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고생 한 번
태후가 상화연을 연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누가 봐도 태자의 첩을 고르기 위한 연회임이 분명했다.
문무를 겸비했고, 외모도 준수하며, 누구보다도 존귀한 신분을 가진 사내인 태자라면, 어느 집안의 여식이든 그 자리를 마다할 리 없었다. 수도의 비단과 자수방들은 순식간에 바빠졌고, 유명한 수랑(*繡娘: 자수 공예를 하는 사람)들은 치열하게 경쟁 끝에 각 집안에 불려갔다.
정미 또한 당연히 이 소란을 모를 리 없었고, 황궁의 사람들도 굳이 정미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일국의 황태자이자 미래의 황제가 태자비 혼자만 곁에 둘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단, 정미를 제외하고…….
정미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침 식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정미는 화가 나 어두운 표정으로 만두를 억지로 꾸역꾸역 먹다가 계속 토를 해댔다.
환안과 화미가 차와 물, 그리고 손수건을 가져와 주인을 보살피고 있을 때, 정철이 걸어 들어왔다.
정철이 들어오자, 정미는 입을 닦은 뒤 손을 내저어 시종들을 내보냈고 정철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 올 시간이 있었나 봐? 어서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찾아봐야지?”
정철은 정미 옆에 앉아 등을 살짝 토닥여주었다.
“좀 괜찮아? 분명 이 소식을 들으면 속상해할 것 같아서 얼른 와봤지.”
정미가 뚱한 표정으로 몸을 피했다.
“정말 화난 거야?”
정미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어떻게 화가 안 나? 오라버니,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오라버니가 다른 여인과 자는 걸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어떤 일들은 협의할 수 있어도, 어떤 일들은 절대 그럴 수 없는 거야.”
‘나는 애초에 황궁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다고. 오라버니와 함께 하기 위해 들어온 거지. 황궁에 들어왔다고 해서, 다른 여인과 오라버니를 나눠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어. 오라버니는 내 남자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내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당연스레 여기는 일이라 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정미의 토라진 모습에 정철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다가는 손가락으로 뾰로통한 정미의 뺨을 꾹 누르더니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평생 미미와만 잔다고 약속할게. 태자비, 그러면 만족하겠소?”
정미는 왠지 낯이 달아올라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럼 상화연은? 갈 거야?”
“가긴 가야지.”
정철이 웃으며 말했다.
* * *
상화연이 열린 날은 아주 화창했고, 푸른 버드나무와 붉은 꽃이 아름답게 피어 나들이에 딱 좋은 날씨였다.
태후는 심사숙고를 거쳐 열 명 정도의 부인과 그 여식만 연회에 초대했다.
엄선하여 연회에 참석한 여식들은 출신이든 용모든 모두 경성의 규수들 중 손에 꼽혔다. 태후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만족스러워하며 궁녀에게 작게 명령했다.
“태자를 불러오거라.”
잠시 후, 내시의 외침이 들려왔다.
“태자 전하 납시오―”
순간 정적이 흘렀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연회장으로 다가오는 젊은 사내에게 꽂혔다.
소나무처럼 꼿꼿한 자태에 온화하고 준수한 용모의 태자가 등장하자, 여식들은 뺨을 붉힌 채 곁눈질로 몰래 태자를 살펴보았다.
“황조모님을 뵙습니다.”
태후는 말끔히 차려입은 채 격식 있게 행동하는 정철을 보고 안심하며 옆에 그를 앉히고 입을 열었다.
“애가도 나이가 드니 떠들썩한 게 좋아지더구나. 할 줄 아는 재주가 있으면, 애가에게 보여주련.”
* * *
해당화 나무 아래, 어느 한 소녀가 고운 손으로 칠현금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칠현금 소리가 울려 퍼졌고, 따사로운 햇살과 봄바람이 불자 한적한 분위기가 났다.
소녀는 다섯 번째로 재주를 내보인 여식이었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태자, 정철은 그저 한결같이 옅은 웃음만 띠고 있었기에 좋고 싫음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태후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정철에게 작게 물었다.
“경아, 칠현금 연주가 마음에 드느냐?”
칠현금에 대해 묻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람이 마음에 드냐는 뜻이었다.
“나쁘지 않군요.”
정철은 입을 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경아, 왜 그러느냐?”
정철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태후는 왠지 긴장했다.
‘설마, 칠현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잘생긴 사내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정말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겠군!’
정철이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가리고 작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작은 기침 소리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래 정철을 쳐다봤고 소녀의 칠현금 소리도 순간 멈칫했지만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태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가, 태자가 기침을 멈추지 않자 걱정이 되어 물었다.
“경아, 고뿔이라도 걸린 게냐?”
정철이 태후에게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황조모님. 괜찮습니다―”
정철이 손수건을 내려놓자, 깜짝 놀란 사람들의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태후는 크게 놀랐다가 정철의 입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경아, 너―”
“무슨 일입니까?”
정철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입가를 닦았고, 고개를 숙여 손끝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는 순간 멈칫한 채 태후를 쳐다봤다.
태후의 머릿속이 아주 혼란스러워졌다. 정철이 쥔 손수건을 휙 가로챈 태후는 손수건 위의 핏자국이 눈에 들어오자 순간 어지러워져 휘청거렸다.
정철이 급히 태후를 부축했다.
“황조모님―”
태후가 힘겹게 버티며 손을 내저었다.
“피곤하구나. 연회를 이만 끝내지.”
사람들은 태자가 각혈하는 걸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제 딸이나 손녀를 데리고 얼른 자리를 떴다.
태후가 크게 외쳤다.
“여봐라, 어서 태의를 불러오거라!”
정철이 태후를 부축한 채 달래며 말했다.
“황조모님, 진정하세요.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지 않느냐!”
태후는 급하고 두려운 마음에 정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멀쩡하더니, 갑자기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희고 고운 손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정철은 그 손의 느낌에 왠지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도 어찌 된 일인진 모르겠지만, 방금 입을 열자마자 저도 모르게 기침이 나왔습니다.”
“그 전엔 불편하지 않았고?”
정철이 고개를 저었다.
“예, 괜찮았습니다.”
이때 마침 당직 태의 몇 명이 급히 달려왔고, 태후는 태의들에게 정철의 진료를 분부하고는, 다른 사람에게는 창경제를 불러오라 명했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혹여 회임한 정미가 놀랄까 봐 태자비는 부르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창경제가 다급히 찾아와 조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후, 태자가 아프다고요?”
태후가 피 묻은 손수건을 창경제에게 보여주었다.
창경제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마침 나오는 태의를 보고 욕을 퍼부었다.
“태자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을 여태 몰랐단 말이냐?”
황궁의 귀인들은 태의들이 정기적으로 맥을 짚으며 진찰을 하곤 했다.
태후가 급히 말했다.
“황상, 아직 그런 걸 탓하기엔 이릅니다. 우선 태의의 말을 들어보지요.”
창경제가 태의를 노려봤다.
“말하라, 태자가 어찌 각혈을 한단 말이냐?”
태의가 다리를 덜덜 떨며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신들은 아직…… 아직…….”
창경제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다른 태의들은 황제가 들어오자 곧바로 절을 올렸다.
“이런 상황에 그런 거창한 예는 차릴 필요 없다. 태자의 상황이 어떤지만 고하라.”
창경제는 태의들을 둘러보았고 가슴이 점점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태의들의 가슴은 창경제보다도 더 차가웠다. 태자의 각혈에 대한 원인을 찾지 못했으니, 어쩌면 오늘 참수를 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고하라, 태자는 어떤가?”
황제의 물음에 대답을 피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중 가장 경력 있는 태의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태자 전하께선, 저, 전하께선…….”
태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병증을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창경제가 참지 못하고 폭발하려 할 때쯤, 가장 젊은 태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폐하, 소신이 보기에는 태자 전하께선 병을 앓고 계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창경제가 태의를 휙 쳐다보자, 다른 태의들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황상의 진노한 모습을 보니, 오늘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 동료에게 달렸군.’
“소신들이 방금 태자 전하의 맥을 한 명씩 모두 돌아가며 짚었으나, 전하께선 원기가 약간 상하셨을 뿐 각혈할만한 이상은 딱히 없었습니다. 소신이 감히 추측하건대, 전하의 각혈은 오늘 상화연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
태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누군가 기회를 틈타 태자를 독살하려 했단 말인가? 아니지, 경이가 분명 각혈 전엔 아무런 불편함도 없었다고 했거늘.’
젊은 태의는 공손한 태도로 태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태후마마, 국사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국사?”
태후와 창경제가 서로를 쳐다보자, 젊은 태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자 전하의 운명이 특이하여, 사주팔자가 맞는 여인과 함께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태후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애가는 그게 태자의 본처만 해당되는 줄 알았는데, 첩에도 그런 걸 따져야 한단 말이냐?”
태의들은 감히 태후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고, 모두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사실 그들도 태자가 각혈한 원인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목숨을 지키려면 없는 이유라도 지어내야만 했다.
태후가 창경제를 쳐다보자, 창경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짐이 곧바로 국사를 모셔오겠습니다.”
현청관은 교외에 있었기에, 창경제는 사람을 보낸 뒤 태후와 함께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힘겹게 기다린 끝에 마침내 누군가 찾아왔으나, 그 사람은 국사가 아니라 북명진인이었다.
“폐하, 태후마마, 스승님께선 순행을 떠나셨기에, 빈도가 대신 찾아왔습니다.”
창경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진인께서 태자를 잘 봐주시오.”
북명진인은 침상 옆으로 다가가 정철을 자세히 살펴본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자 전하의 각혈은, 어떤 충돌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 태자가 가까이하는 여인이라면 모두 사주팔자가 맞아야 한다는 말이오?”
태후가 불안한 마음으로 묻자, 북명진인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은 다행히 아주 가벼운 충돌이었습니다. 만약 평범한 여인이 전하의 몸을 가까이한다면, 각혈보다 더 심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사매야, 사부님께서 너를 어찌나 편애하시는지. 너를 위해 내게 거짓말까지 시키시는구나! 내 지조는 어쩐단 말이냐!’
이 말이 퍼져나가자, 태자의 첩을 노리던 수도의 집안들마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아무도 태자에게 첩을 들이란 소릴 감히 꺼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태자에게 첩을 들이라 함은, 태자의 목숨을 무시하란 소리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렇게 동궁은 평화로워졌고,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흘러가 정미의 출산일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