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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358화 (357/375)

358화. 혼을 잃다

정미가 작은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증 씨는 극심한 피로에 조용히 잠든 상태였다. 정미는 조용히 다가가 증 씨를 망진했고 자세히 살펴볼수록 깜짝 놀랐다.

증 씨의 미간은 어렴풋이 어두워져 있었고, 눈 아래에는 그림자가 감돌았다. 그저 충격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혼을 하나 잃은 것이었다.

이때, 증 씨가 눈을 번뜩 뜨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미는 잠시 멈칫했다가 소매에서 물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세자비, 이 물건을 아십니까?”

증 씨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번개라도 맞은 듯 온몸을 흠칫 떨다가, 팔찌를 휙 내쳐 떨어트리고는 끊임없이 중얼댔다.

“오지 마세요. 저를 찾지 마세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팔찌는 침상에 떨어져 몇 바퀴 구르다가 침상 난간에 부딪혀 큰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용흔과 용남이 달려 들어왔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용남이 달려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정미는 아무렇지 않게 팔찌를 주워 소매에 넣은 뒤, 불쾌한 듯 용흔을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세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치료 중엔 아무도 들어와선 안 된다고요.”

용흔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고 뭐라 말하려 입을 움찔거리다가 다시 침묵했다.

정미는 더 이상 용흔을 탓하지 않고 바깥방으로 나갔다.

용남은 안방에서 증 씨를 위로했고, 용흔은 정미를 따라 나와 물었다.

“도대체 왜 저러신 거야?”

정미가 용흔을 빤히 쳐다보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실혼증(失魂症)입니다.”

“실혼증?”

용흔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한 씨를 쳐다봤다.

안방에서 나온 용남은 이 말을 듣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정미가 이어서 설명했다.

“실혼증은 서금과를 완전히 섭렵한 부의든, 이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도사든 치료할 수 있는 병입니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충격을 받아 앓게 되지요.”

“그럼 우리 어머니는 왜 실혼증을 앓게 된 거예요?”

용남이 끼어들자, 정미가 용남을 쳐다봤다.

“용남 말대로, 세자비께서 동지 연회 때 장춘궁을 지나쳤기 때문이야.”

정미가 주변을 둘러보며 충격적인 소식을 알렸다.

“동지 전날 밤, 장춘궁에서 어느 궁녀가 죽었습니다. 그 이후로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고요. 제가 그 소문을 듣고 장춘궁을 찾아가 봤더니, 정말 원기(怨氣)가 모여 있더군요. 세자비께선 몸이 약하시니, 마침 그곳을 지나치다가 그 원기와 충돌한 것 같습니다.”

정미는 불필요한 추측을 만들지 않기 위해 굳이 화 귀비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증 씨가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괜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그럼 우리 어머니를 치료할 수는 있는 거예요?”

용남이 불안한 모습으로 묻자, 정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야. 하지만 초혼술을 하려면 밤이 되어야 하는데, 내 지금 신분으로 밤에 여길 오기엔 힘들 수도 있겠어.”

“그건 내가 아버지와 함께 황백부님께 간청드리마. 분명 허락하실 거야.”

용흔이 곧바로 말했다.

작은 패왕의 성정은 여전히 불같았지만, 어느덧 성숙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그는 여동생에게 정미와 한 씨를 잘 모시고 있으라 당부하고는, 곧바로 경왕세자와 함께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 한 시진 후, 용흔은 창경제의 윤허를 받아 정철과 함께 돌아왔다.

황상께서 아무리 너그럽다고 해도, 며느리가 홀로 궁 밖에서 밤을 보내는 건 절대 윤허하지 않을 것이었기에 태자를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일찍이 정철과 미리 상의해둔 일이었으므로, 정미는 정철이 온 것에 대해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있다면, 증 씨의 혼을 불러들이는 와중에 팔찌의 비밀을 물을 때 확실히 아무도 방해하지 않게 할 수 있으니.’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밤이 되었다.

겨울의 밤은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지만, 다행히 미리 방을 데워놓은 덕분에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밖의 추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저는 세자비의 혼을 불러올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그동안 이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아무도 들어와선 안 됩니다. 그럼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일이 더 복잡해질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더 복잡해지는 건데요?”

어머니의 안위가 걱정된 용남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은 세자비께서 어디서 혼을 잃었는지 알고 있으니, 목표가 확실하지. 하지만 중간에 중단된다면 그 혼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거야.”

“걱정 마. 이번엔 절대 들어가지 않을 테니.”

용흔이 장담하자, 정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철과 마주 보았고 정철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미는 그제야 완전히 안심하고 뒤돌아서 증 씨를 눕혀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끼익하며 닫히자, 정미는 고개를 들어 숨을 살짝 들이마시고는 그제야 조용히 침상 위에 누워있는 증 씨에게로 다가갔다.

증 씨는 이미 혼을 하나 잃은 상태였고, 밤은 환자들이 정신적으로 가장 피곤해하고 굼뜨게 움직이는 시간대이니, 정미는 증 씨가 놀라 깰까 겁내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증 씨는 선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깊게 잠든 눈은 여전히 살짝 찌푸린 상태로 불안한 마음을 드러낸 채였다.

정미는 작은 한숨을 쉬고 준비한 물건을 하나씩 꺼낸 뒤, 혼을 부르는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혼술은 예전에 한 번 해본 적 있어. 당시엔 큰언니의 고혼을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번에 부를 혼은 생혼(生魂)이야. 그 혼을 끌어들일 육신도 있고, 혼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으니, 저번보다 훨씬 쉬울 거야.’

반 주향 정도 지났을 때, 방 안의 촛불이 환해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하더니 증 씨의 안색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창과 문이 굳게 닫힌 방 안에 서늘한 바람이 불자, 증 씨의 미간에 있던 어두운 그림자는 옅은 안개와 함께 맴도는 듯 계속 변화하다가, 결국 푸른 연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증 씨는 그 즉시 눈을 번쩍 떴지만, 눈동자는 초점 없이 몽롱한 상태였다.

증 씨를 빤히 관찰하던 정미는, 이 모습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바로 이때를 기다렸어!’

허공에 미리 그려둔 부적을 증 씨의 미간에 가리키자, 촛불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증 씨의 표정도 멍해졌다.

“완랑(婉娘), 일어나봐.”

정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증 씨의 규명(閨名)을 불렀다.

어두운 등불 때문에 앞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정미의 맑은 목소리 또한 조금 흐릿해졌다.

증 씨의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돌아오더니 중얼거렸다.

“옥주?”

정미가 활짝 웃으며 증 씨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방금은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랐잖아.”

“아…….”

증 씨가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잠들어버렸나 봐.”

“그러니까 내가 푹 쉬라고 했잖아.”

정미가 명랑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팔찌를 증 씨 앞으로 건네 보였다.

증 씨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옥주야, 계속 이러면 나도 곤란해. 이 팔찌는 남란국의 공물이야. 아주 귀한 물건이라고. 황상께서 하나는 귀비마마께 드렸고, 하나는 네게 하사하셨어. 나는 네게 전하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네가 받지 않으면 어떡하란 말이야.”

“하지만―”

“그만해. 받고 싶지 않으면 직접 황상께 돌려드려. 나는 소심해서 못하겠어.”

증 씨는 정미의 손을 붙잡으며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정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경왕세자비가 거짓말을 하고 있어! 다른 한쪽 팔찌는 황상께서 분명 황후에게 주신 것일 텐데, 어째서 이모님께 주었단 말이야?’

정미는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세자비가 화 귀비에게 받은 팔찌를 황상께서 이모님께 하사한 것처럼 속이고 이모가 가지게 했던 거야. 이모님은 황상께 마음이 없으니 이 말을 듣고 황상께 돌려드리러 갔을 테고. 그리고 그 장면을 남안왕께서 보시고,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거지. 그럼 이 일이 이모님의 사고와 관련이 있을까? 세자비는 왜 이런 거짓말을 한 거지?’

증 씨의 지금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기에, 정미는 뒤돌아 걸어가다가 촛불이 가물거리는 사이 천천히 다시 뒤돌아 증 씨를 쳐다봤다.

그러자 증 씨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촛불에 비치자, 더욱 섬뜩해 보였다.

정미가 한 걸음 다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랬어?”

지척에 있던 증 씨는 계속 뒷걸음질 쳤고, 벽 구석에 몰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자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흔들어댔다.

“오지 마, 오지 마!”

“왜?”

정미가 다시 한 걸음 다가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유를 알려주면,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을게.”

증 씨가 손을 내려놓고 용기를 내어 귀신을 흘끗 쳐다봤다. 그러나 여자 귀신의 삐져나온 혀가 보이자 다시 비명을 질렀다.

“마, 말할게. 말할 테니까 다가오지 마!”

정미는 마침 혀가 슬슬 저려오고 있었기에, 증 씨가 눈을 감은 틈을 타 얼른 혀를 집어넣었다.

‘귀신인 척하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은 아니구나!’

증 씨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저 세자가 계속 너를 잊지 못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귀비가 내게 준 팔찌를 너한테 준 거야. 황상께서 주신 거라 거짓말까지 치면서.”

정미는 어렴풋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자비가 말하는 세자는 분명 용흔의 아버지, 경왕세자일 테지. 당시 이모님은 수도 제일 미녀셨다고 했어. 경왕세자도 이모님을 흠모했나 보군. 그래서 세자비의 노여움을 샀고.’

“내가 받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

강압적인 분위기에, 증 씨의 정신은 한옥주와 함께했던 당시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할 정도였다.

“말해!”

정미가 살짝 다가갔다.

아주 살짝 다가갔지만, 증 씨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술술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너라면 분명 팔찌를 황상께 돌려드릴 거라 생각했어. 귀비가 그 장면을 보면 황상께서 다른 한쪽 팔찌를 네게 준 거라 오해할 거고, 너를 귀비와 같은 지위로 여기신다 생각할 테니까. 너는 젊고 아름다웠으니, 귀비는 분명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고, 네 혼사를 얼른 정하게끔 해서 널 노리는 사내의 마음을 접게 할 거라고 생각했어!”

정미는 가슴이 차갑게 식었지만,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이모가 팔찌를 돌려준 장면은, 남안왕뿐만 아니라 화 귀비도 보았던 거야. 남안왕은 그 일로 이모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게 되었고. 화 귀비는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직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 화 씨 같은 악독한 여인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리 없어. 그럼, 이모님의 사고는 분명 화 씨와 관련이 있을 거야!’

정미가 손을 들어 머리에 꽂힌 금비녀를 뽑아내자,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뺨을 따라 찰랑거렸다. 정미는 더욱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후 답청을 갔을 때 그것도 네 계획이었던 거지?”

양심에 찔리는 일이 없다면, 귀신이 찾아와도 두려울 게 없는 법. 증 씨는 이 비밀을 마음속에 묻어두려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잊은 적 없었고, 오히려 꿈에 나타날 때마다 더더욱 선명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정미가 이렇게 나타나 묻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머릿속에 있던 말을 쏟아냈다.

“아냐, 그건 아니야. 그땐 그저 너와 놀러 나갔던 거야. 널 해치려고 하지 않았어!”

“날 해치려 하지 않았다고?”

정미가 피식 웃으며 증 씨의 코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럼 그날 날 겁탈한 강도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데?”

붉은색으로 칠해진 정미의 손톱이 증 씨의 뺨을 스치자, 증 씨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내가 아냐. 귀비의 짓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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