑하고 눈치가 빨라. 그러니까 절대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해.’

정철이 침묵하더니, 품 안에 있는 정미를 더 세게 안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작게 말했다.

“혼인한 지 벌써 3년이 되었어. 아조도 생겼지. 이것만으로도 천운이야. 미미, 걱정 마. 아조가 너와 함께할 거니까. 그리고 우린 결국 다시 만날 거야. 장소만 달라질 뿐이지.”

정미가 눈을 들어 정철을 쳐다봤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였지만, 익숙하고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오라버니는 아주 강하구나. 사부님이 그때 오라버니의 몸은 짧으면 1년밖에 버티지 못할 거고, 길어봤자 3년이라 하셨어. 하지만 지금 이미 3년하고도 조금 더 넘었지. 우리 아조도 엄마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오라버니에겐 절대 알려주지 않을 거지만, 사실 아조를 낳는 건 혼례 후 내가 가장 바라던 일이었어. 우리의 아이가 생겨야만, 오라버니를 이 세상에 남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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