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56화 (355/375)

356화. 팔찌의 출처

한 씨가 떠난 뒤에, 정미는 정원에서 바람을 쐬며 생각했다.

‘어머니가 알려준 정보와 오라버니가 남안왕에게서 얻은 정보가 맞지 않아. 어째서지? 둘 중 한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걸까, 아니면 당시 이모님의 사건은 그저 우연이었을 뿐, 그 강도는 한참 전에 사람들 속으로 숨어버린 걸까?’

정미가 고민에 잠겨 조용히 앞으로 걸어가고, 환안이 묵묵히 그 뒤를 따르며 점점 꽃과 나무가 우거진 곳에 다다랐을 때쯤, 갑자기 소궁녀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어? 완수 언니가 자살했대.”

“정말? 완수 언니는 완의국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한 거겠지. 내가 듣기로는 아주 비참하게 죽었대.”

“어떻게 죽었는데?”

“장춘궁 벽에 머리를 박았대.”

‘장춘궁’이라는 말이 들리자, 정미가 환안에게 눈짓했다.

이에 환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태자비마마께서 여기 계신다. 앞으로 나오거라.”

잠시 후, 두 소궁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걸어 나와 벌벌 떨며 정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미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소궁녀들의 안색이 최악에 다다랐을 때쯤 입을 열었다.

“완수가 장춘궁에서 죽었다는 건 어디서 들은 정보인가?”

소궁녀들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고, 이를 본 정미는 온화하게 웃었다.

“너희에게 벌을 내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너희는 동궁의 소궁녀인데, 어찌 완의국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이지?”

둘 중 하나가 다정한 정미의 표정을 보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 소식이 퍼진 지는 벌써 며칠이나 되었습니다. 다만 완수는 그저 완의국의 궁녀였기에 윗분들께 보고가 되지 않은 것이지요.”

하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을 주인들이 모르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정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은, 완수는 그저 완의국의 일개 궁녀일 뿐인데 소문이 어찌 이리 요란하게 퍼지냐는 뜻이다.”

황궁에선 매년 꽃다운 나이의 궁녀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소문이 도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두 소궁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말하기 싫은 게냐?”

아까 대답했던 소궁녀가 흠칫 놀라며 급히 대답했다.

“어찌 감히요. 다만 말했다가, 태자비께서 벌을 내리실까 두렵습니다.”

정미는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소궁녀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완수가 장춘궁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완수가 죽은 뒤, 장춘궁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아서―”

정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가,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구나. 터무니없는 소문일 뿐이니, 너희도 함부로 퍼트리지 말고 이제 그만 물러나 보거라.”

두 소궁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러나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미는 화미에게 완수의 일을 알아보라 명했다.

* * *

정미는 완수의 죽음에 대해 빠르게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완수는 완의국으로 쫓겨난 뒤 텃세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귀인이 보낸 옷까지 잘못 세탁하여 관리인에게 한바탕 꾸중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사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장춘궁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는 것이다.

완수가 죽은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죽은 장소는 몹시 의문스러웠다.

‘화 귀비가 죽은 뒤, 장춘궁은 청소와 경비를 서는 궁인 외엔 계속 비어 있었어. 이렇게 텅 빈 궁전은 모두가 기피하기 마련인데, 왜 그곳에서 죽은 거지?’

정미는 왠지 수상쩍다고 생각해, 저녁에 태후와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장춘궁으로 향해보았다.

정미는 장춘궁 입구에 서서 안을 들여다봤다.

화려했던 궁은 불과 수개월 만에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로 변해있었다.

문지기 궁인에게 인사를 한 정미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이 지나 겨울이 되자, 정원의 웃자란 풀들은 누렇게 시들어있었고 협죽도를 태운 새까만 자국은 몹시 황량하게 느껴졌다.

정미는 팔에 소름이 돋아 저도 모르게 슥슥 비벼댔다.

“마마, 여긴 다른 곳보다 조금 추운 것 같아요. 고뿔에 걸리실 수 있으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화미의 말에, 정미가 화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가 다른 곳보다 춥다고?”

화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안, 넌 어때?”

“엄청 추워요. 들어오자마자 으스스한 게 아주 불편했어요.”

환안이 팔을 비벼댔다.

정미는 화 귀비의 침전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내 느낌이 맞구나. 여긴 다른 곳보다 음기가 훨씬 강해.’

정미는 청령진인에게 서금과를 배우기 시작하며 꽤 많은 배움을 얻어왔다. 그래서 장춘궁의 문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서금과의 이론에 따르면, 장춘궁 안에 원혼이 있기 때문에 음기가 이리도 강한 것일 터였다.

‘완수가 이곳에서 죽었기 때문인가?’

정미는 이 추측을 빠르게 부정했다.

‘이런 음기라면, 죽은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완수의 것일 리 없어. 그럼 설마…… 화 귀비인가?’

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정미는 가슴이 철렁해 허공에 부적을 그리다가 도중에 멈췄다.

‘배원부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체력 소모가 심한 서금과의 부적을 쓸 순 없어.’

“마마?”

정미가 계속 화 귀비의 침전을 노려보자, 화미는 왠지 소름이 돋아 조심스럽게 정미를 불렀다.

정미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가자.”

여인은 음기가 강했고 후궁엔 대부분 여인들만 있었으니, 음기가 아주 짙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용기(龍氣)가 있었으므로 보통은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화 귀비의 망령이 남아있는 거라면?’

정미가 피식 웃었다.

‘참 우습군. 그렇게 곱게 죽은 것도 모자라, 아직도 억울해하고 있단 말이야?’

* * *

동궁.

정철은 따뜻한 노란 불빛 아래서 정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미가 정철을 발견하자, 마음속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순식간에 걷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왜 지금 돌아와?”

궁인들을 내보낸 뒤, 정철이 정미를 품에 안고 물었다.

“좀 천천히 걸었거든.”

정미는 한 씨에게서 들은 정보를 정철에게 들려준 뒤 물었다.

“오라버니는, 뭔가 알아낸 게 있어?”

정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진전은 없지만, 실마리는 조금 알아냈지. 사람을 보내 푸른 뱀 팔찌의 그림으로 수도의 금은방을 샅샅이 조사하라 명했고, 기진방이라는 가게에서는 팔찌의 출처를 알 수 있었어.”

정미의 눈이 반짝였다.

“어디서 온 팔찌래?”

“이런 모양의 팔찌라면, 남란국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대.”

“남란국?”

정미는 기억을 돌이켜봤다.

서책에서 본 남란국은 여인의 지위가 높았고, 독충을 사용하는 데 뛰어난 풍습이 특이한 나라였다.

“이모님이 어쩌다 남란국의 팔찌를 얻게 되었을까?”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 봤지.”

정미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정철이 웃으며 물었다.

“누굴 찾아갔을 것 같아?”

정미는 정철의 다정한 웃음에 설레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서씨 가문의 아가씨, 맞지?”

정철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뿌듯한 표정의 정미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서가 아가씨의 부친을 찾아갔어.”

지금 동궁엔 태자비 한 사람밖에 없었기에, 벌써부터 많은 대신들이 제 여식을 동궁에 들여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러니 정철은 당연히 서가 아가씨를 직접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능남은 남란국과 인접해있고, 서 대인은 능남에서 20여 년간 머물렀으니, 수도에서 남란국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서 대인께서 뭐라 하셨어?”

정철의 시선이 정미의 새하얀 손목에 꽂혔다.

푸른 뱀이 손목 위에 둘려 있었는데, 마치 상대방을 노려보는 듯한 붉은 눈알은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했으며 또 어딘가 무서웠다.

“서 대인 말씀으로는, 남란국의 여인들은 뱀 키우는 걸 좋아한대. 이런 모양의 팔찌는 우리 수도에선 특이한 물건이지만, 남란국에서는 평범한 장신구 중 하나라고 해. 대량의 여인이 나비나 꽃 모양의 장신구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셨어.”

정철이 팔찌의 붉은 눈을 콕콕 찌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 팔찌는 남란국의 왕궁에서 나왔을 확률이 크다고 해. 왜냐면 남란국의 왕족만이 눈이 붉은 푸른 뱀 모양의 장신구를 할 수 있거든.”

정미는 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모님이 남란국의 왕족과 교류가 있었나? 그건 정말 뜻밖인데.”

정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봐. 그래서 다른 생각이 떠올랐어.”

정철이 건청궁 방향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팔찌는 남란국이 대량에 바친 공물이 아닐까 해.”

정미의 눈이 반짝였다.

“그쪽이 맞는 것 같아. 그다음은?”

“그다음은, 바로 이곳으로 돌아와 우리 마마께 보고를 하러 왔다는 거지.”

정미가 정철을 찌릿 노려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쳐?”

정철이 손을 들어 품에 있는 정미의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어. 개인적으로 이렇게 조사하는 것보단 차라리 내일 부황께 직접 여쭤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정미는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뭔가 안 좋은 일에 연관되어 있어서, 부황께서 오라버니를 야단치시면 어떡해?”

정철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이미 몇십 년 전의 일이니까 뭔가 비밀이 있다고 해도 난 그저 물어보는 것뿐이니, 부황께서 노여워하시진 않을 거야.”

‘음, 황태자가 남색을 즐긴다는 것도 받아들인 황상인데, 이런 작은 일로 나를 탓하진 않으시겠지?’

* * *

다음 날 조정이 끝난 후, 어서재 안.

창경제는 푸른 뱀 팔찌를 들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생각났구나. 이건 십여 년 전 남란국에서 공물로 바친 팔찌다. 원래는 한 쌍이었어. 마침 여름이었고, 이 팔찌를 끼면 몹시 시원하기에 짐이 둘 중 하나를…… 화 씨에게 주었다.”

화 씨를 언급하자, 창경제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창경제는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화 씨가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도 잘해주지 않았을 텐데!’

“그럼, 이 팔찌는 짝이 있는 한 짝이라는 뜻입니까?”

창경제의 눈빛이 살짝 번뜩이더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다른 한 짝은 짐이 살펴보다가 떨어트려 깨졌다.”

‘다른 한 짝은, 사실 몰래 유폐된 황후의 관저궁에 놓아두었지. 황후는 그 당시 이미 정신이 나간 지 몇 년이 넘었었으니, 그 팔찌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

정철은 이런 자초지종을 알 수 없었지만, 창경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채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이 팔찌는 장춘궁에 있던 것이군요.”

창경제가 손을 내저었다.

“이 이야긴 그만하고, 온 김에 짐과 산책이나 하자꾸나.”

정철은 창경제와 함께 산책을 마친 뒤, 태후와 황후를 만나러 자녕궁으로 향했다.

황후는 이제 태후 앞에서도 더 이상 미친 척하지 않았고, 정철이 올 때마다 심복 하인만 남기고 시종을 모두 내보내곤 했다.

태후는 최근 기분이 몹시 좋아 얼굴빛이 환했다. 태후가 웃으며 정철에게 물었다.

“건청궁에서 오는 길인 게냐?”

“예, 부황께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나 보구나.”

태후가 옅게 웃었다.

정철은 흠칫했다.

‘황궁의 일이라면, 태후가 더 잘 알지도 모르지.’

정철은 이내 팔찌를 꺼내 보였다.

“태자비가 팔찌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이 특이해서 호기심이 일어 부황께 타국에서 바친 공물이 아닌가 여쭤보았습니다.”

태후는 팔찌를 한 번 훑어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이상하게 생긴 팔찌구나.”

황후 뒤에 서 있던 궁녀, 청아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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