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오리무중
연회가 끝난 후, 정철은 정미에게서 푸른 뱀 팔찌를 가져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정철은 남안왕과 불억루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초목 위에는 서리가 맺혔고, 길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러나 불억루는 봄날처럼 따뜻했고 활짝 핀 동백꽃들이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정철은 남안왕과 마주 앉은 채였다. 차의 향이 두 사람을 감쌌다.
남안왕이 부드럽게 웃으며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다.
“예전에는 벗으로서 여기에서 만났는데, 이제 네 왕숙이 되어 만나는구나.”
정철이 옅게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고는 소매 속에서 물건을 꺼내 남안왕 앞으로 밀어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왕숙, 이 물건을 알고 계시지요?”
남안왕이 흠칫하더니 조용히 정철을 쳐다봤다.
남안왕은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도 입을 열지 않을 사람이었기에, 정철은 그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차 향기도 옅어졌을 때쯤, 남안왕이 마침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리하구나. 지난 연회 때부터 어쩌면 네가 이 팔찌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내가 아는 물건이 맞다. 이렇게 특이한 모양의 팔찌는 몇십 년이 지나도 잊기 어려운 법이지. 이 팔찌는 한때 수도 제일 미녀였던, 네 장모의 여동생인 한옥주의 물건이다.”
남안왕이 인정하자, 정철이 이어서 물었다.
“외람되지만, 이 팔찌가 왕숙께 특별한 물건입니까?”
잠시 멈칫했던 남안왕이 되물었다.
“태자, 그게 무슨 뜻인가?”
정철이 솔직하게 말했다.
“왕숙께서 방금 이렇게 특이한 모양의 팔찌는 잊기 어렵다고 하셨지요. 위국공부에 갔을 때, 이모님인 한옥주의 아들, 화서가 이 물건을 태자비에게 주었습니다. 태자비는 받자마자 팔에 착용했고요. 하지만 위국공부에선 아무도 이 물건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팔찌는 이모님의 물건은 맞지만, 이모님이 자주 착용하던 팔찌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지요.”
정철은 남안왕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시 이모님께선 혼인도 하기 전이었는데, 자주 착용하지도 않은 팔찌를 왕숙께서 한눈에 알아보신 데다가 놀라 젓가락까지 떨어트리셨으니, 제가 의아하게 여길 만도 하지 않습니까? 왕숙께서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모님인 한옥주와…… 예전에 무슨 특별한 관계셨습니까?”
남안왕은 가만히 정철의 말을 듣다가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태자는 치밀한 인물이구나. 하지만, 나와 한옥주는 모두 너보다 윗사람이지 않더냐. 내가 과거에 대해 꺼내기 싫다고 하면 어쩔 셈이냐?”
정철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읍을 했다.
“태자―”
“제가 어찌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왕숙을 찾아뵌 것은 왕숙께 상황을 알려 달라 부탁드리기 위함이지, 결코 왕숙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남안왕 같은 사람에게는 강요해봤자 소용없을 거다. 그간의 정과 조카라는 명분으로 부탁만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남안왕이 말해줄지 아닐지는, 나도 짐작할 수 없으니.’
정철이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남안왕이 웃으며 말했다.
“이 팔찌는 내가 한옥주에게서 본 팔찌가 맞다. 하지만 한옥주와 나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뭐, 굳이 말하자면 한때 내가 한옥주를 흠모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네. 한옥주는 이 사실을 알지도 못했으니.”
정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한옥주, 한때 수도의 제일 미녀였던 사람. 문무를 겸비한 데다가 쾌활한 성정까지 지녔으니, 그런 여인을 흠모하는 사내가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정철은 남안왕의 말속에서 수상한 부분을 눈치챘다.
“왕숙, ‘한때’ 이모님을 흠모하셨다면, 이후 그 마음을 포기하신 겁니까?”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 기세를 타고 묻지 않으면 앞으로 다신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에, 정철은 실례를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남안왕은 흠칫했지만, 그리 불쾌한 기색은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옥주가 세상을 떠났으니 자연스레 마음을 포기하게 되었지.”
“아닐 겁니다.”
정철은 남안왕의 말을 단호히 부정했다.
“흠모하는 여인이 살아있을 적 마음이 바뀌어야 ‘한때’라는 표현을 쓸 수 있지요. 게다가 왕숙께선 이모님이 그런 일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마음을 바꾸실 분이 아니고요.”
남안왕이 침묵하자, 정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조사해보았는데, 이모님의 사건이 일어난 그해 마침 이모님께서 황궁에 며칠 머무른 적이 있었지요. 설마 왕숙께선 부황 때문에―”
그 말에 남안왕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태자가 그 일까지 알고 있다니, 내가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너희 부자간에 응어리가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남안왕은 소매를 들어 가벼운 기침을 몇 차례 해댔다.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자, 정철이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남안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시 나는 한옥주를 꽤 마음에 들어 했지만 흠모하는 마음은 그리 깊지 않았다. 겨우 호감이 있는 정도였고, 나도 중요시 여기진 않았지. 그러다―”
남안왕은 푸른 뱀 모양의 팔찌를 흘끗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무심코 한옥주가 이 팔찌를 황형에게 전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렇게 그 마음마저도 옅어지게 되었지.”
정철의 예상을 훨씬 빗나간 답이었다.
“이모님께서 이 팔찌를 부황께 전해드렸다면, 어쩌다 다시 이모님의 유품이 되어 화서에게 전해졌을까요?”
남안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당시엔 그저 난처하고 당황해 상황을 피하고 무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 그 장면을 보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지. 아마 당시 황형이 팔찌를 받지 않은 게 아닌가 싶네만.”
정철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불억루의 만남으로 꽤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더 큰 의문이 들게 되었다. 마치 오리무중에 빠진 것처럼 갈수록 갈피가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남안왕이 여전히 뭔가 숨기고 있을진 몰라도, 오늘 내게 가르쳐준 것들은 아마 전부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옥주의 사건은 그저 우연일 뿐, 황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건가?’
정철은 직감적으로 이 사건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도의 규수들이 답청하기 위해 교외에 나가는 건 평범한 일이었다. 대부분 수도 근처로 호위를 대동해 떠나곤 했다.
천하 태평한 세상에서, 어찌 그런 극악무도한 강도가 양갓집 규수에게 덤빌 수 있단 말인가?
양갓집 규수는 가난한 집의 귀한 여식과는 전혀 달랐다. 그런 악질인 일을 겪으면 분명 온 힘을 다해 철저히 수사했을 터였다. 정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당시 관아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철저히 수사했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고 했다.
한옥주를 납치하고 겁탈했던 강도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뜬금없이 나타났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마치 단지 한옥주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인 것처럼.
동궁으로 돌아온 정철은 멍하니 팔찌를 만져보며 사색에 잠겼다.
그러고는 정미와 함께 이 다음 행동을 상의하기로 결심했다.
* * *
논의 결과, 정미는 한 씨를 궁으로 불러 한옥주의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고, 정철은 팔찌의 출처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이렇게 특이한 모양의 팔찌라면 분명 평범한 금은방에서 팔지는 않았을 터였다.
동궁에 도착한 한 씨는 정미를 보자마자 웃었다.
“황궁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예전보다 안색이 훨씬 나아 보이는구나.”
정미가 뺨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그러니까 걱정마시라고 했잖아요. 둘째 오라버니가 절대 저를 고생시킬 리 없다고요.”
한 씨가 정미를 노려봤다.
“어찌 아직도 ‘둘째 오라버니’라 부르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게다.”
정미는 입을 오므리며 웃다가 화제를 돌렸다.
“화서는 좀 괜찮아졌나요?”
한 씨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드러났다.
“네가 보낸 부수를 마신 뒤,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단다. 네 외조모님도 요 며칠간 기분이 아주 좋아지셔서 밥도 반 그릇이나 더 드시고 계시고.”
“다행이네요.”
정미는 손목의 팔찌를 만지다가 한 씨 앞으로 내밀었다.
“저, 어머니. 이모님께서 예전에 이 팔찌를 좋아하셨나요?”
한 씨가 눈을 가늘게 뜨고 팔찌를 쳐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그런 이상한 팔찌를 얻어왔나 했더니, 네 이모의 유품이었나 보구나.”
“모르셨어요?”
한 씨가 고개를 저었다.
“착용하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옥주가 떠나기 전 2년간은 나도 위국공부에 잘 찾아가지 않았으니, 네 이모의 얼굴도 거의 보지 못했지. 이게 네 이모의 유품이라면, 그쯤에 얻은 물건이겠지.”
“그럼―”
정미가 팔찌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설마 이모님께서 당시…… 입궁하여 비가 되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요?”
“그럴 리는 없다!”
한 씨가 단호히 부정하자, 정미가 의문에 찬 눈빛으로 한 씨를 쳐다봤다.
“네 이모는 소탈한 성품이었어. 황궁 같은 곳을 가장 싫어했을 게야.”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팔찌를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모님이 흠모하던 사내가 마침 황궁의 주인이었다면요? 오라버니가 아니었다면 이런 황궁에 들어오려고 하지조차 않았을 저처럼 말이죠.”
한 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야, 도대체 무슨 일이니. 갑자기 어찌 네 이모에 대해 궁금해하는 거야?”
정미가 한 씨의 손을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어머니,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솔직하게 잘 대답해주세요.”
한 씨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정미를 살펴보다가 결국 의심스러운 마음은 일단 삼켜두기로 했다.
자신의 딸도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었고, 황궁에선 아무 이야기나 쉬이 꺼낼 수 없었으며, 저 자신 또한 안채의 경쟁에 능한 부인은 아니었지만, 딸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굳이 깊이 따질 필요는 없었다.
한 씨가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네 이모가 황상을 흠모했을 가능성은 절대 없다.”
“어째서요?”
“당시 풍 황후가 유폐 당한 뒤, 네 이모는 황상을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황상께서 환골탈태라도 한 게 아닌 이상, 네 이모 성정에 어찌 황상을 흠모한단 말이니?”
정미는 왠지 뒷소문이 좋지 않은 제 시아버지가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물을 게 없어지자 말문을 돌렸다.
“정동과 유야는 어떤가요?”
한 씨가 웃으며 말했다.
“교외에 집을 구해주고 얼마 전 사람을 보내 살펴보았다. 유야는 잘 지내고 있더구나. 뽀얗고 포동포동한 모습이고, 정동도…… 얌전히 잘 지내고 있었다. 걱정 말거라.”
“정동은 유야에게 진심을 다하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마세요. 정동이 원한다면, 좋은 사내를 찾아서 혼인을 시켜줘도 좋고요.”
한 씨가 정미를 노려봤다.
“예전에 그 계집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잊었니? 지금 정동의 신분은 폐태자의 양제다. 원래라면 죽었을 목숨인데,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천운이나 마찬가지지. 그런데 또 지아비까지 찾아주겠단 말이야?”
정미가 웃었다.
“어머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중매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정동은 저보다 조금 어리잖아요. 만약 나중에 마음이 맞는 사내를 만나게 된다면 저희가 굳이 막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됐다, 그렇게까지 그 아이를 신경 쓰고 싶진 않구나.”
한 씨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정동이 아니라 너야말로 스스로 잘 신경 써야 한다. 반년에서 일 년간은 동궁에 새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으니, 최대한 일찍 황손을 낳아야 해.”
정미가 멀뚱히 듣고 있자, 한 씨가 한숨을 쉬었다.
“평범한 집안에 시집갔다면, 사내가 첩을 들이려 할 때 내가 찾아가 두드려 패면 되는 일이지만, 황궁은 그럴 수 없지 않니. 설마 태자가 앞으로도 너 하나만 곁에 둘 것 같니? 태자가 원한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용납하지 않을 게다.”
정미는 이 일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