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업보
정미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궁 대신 곧장 위국공부로 향해, 단 노부인과 한 씨에게 증 씨의 악행을 알렸다.
증 씨의 악행에 대한 정확한 증거가 없었기에, 정미는 율법 상으로 그녀를 처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증 씨 같은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벌보다 고통스러우리라.
단 노부인은 곧바로 경왕세자를 불러 증 씨가 저지른 짓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왕세자는 반신반의했지만, 단 노부인은 증 씨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걸 제의한 뒤, 차를 대접하고 나서는 매몰차게 경왕세자를 보내버렸다.
경왕세자는 화와 의심이 가득 찬 채 경왕부로 돌아온 뒤, 곧장 증 씨를 찾아갔다.
증 씨는 하룻밤 동안 기절한 뒤 마침내 깨어났고, 안색이 창백했지만 정신은 한결 맑아진 상태였다.
경왕세자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용남에게 말했다.
“남아, 우선 나가 있거라. 네 어머니와 나눌 이야기가 있단다.”
용남은 얌전히 방에서 나오더니, 살금살금 걸어가 창문 뒤에 숨어서 귀를 기울였다.
“세자.”
증 씨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경왕세자는 증 씨를 부축하고 부드러운 베개를 등에 받쳐준 뒤 입을 열었다.
“완랑, 어젯밤 잠꼬대를 많이 하더군.”
증 씨가 멈칫하더니 작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던가요?”
경왕세자는 증 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한옥주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한옥주를 죽였다고 했지.”
창밖에 숨어있던 용남은 이 말을 듣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붙잡는 느낌에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을 틀어막혀버렸다.
용남은 잠시 발버둥 치다가 용흔임을 알아채고 반항을 멈추었다.
용흔이 손을 놓고 계속 들어보자는 듯 눈짓했다.
“세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증 씨의 눈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지만, 재빨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하지만 경왕세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채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완랑, 당신이 한옥주를 해치지 않았단 말이오? 정말 억울하다면 늘 당신을 친딸로 여기던 단 노부인께서 어찌 의모 관계를 끊자고 제의하신단 말이오?”
“그, 그게 무슨 말인가요? 도대체 언제요?”
증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이 잠꼬대를 한 뒤로.”
증 씨에게 어젯밤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었지만, 흔적 없는 꿈처럼 잘 떠오르지는 않았다. 정미가 저를 치료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경왕세자의 말에 증 씨가 변명했다.
“세자, 제가 정말 잠꼬대로 그런 말을 했다고 한들 노부인께서 그걸 어찌 아셨단 말입니까?”
경왕세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어젯밤 여기 있던 태자비가 당신의 잠꼬대를 다 들었기 때문이지!”
“태자비?”
증 씨는 순간 멍해져서 중얼거렸다.
“정미 말입니까?”
그러고는 경왕세자의 안색을 살피며 억울한 듯 말했다.
“세자, 저와 20여 년을 부부로 지내오셨으면서, 어찌 다른 사람이 한 말만 듣고 단정 지으신단 말입니까?”
“그 말은, 태자비가 당신을 모함한단 말이오?”
증 씨가 기침을 한 번 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정미는 이제 태자비이지만, 저는 그 아이가 자라는 걸 봐온 이모나 다름없습니다. 그 녀석은 성정이 격한 편이라 어려서부터 흔이와 티격태격했지요. 그러다 흔이가 몇 번이나 정미와 혼인하고 싶다고 했지만, 예전에 정미와 한지의 일로 수도가 떠들썩했던 일 때문에 계속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세자께서도 아시다시피, 흔이는 솔직한 아이이니 이 일을 정미에게 말했나 봅니다. 그래서 정미가 저를 원망하게 되었을지도―”
증 씨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용흔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구에 서 있었다.
“오라버니!”
용남은 부모님의 대화로 이미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는데, 오라버니가 얌전히 엿듣다가 갑자기 문을 걷어차자 더욱 놀라, 부모님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용흔을 필사적으로 잡아당기며 외쳤다.
“어서 나와. 아버지 어머니께서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잖아!”
용흔이 입술을 꽉 깨물더니, 용남을 밀쳐내고 두 사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경왕세자가 아닌 증 씨를 똑바로 쳐다봤다.
“흔아―”
증 씨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룻밤 사이 아주 많은 일들이 바뀐 것 같은데, 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용흔은 그저 가만히 증 씨를 쳐다봤다.
제 어머니였다. 줄곧 사랑해 마지않던, 늘 존경하고 의지해왔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미워질 날이 올 거라곤, 용흔은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어머니.”
용흔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방금 하신 말씀, 저도 들었습니다.”
증 씨는 완전히 멍해졌고, 경왕세자의 눈빛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어머니, 잘못을 저지르셨으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사과는커녕 잘못을 인정할 용기조차 없으신 겁니까? 이런 상황에서까지 정미 탓을 하시네요.”
용흔은 말할수록 증 씨에게 실망스러워져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면, 어머니께서 저와 정미의 혼사를 막으셔서 제가 앙심을 품고 정미와 함께 어머니를 모함한 거라 하실 셈입니까?”
“그만하거라, 용흔. 네 동생과 같이 나가 있거라!”
경왕세자가 무섭게 외쳤다.
용남은 용흔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울먹였다.
“오라버니, 아버지 말씀대로 해. 나가자, 응?”
여동생의 차게 식은 손에, 용흔은 가시 돋친 태도를 거둬들이고 무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나가자.”
방 안엔 다시 경왕세자와 증 씨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완랑, 아직도 인정하지 않을 셈이오?”
증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경왕세자가 한숨을 쉬었다.
“됐소. 알아서 하시오.”
경왕세자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증 씨가 당황하며 외쳤다.
“세자, 제 말을 들어주세요!”
경왕세자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전 그저 한순간의 어리석음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흔이와 남이가 이제 다 컸다고, 이렇게 쉽게 부부의 정을 끊어내실 셈입니까?”
“당신에겐 한순간의 어리석음이었지만, 그 대가는 한옥주의 인생이었소!”
경왕세자가 한옥주를 언급하자, 증 씨는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한옥주, 한옥주! 아직도 한옥주를 잊지 못하신 겁니까!”
경왕세자가 다시 증 씨에게로 다가오더니, 일그러진 증 씨의 얼굴을 보며 실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
“완랑, 어찌 아직도 모르는 것이오. 당신과 혼인한 이후, 나는 한 번도 다른 곳에 눈을 돌린 적 없소. 한옥주는 뛰어난 미모에 성품도 출중했지. 그래서 나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고 감탄하긴 했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여인을 꽃 꺾듯이 꺾어 집으로 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단 말이오. 나는 경왕부에 훌륭한 안주인이 하나 있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했으니까.”
“그 말이…… 사실입니까?”
증 씨가 멍하니 물었다.
“하지만 이제 와 다 소용없는 말이지. 완랑, 앞으로 그대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오. 각자 알아서 지냅시다.”
경왕세자가 증 씨를 빤히 쳐다봤다.
“질투심으로 가장 친한 벗의 인생을 망친 여인과는 도저히 한 침상에서 잘 수 없으니.”
“세, 세자―”
증 씨는 다급히 침상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떠나가는 경왕세자를 쫓아갔지만, 결국 붙잡지 못했다.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차갑게 닫혔다.
* * *
궁으로 돌아온 뒤, 정미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졌다. 그녀는 이 사실을 화서에게 알려야 하는 건지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정철과 상의했다.
“화서의 몸이 다 낫고 난 뒤 말하는 게 좋겠어.”
“응. 그런데 오라버니, 어젯밤 용흔은 어쩌다 나와 증 씨의 대화를 듣게 된 거야?”
정미가 의문스러웠던 부분을 털어놓았다.
‘오라버니의 세심함이라면, 절대 이런 빈틈을 두지 않았을 텐데.’
정철이 옅게 웃었다.
“용흔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당시엔 정철도 진상을 알지 못했지만, 그간 조사해온 바에 의하면 증 씨가 한옥주의 사건과 조금의 연관도 없진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화 귀비도 목은백부의 사람도 모두 죽은 마당에 실질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증 씨는 경왕세자비였기에, 증거가 있다고는 하나 황가의 체면을 위해 공론화시킬 순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증 씨 같은 귀부인에겐, 지아비의 멸시와 자식들과 소원해지는 것이야말로 어떤 벌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일 터였다.
정미는 정철의 의도를 눈치채고 그의 품에 기대 한숨을 쉬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오라버니, 장춘궁에 화 씨의 원혼이 있는 것 같아. 한번 조사해보고 싶어.”
“이리 와봐.”
정철이 정미를 화장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얼굴 좀 봐. 스스로를 좀 돌봐야 하지 않겠어?”
거울 속 여인은 여전히 아리따웠지만, 늘 선명한 붉은색을 띠던 입술엔 조금의 혈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미가 빠르게 수긍했다.
“오라버니 말이 맞아. 화서의 몸부터 치료하고 난 뒤 알아보는 게 좋겠어.”
정미에겐 화서의 몸을 치료하는 것 외에도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정철의 혈주를 푸는 것이었는데, 연구할수록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다.
“오라버니, 곧 새해지?”
정미가 침상 위에 누워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응.”
“봄이 되면 임랑 오라버니와 조 언니가 혼인하겠구나. 우리도 같이 혼례에 참석하겠지?”
“당연하지. 그다음 해면 둘 사이에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는걸. 그때도 같이 가자.”
정미가 정철의 허리를 안고 작게 중얼거렸다.
“응. 그다음 해에도 꼭 같이 궁 밖으로 나들이를 나가는 거야…….”
정철이 고개를 숙이자, 이미 잠든 정미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이 갑자기 쓰라려 와 정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하늘이 자비를 베풀어서, 우리가 앞으로 매년 함께할 수 있었으면.’
* * *
눈 깜짝할 새 푸르른 풀이 자라나고 새가 날아다니는 봄이 되었다.
황궁 안이든 밖이든 곳곳에 따뜻한 봄기운이 가득했다.
정미는 조청공과 임랑의 혼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 회임을 했기 때문이었다.
황궁 안은 기쁨으로 가득했고, 여식을 둔 집안들은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창경제는 며칠간 꽤 많은 신하들의 직접적인 혹은 완곡한 암시를 받게 되었다.
‘태자비가 회임했고 동궁이 비어 있으니, 태자 전하의 첩을 들일 때입니다.’
예부상서는 규칙에 따라, 본래 태자비가 정해진 뒤 두 명의 양제를 선출해야 하며, 태자의 대혼 3개월 이후에는 양제가 입궁하여 태자를 모셔야 했는데, 아직까지도 동궁이 비어 있는 것은 선조로부터 이어진 법도에 어긋난다며 단호하게 굴었다.
창경제는 신하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자녕궁으로 가 태후와 상의했다.
태자비가 회임했다는 소식이 퍼져나가자, 딸 혹은 손녀들을 데리고 태후를 찾아온 부인들도 적지 않았기에, 태후도 요 며칠간 그 일로 고민하고 있었다.
“태자비가 회임했는데 동궁에 경이를 모실 여인이 아무도 없으니, 첩을 들일 때가 되었지요.”
창경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모후, 정식 절차를 거쳐 동궁을 채워야 할까요, 아니면 우선 마음에 드는 아이를 몇 골라둘까요?”
“애가가 그간 지켜본 바로는, 경이는 태자비 외에 동궁의 궁녀들에게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더이다.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면 오히려 반감을 살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꽃구경을 한다는 명분으로 연회를 열어 부인들과 아가씨를 황궁으로 불러보고, 경이도 직접 와서 본 뒤, 마음에 드는 아이를 들이기로 합시다. 어떠십니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모후의 말씀을 따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