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단서의 시작
자녕궁 안, 태후가 굳은 표정으로 분부했다.
“여봐라, 완수를 완의국(*浣衣局: 궁의 빨래를 담당하는 부서)으로 보내라.”
완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태후에게 애원했다.
“태후마마,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도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만―”
태후는 정철의 반응을 살짝 살폈고 정철이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서 끌고 가지 않고 뭐 하느냐!”
궁문 밖으로 완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도 여인의 억울한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를 들은 궁인들은 모두 겁을 냈다.
태후가 궁녀들을 천천히 쳐다보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명심하거라. 완수는 규율을 지키지 않아 이런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쓸데없는 마음은 고이 접어두도록 하여라!”
“예!”
태후는 정철이 건넨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경아, 애가가 사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이다. 돌아가면 태자비에게 전해주거라.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제대로 처리해도 된다고. 황궁이 어지러워지면 안 되니 말이다.”
“예, 태자비에게 전하겠습니다.”
정철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얼른 돌아가 쉬거라. 태자비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신혼 아니더냐.”
“그전에 황조모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정철이 웃었다.
“태자비를 모시는 궁녀들을 제외하고, 동궁의 다른 궁녀들은 모두 내시로 바꾸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성가신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태후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내시로 바꾸자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절대 안 되지!’
“큼큼, 그건 안 될 것 같구나. 선례도 없고, 규율에도 맞지 않아서 말이다.”
태후가 엄숙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정철은 잠시 멈칫하더니, 태후의 표정을 살피다 그제야 문득 태후의 의중을 깨닫게 되었다.
태후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정철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오해를 해명하고 싶진 않았다.
‘앞으로 나와 정미에게 수많은 일을 막아줄 오해일지도 모르니까.’
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완수의 일도 태자비에게 알려주어야 하고요.”
태후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직 태자비는 특별히 대하는구나.’
태후는 앞으로 태자비에게 더욱 잘해주기로 조용히 결심을 내렸다.
* * *
태자비의 침궁은 여전히 등불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미는 의서를 내려놓고 욕당을 관리하는 궁녀가 용서를 비는 것까지 모두 들은 뒤 물었다.
“태자 전하께선 어디 계신가?”
궁녀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다가, 정미의 위엄 있는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솔직히 대답했다.
“완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알겠다. 그럼 관례에 따라 알아서 벌을 받으러 가거라.”
정미가 궁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궁녀가 나가자, 화미가 위로했다.
“마마, 태자 전하께선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정미가 웃었다.
“태자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됐어, 너희도 이만 물러가. 책이나 더 봐야겠어.”
잠시 후 정철이 들어왔을 때, 병풍에 기대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신부의 훈훈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철이 빙긋 웃으며 정미에게 다가갔다.
정미는 의서를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정철을 바라봤다.
“태자 전하, ‘나비’는 처리하고 오셨나요?”
정철이 정미 옆에 앉더니 자연스럽게 껴안았다.
“처리했지.”
그러고는 정미의 손을 아래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런데 여긴 아직 처리가 안 됐구나. 어떡하면 좋겠느냐?”
성난 용은 옷감 너머로도 뜨거운 열기를 전하고 있었다.
정미가 정철을 흘끗 쳐다보더니 물었다.
“설마, 그 ‘나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정철이 정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럴 리가. 태후께서 보낸 탕약 때문이야.”
정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철이 설명했다.
“우리가 각방을 쓰니까, 내가 다시 사내를 원하는 줄 아셨나 봐.”
정미는 잠시 멍해졌다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당연히 오라버니의 장난이었다는 걸 눈치채셨을 줄 알았는데. 평소엔 그렇게 눈치 빠른 분이시면서.”
“지나치게 신경 쓰면 놓치는 게 있기 마련이니까.”
정철이 정미의 손을 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혹시나 또 탕약을 보내실까 봐, 앞으론 여기서 얌전히 자려고.”
“아.”
정미가 잘 정리된 침상 위 이불을 슥슥 펴더니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 자자.”
정철이 허리를 숙여 정미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평상에서 잘게.”
등불이 꺼지고 맑은 달빛이 창살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자, 방 안이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침상 위에 누워있는 정미에겐, 창가의 평상 위에 누운 정철이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이리저리 뒤척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정미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왠지 웃기다고 생각했다. 약 반 시진이 지났을 때까지도 여전히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결국 침상에서 내려와 맨발로 평상 앞에 다가갔다.
정철이 눈을 떴다.
“미미? 나 때문에 못 잤어?”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바깥방에서 잘게.”
그때 정미가 가녀린 손가락을 뻗어 정철을 살며시 눕히더니, 저도 옆에 같이 누웠다.
정철은 순간 온몸이 굳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미, 어서 돌아가서 자. 아까…… 그 탕약 때문에 좀 참기 힘들어서 그래.”
“그럼 참지 마.”
정미가 정철의 손을 잡아당겨 제 허리에 놓자, 정철이 멈칫했다.
“저번에 안 된다고 말했잖아.”
딱딱하게 굳은 정철의 모습에, 정미는 아예 정철 위로 올라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첫 번째 배원부는 이미 만들어 뒀어. 닷새는 더 쉬어야 하지만, 오라버니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정철이 정미를 안고 평상에서 내려가며 정색했다.
“안 돼. 네 몸이 더 중요해.”
정철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정미가 작은 신음을 내었다.
“왜 그래?”
정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운 듯 말했다.
“평상에 뭐가 있었나 봐. 배겨서 아파.”
“내가 봐줄게.”
정철이 허리를 숙이고 정미를 살펴보려 하자, 정미가 그를 휙 잡아당기더니 잽싸게 정철에게 매달려 그의 목에 입맞춤을 해댔다.
“미미―”
정철이 쩔쩔매며 숨을 깊게 들이켰다.
“첫 번째 부수에 필요한 정혈은 아주 적어서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이틀 정도 쉬면 돼.”
정미가 정철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뱉어내며 속삭였다.
“이래도 하기 싫어?”
정철은 약간 미끄러져 내려간 정미의 몸을 받쳐 들고는 창가의 평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정미를 위로 던진 뒤 그 위를 덮쳤다.
새들의 지저귐도 잦아든 계절의 고요한 밤, 창밖은 낮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달리, 달빛이 세상을 가득 덮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야경을 자아냈다.
정미는 두 손으로 창턱을 잡고, 등 뒤에 있는 사람이 마음껏 들이닥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어지는 열기에 마침내 온몸이 떨리더니 절정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조용히 잠들었다.
* * *
태자와 태자비가 다시 합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태후는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고, 완수의 결말은 동궁의 궁녀들을 얌전하게 만드는 데 성공해 뒤에서 몰래 태자에 대해 얘기하던 사람들도 당분간 사라지게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동지가 되었다.
군신들과 명부(命婦)들을 위한 큰 연회가 열린 뒤, 저녁에는 황가를 위한 연회가 열려 황실의 핏줄과 가까운 자들은 거의 모두 동락전에 모였다.
“덕소 고모님은 오지 않으셨나?”
공주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었다.
“덕소 고모님은 홑몸이 아니시잖아. 게다가 얼마나 귀한 아이인데, 올 수 있을 리가.”
넷째 공주가 귤을 하나 들고 여유롭게 껍질을 까며 말하자 셋째 공주가 흠칫했다.
“어라, 왜 큰언니는 안 오셨지?”
넷째 공주는 반쯤 깐 귤을 들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피식 웃었다.
“창피해서 못 오신 것이겠지요.”
그러고는 정철이 있는 방향으로 입을 삐죽 내밀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큰언니께서 예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마음에 품었던 사람이 갑자기 남동생이 되었는데, 편하게 만날 수 있을 리가요?”
셋째 공주가 단정하게 앉아있는 다섯째 공주와 다른 공주들을 쳐다보더니, 넷째 공주를 슬쩍 밀었다.
“다른 동생들도 있으니, 이제 그만해.”
넷째 공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때 뒤에서 거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넷째가 또 혀를 놀리고 있나 보군? 하하, 역시 하루라도 나불대지 않으면 못 배기는구나.”
공주들이 고개를 들자, 대공주 안양이 어느새 근처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양 공주는 넷째 공주를 대충 훑어보더니, 한 손엔 은으로 된 술병을, 한 손엔 술잔을 들고 여유롭게 정철에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정철에게 잔을 들어 보였다.
“태자, 황저(皇姐)가 술을 한잔 올리지요. 이 술을 마신 뒤엔, 지난 일은 없던 걸로 합시다. 태자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까요.”
정철이 가볍게 웃더니, 술잔을 들어 안양 공주의 잔과 부딪혔다.
“그럼 드시지요.”
정철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술잔을 비웠다.
그 아름다운 풍격에 안양 공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정미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태자비에게도 제가 한 잔 올리지요. 그대와 태자가 정답고 화목하게 지내기를.”
“감사합니다, 대황저님.”
정미가 술잔을 들고 끝까지 들이켰다.
정미는 소매가 넓은 예복을 입고 있었기에, 술잔을 들자 소매가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푸른 팔찌가 드러났다.
푸른 뱀 모양의 팔찌였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그리 화려한 팔찌는 아니었다. 그러나 안양 공주는 마침 정미를 세심히 살펴보고 있던 터라, 특이한 모양의 팔찌에 자연스레 시선이 꽂혔다.
“특이한 팔찌군요. 푸른 뱀 모양이라니. 자세히 살펴보다가 살짝 놀랄 뻔했답니다.”
안양 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좀 특별한 팔찌라서요.”
정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작은 달그락 소리가 났지만, 이리저리 술잔을 주고받느라 바쁜 대전 안에선 그 누구도 그 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정철은 귀가 아주 밝았고, 소리가 난 곳도 저와 가까웠기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남안왕이 젓가락을 떨어트려 어느 궁인이 새 젓가락을 내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화서의 부탁이 떠오르자, 정철은 순간 멈칫했다.
한옥주는 당시 답청을 나갔다가 괴한에게 겁탈을 당해 아이를 낳고 자결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괴한을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설마, 남안왕이 뭔가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