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출산
화창한 날이었다. 정미는 커다래진 배를 받치고 따뜻한 방에서 나와 정원에서 천천히 산책했다. 예전보다 더 통통해진 반어도 정미 옆에서 뛰고 구르며 놀았다.
“마마, 조심하세요.”
화미가 조심스럽게 정미를 부축하며 쌓인 눈을 돌아갔다.
“바람만 쐬고 돌아갈게.”
정미가 매화나무 아래의 바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어떤 궁녀가 곧바로 방석을 깔았고, 화미는 정미를 부축하여 바위 위에 앉혔다. 환안은 가져온 찬합을 열어 따뜻한 대추떡을 꺼냈다.
“마마, 조금 드시겠어요?”
정미는 손을 닦은 뒤 대추떡을 건네받고 한입 베어 물더니,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작게 조각을 떼어 고개를 숙이더니, 발치에서 이리저리 뛰노는 반어에게 주었다.
반어는 고개를 숙이고 킁킁거리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정미를 흘끗 쳐다보고는 엉덩이를 흔들며 떠나갔다.
“갈수록 까다로워진단 말이지.”
정미가 웃으며 대추떡을 한 입 더 베어 먹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아래에서 축축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아프진 않았지만, 정미는 이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정미의 안색이 이상해지자, 환안이 당황하며 물었다.
“마마, 오늘 만든 대추떡은 입에 맞지 않으세요?”
“따뜻한 물을 좀 드릴까요?”
화미가 이어서 묻자, 정미는 손에 든 대추떡을 다 먹고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니. 곧 아이가 나올 것 같으니 어서 나를 부축해서 방으로 데리고 가줘. 산파와 의녀들을 부르고.”
두 사람은 완전히 멍해졌다.
‘아이가, 아이가 나온다니…… 아이가 나올 거라고!?’
‘그런데 이 와중에 남은 대추떡을 다 드셨단 말이야?’
정미는 두 사람의 멍한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배를 받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환안에게 말했다.
“찬합도 잘 챙기고. 조금 이따 더 먹을 거야.”
* * *
산파와 의녀들이 급히 동궁으로 왔을 때, 이미 출산이 시작되었다고 들었던 바와 달리, 태자비는 여전히 여유롭게 대추떡을 먹고 있었다.
“왔구나. 그럼 산방(産房)으로 데리고 가주렴.”
정미가 반쯤 먹은 대추떡을 내려놓고 입을 닦은 뒤 손을 씻었다.
가장 앞에 있는 산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 정말 시작되신 게 맞습니까?”
정미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양수가 터졌다.”
“어, 어서 마마를 산방으로 모셔다드려라.”
잠시 후, 정미는 분만대 위에 눕혀졌다.
복통이 밀려오자, 정미는 늘 들고 다니던 도자기 병을 열어 조산부의 부수를 마셨고, 그제야 황궁의 주인들에게 알리는 걸 잊었음을 떠올렸다.
“너, 나가서 화미에게 어서 주인들께 이 사실을 알리고 오라고 전하거라.”
정미가 어떤 의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일이 처음인 화미와 환안은 꿈을 꾸고 있는 듯 멍한 상태였고, 의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화미는 환안에게 태자비를 잘 지키라 신신당부한 뒤, 곧바로 사람들을 보내 소식을 알렸다.
“뭐라, 태자비가 출산을 시작했다고?”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선 여전히 미친 척을 하고 있던 풍 황후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소식을 전하러 온 궁녀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미 산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얼마나 되었느냐?”
“반 시진 정도 되었습니다.”
태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이르구나. 황상과 태자에겐 알렸느냐?”
대부분의 산모들의 경우 아이가 나오기까지 짧으면 몇 시진, 길면 이틀까지도 걸렸다.
“예. 모두 알렸습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교 유모에게 분부했다.
“동궁으로 가 있거라. 무슨 소식이 있으면 빠르게 알리러 오고.”
태후는 태자비가 출산할 때 직접 찾아갈 만한 신분은 아니었지만, 유일하게 손자의 아이를 낳아줄 수 있는 사람이 정미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역시 침착할 수가 없었다.
교 유모가 나가자마자 태후가 황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진진, 들었느냐. 태자비가 아이를 낳는다는구나.”
황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태후의 손을 꽉 붙잡았다.
황궁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두 여인이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린 지 겨우 일주향(*약 15분)이 지났을 때, 교 유모가 다시 돌아왔다. 태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자녕궁에서 동궁까지 가는 길만 해도 일주향이 걸릴 텐데, 어찌 벌써 돌아왔느냐?”
‘이 속도라면, 동궁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텐데?’
늘 침착하던 교 유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감축드립니다, 태후마마, 황후마마. 태자비마마께서 황손을 순산하셨습니다. 황손의 몸무게는 7근 반 량(*약 4.5kg)이라 하옵니다!”
태후는 놀라 숨이 턱 막힐 지경이어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낳았다니? 애가와 농을 치는 건 아니겠지?”
교 유모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소인이 어찌 이런 농을 치겠습니까. 태자비마마께서 정말 황손을 순산하셨습니다. 소인도 동궁으로 가는 길에, 자녕궁에 소식을 전하러 오던 궁인과 마주친 것입니다.”
태후는 그제야 동궁의 궁인 차림을 하고 옆에 서 있는 궁녀가 보였다.
태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궁녀를 노려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이냐?”
아주 큰 경사였기에, 태후의 위엄 앞에서도 궁녀는 두려워하지 않고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사실입니다. 소인이 산파들이 황손을 안고 나오는 걸 직접 보았습니다. 소인이 명을 받들고 자녕궁으로 향할 때, 여관들이 기록하고 있었사옵니다.”
태후는 그제야 안심하며 기쁨이 물밀어 올라 몇 번이고 되뇌며 말했다.
“참으로 잘 되었구나. 참으로 다행이야. 태자비는 역시 대단하구나. 애가가 며느리를 참 잘 골랐어.”
* * *
건청전 안, 창경제는 어서재 안에서 중신들과 논의 중이었다. 성년이 된 태자, 정철도 당연히 옆에서 이를 듣고 있었다.
동궁의 소식을 전하러 온 내시가 입구에서 붙잡혔다.
“멈추시오. 황상께서 회의를 하고 계실 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소.”
“허나―”
내시가 발을 동동 굴리며 어서재를 쳐다봤다.
어서재 입구를 지키던 주홍희가 이를 보고 다가와 물었다.
“동궁의 사람인가? 여긴 어쩐 일이지?”
황상을 모시는 대태감이 나타나자, 내시가 급히 말했다.
“주 공공, 소인은 태자비마마께서 출산하기 시작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주홍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즉시 어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폐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들라.”
창경제는 급히 들어오는 주홍희를 보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때에 올리는 보고는 늘 다급한 일이거나,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홍희가 창경제 옆으로 걸어가 그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폐하, 태자비마마께서 출산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정철을 쳐다봤다.
정철은 청력이 아주 좋았기에, 창경제가 멍하니 있는 사이 벌써 벌떡 일어나 급히 인사하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문틀에서 느껴지는 진동으로 태자가 황급히 문밖을 나갈 때 문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중신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모두 물러나거라. 내일 다시 논의하지.”
창경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고, 중신들이 물러나자 얼른 주홍희를 동궁으로 보냈다.
단숨에 동궁까지 달려온 정철은 제 품에 안긴 아기를 멍하니 보았다. 그는 어디 혈자리라도 찔린 듯, 한참 동안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정철은 쪼글쪼글한 갓난아기를 보다가, 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아내를 보며 바보처럼 물었다.
“미미, 네가 낳은 거야?”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는데, 어느 틈에 낳았지?’
“오라버니, 이마에 왜 멍이 들었어?”
조산부의 도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출산은 역시 아주 힘든 일이었기에 정미는 힘겹게 눈을 뜨고 정철에게 물었다.
“멍들었어?”
정철이 멍한 표정으로 이마를 어루만졌다.
이때, 정철의 품 안에 있던 아기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정철은 순간 표정이 굳더니 허둥지둥 아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태자 전하, 황손께서 소변을 보신 것 같습니다.”
미리 준비해둔 유모가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정철은 옷섶을 만져보았고, 그제야 옷이 젖은 게 느껴졌다.
아기는 유모가 데려갔고, 방 안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미미.”
정철이 정미를 불렀을 때, 정미는 두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정철은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뻗어 정미를 살짝 밀어봤다.
그러자 잠에서 깬 정미가 힘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바보야, 잠깐 잠든 거라고.”
정철은 무안한 듯 코를 매만지다 이상한 냄새가 어렴풋이 느껴지자, 방금 젖은 옷섶을 만졌다는 게 문득 떠올라 급히 손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너무 쪼글쪼글해서 말이야. 원숭이처럼…….”
정미는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렸다.
‘이거 참, 아들을 낳았더니 부군이 바보가 되어버렸네.’
정철의 새파란 이마가 눈에 들어오자, 정미가 말했다.
“오라버니, 문틀에 머리를 부딪쳤구나?”
“흐흐흐.”
정철이 바보처럼 웃었다.
* * *
태자비가 황손을 순산했다는 소식은 날개 돋친 듯 수도 각지에 퍼져나갔다.
어떤 집안은 아주 기뻐했고 어떤 집안은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평왕부 안, 평왕의 기분은 몹시 복잡했다.
태자는 황제의 총애를 한껏 받고 있었고 적자까지 생겼으니, 지위가 더욱 굳건해졌을 터였다.
‘그럼 이제 내 절름발이 행세도 더 이상 꾸며내지 않아도 되겠군. 어쨌든 이것도 태자비가 치료해준 것이니, 이 틈에 그쪽 줄에 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황손의 세삼일(*洗三日: 아이가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에 치르는 목욕 의식)날, 황손의 백부(伯父)인 평왕도 의례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20여 년간 절름발이였던 평왕의 다리가 다 나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평왕은 그동안 계속 회복하기 위해 다리를 단련해왔는데, 마침 황손의 기쁜 기운까지 얻으니 완전히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기분 좋은 말에 평소 큰아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창경제도 웃음을 지었고, 태후조차도 평왕에게 평소보다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평왕은 기분이 꽤 씁쓸했다.
‘태자가 아니라, 내가 20년 전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아들 같구나. 이리도 편애하시다니! 하지만―’
평왕은 의기양양한 모습의 정철을 한 번 훑어보고는 생각했다.
‘최소한 이 태자는 예전에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보다 훨씬 낫군. 일단 외모부터 꽤 황가의 체면이 서니까 말이야. 내가 참지 뭐.’
세삼례가 끝난 뒤, 황궁 안에서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들은 황손의 아명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짐은 보(寶)야 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귀한 기운이 느껴지니까요.”
“황상, 모르십니까? 아명은 촌스럽게 지어야 건강하게 자란단 말입니다.”
“그럼 모후께서는 어떤 아명을 생각하셨습니까?”
태후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채(*阿蠆: 이때 채蠆는 전갈을 뜻함)가 좋은 것 같군요.”
“아채요?”
창경제와 정철이 이구동성으로 되뇌었다.
“황상, 어떠십니까?”
창경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내 손자에게 아채라는 이름이라니! 절대 안 되지!’
태후의 기대 가득한 눈빛에 창경제는 정철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제 아들이 앞으로 전갈이라 불리길 원하진 않겠지. 어떻게 좀 해보라고.’
정철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조모님, 이름을 몇 개 정도 생각해두셨을까요? 그중에서 가장 좋은 걸 골라보지요.”
태후가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사실 두 개 정도 더 생각해두었단다. 무엇이 좋을지 계속 결정하지 못하던 참인데, 환랑(*獾郞: 오소리)과 계구(*溪狗: 개) 중에 뭐가 더 좋은 것 같으냐?”
창경제와 정철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