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목욕
정미가 응접실에서 기다린 지 일주향이 지났을 때, 정철은 그제야 화서의 방에서 나왔다.
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정미가 정철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화서가 뭐라고 했어?”
정철은 마차 벽에 비스듬히 기대 정미의 손목에 끼워진 팔찌를 잠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화서의 모친을 해친 그 사내를 찾아 대신 복수를 해줬으면 한다고 했어.”
정철은 또렷한 이목구비의 소년이 차분한 표정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원래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던 사람이니, 죽는다고 해도 그리 아쉽지 않아. 철 형님, 나는 곧 내 어머니와 함께하러 가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어. 난 당시 내 어머니를 해친 사내가 누군지 반드시 알고 싶어. 내 어머니의 삶도, 나의 삶도 망가트린 그놈을. 철 형님, 만약 내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형님이 나 대신 그 답을 찾아줬으면 해.’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화서는 아직도 제 출신을 포기하지 못했구나.”
그러고는 정철의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나는 화서를 살리고 싶어.”
정철은 정미가 말을 이어가길 조용히 기다렸다.
정미가 손을 뻗어 푸른 뱀 모양의 팔찌를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이건 화서가 내게 준 거야. 이걸 낀 뒤로 왠지 마음이 계속 무거워. 화서한텐 잠시 보관해주는 거라 했어. 최대한 빨리 팔찌를 돌려주려면, 화서를 최대한 빨리 치료해야 해. 그렇지, 오라버니?”
정미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기에 화서의 마음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화서는 몸이 약한 탓에,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친한 여자라곤 정미뿐이었다. 이 나이쯤 되면, 남매의 정 외에 남녀로서의 호감이 어렴풋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미는 늘 친남매처럼 지내왔던 화서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떠나는 걸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다. 화서는 진정한 사랑도, 심지어 소리 내어 크게 웃어보는 것도, 제멋대로 뛰어다녀보는 것도 겪어보지 못한 소년이었다.
정미가 솔직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내가 늘 화서에게 복용하게 했던 배원부는 간소화한 부수야. 화서의 몸이 더는 악화되지 않게끔 유지하는 정도의 효과만 있었지. 하지만 진짜 배원부는 화서의 타고난 체질을 치료할 수 있어.”
정철이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차분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복잡한 감정을 숨긴 채 물었다.
“그 진짜 배원부를 만들면, 네 몸이 상할 수도 있구나?”
정미의 몸이 살짝 떨렸고 이내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응.”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정미가 다가와 정철의 몸에 기댔다.
“오라버니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진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오라버니를 속이고 싶지 않아. 난 오라버니의 힘든 일도, 나의 힘든 일도, 속이지 않고 함께 해결해나가고 싶어.”
정철이 정미를 껴안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널 막아.”
정미는 한참 동안 정철의 품에 안겨 있다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오라버니, 아직 할 말이 남아있어.”
정철의 따스한 눈빛을 마주하자, 정미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배원부는 만드는 데 기운을 많이 쏟아야 해. 그러니까 매번 부수를 만들기 전후로 닷새 정도는…… 얌전히 지내줘.”
“알겠어.”
정철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 * *
궁으로 돌아온 뒤, 정철은 며칠 동안 매일 밤마다 서재에서 쉬었다.
태후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태후가 창경제를 불러 상의했다.
“고작 며칠 됐다고, 신혼부부가 어찌 벌써 따로 잔다는 말입니까?”
아들의 부부관계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창경제는 왠지 쑥스러워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말다툼이라도 한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요. 애가가 보기엔,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낮에는 아주 화기애애하게 지내던걸요.”
“그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모후.”
태후는 창경제에게 눈을 부라리며 ‘이거 바보 아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신혼부부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데, 밤에 함께 자지 않는다니요! 황상,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창경제는 잠시 멈칫하더니, 생각할수록 두려워져 식은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아직 적황손도 보지 못했는데, 우리 아들이 벌써 여인에 대한 흥미를 잃은 건가?’
“짐이 명을 내려 태자의 동궁을 채워볼까요? 어쨌든 관례대로라면, 태자의 동궁엔 양제 둘, 양원(良媛) 여섯, 승휘 열, 소훈(昭訓) 열여섯, 봉의(奉儀) 스무 네 명이 있어야 하니까요. 허나 지금 동궁엔 태자비 외에 아무도 없으니 말입니다.”
창경제의 제의에 태후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만약 태자가 정말 여인을 원하지 않는 거라면, 황상이 동궁을 채우셔 봤자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그럼 모후께선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경이가 태자비에겐 유달리 잘 대해주는 걸로 보이니, 동궁을 채우는 것보다 차라리 두 사람의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황상, 우선 업무를 마저 보세요. 애가가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사실 태후에게는 생각해둔 방법이 있었다.
‘대혼 이후 며칠 동안은 태자와 태자비가 동침하였으니, 태자가 여인을 원하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새로운 맛을 보았으니, 정력에 도움 되는 탕약 같은 걸 보내면 효과가 있겠지. 흠, 탕약의 전달은 궁녀에게 맡겨야 할까, 아니면 내시에게 맡겨야 할까? 궁녀를 보내면 태자를 유혹할까 걱정이고, 내시를 보내면…… 태자가 유혹할까 걱정이고.’
태후는 점점 복잡해졌다.
* * *
밤이 되자, 청아한 외모의 소궁녀가 찬합을 들고 태자의 서재로 왔다. 입을 열자, 유치가 빠지고 아직 영구치가 나지 않은 텅 빈 앞니가 드러났다.
“태자 전하, 태후께서 탕약을 보내오셨습니다.”
여덟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궁녀는 자녕궁의 신분을 나타내는 패를 꺼내 정철에게 보였다.
정철이 살짝 허리를 굽혀 웃으며 말했다.
“놓고 가거라. 본궁 대신 태후께 감사 인사를 전해드리고.”
소궁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태자 전하, 소인이 그릇을 다시 가져가야 합니다.”
정철은 이 정도로 어린 소녀를 차마 내칠 수 없어 그릇을 들고 탕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소궁녀가 빠진 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소인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서재가 조용해지자, 정철은 아무 책이나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태후가 보낸 탕약에 문제가 있었나?’
눈치 빠른 정철은 빠르게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고, 신체의 변화에 따라 그 탕약의 용도를 확신하게 되었으나, 태후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몸은 점점 더 달아올라 오장육부가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제 막 남녀의 정을 맛본 사내는 더욱 이 느낌을 참아낼 수 없었다.
정철은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서재를 나와 정미의 방을 잠시 쳐다보더니 욕당(浴堂)으로 향했다.
동궁의 욕당은 서북쪽 모퉁이에 있었고, 안에는 큰 욕탕이 하나, 작은 욕탕이 하나 있었다. 큰 욕탕은 귀인들이 명을 내리면 바로 물을 채울 수 있도록 비어있었고, 작은 욕탕은 동궁의 주인이 언제든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따뜻한 물이 채워져 있었다.
“이 물을 냉수로 바꾸거라.”
정철이 욕당을 관리하는 궁녀에게 명했다.
궁녀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태자의 명에 따라 따뜻한 물을 차가운 물로 바꿔 채웠다.
궁녀를 내보낸 뒤, 정철은 빠르게 옷을 벗고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뒤, 정철이 쓴웃음을 짓더니 벌떡 일어나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다시 명을 내렸다.
“여봐라, 새 물을 채우거라.”
궁녀 두 명이 나무통을 들고 들어와 다시 물을 채운 뒤 조용히 물러났다.
정철은 다시 차가운 물 안으로 들어가 머리끝까지 냉수 안에 몸을 담갔다.
이때,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작지만 머뭇거리는 발소리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정철이 등을 진 채 담담하게 말했다.
“나가거라.”
발소리가 멈칫하더니, 더 이상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나가라. 본궁은 목욕 시중을 받지 않으니.”
정철은 상대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궁인의 체면을 생각해 여지를 남겨주었다.
전 태자와는 달리, 정철의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은 많은 궁녀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정철의 완곡한 거절은 궁인에게 있어 약간의 희망을 가지게 했다.
“전하―”
여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철은 상대가 누군지 깨닫고 여전히 등을 진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완수, 여긴 어쩐 일이냐? 여긴 네 관리 범위가 아닌 걸로 알고 있거늘.”
완수는 사내의 꼿꼿하고 매끄러운 등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용감하게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려 했다.
“전하, 소인이 시중을 들게 해주십시오.”
전 태자가 폐위되고 새로운 태자가 동궁에 입주하자, 동궁의 궁인들은 모두 새 사람으로 바뀌었다.
완수는 태후 쪽에서 보낸 사람이기에, 여관들 중 지위가 가장 으뜸인 궁인이었다. 때문에 동궁의 소식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 며칠 동안 태자비마마와 합방하지 않고, 냉수로 목욕까지 하시다니. 분명 태자비마마와 다투신 것이겠지. 동궁엔 다른 비빈이 없으니, 이 이유가 분명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완수는 단 한 번도 기회를 틈타 제 신분을 상승시킬 망상 따위 하지 않았다. 단지 완수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은 사내가 하필이면 태자였을 뿐이었다.
완수의 손끝이 정철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정철이 휙 뒤돌더니 손바닥으로 욕탕 안의 물을 내리쳤다.
차가운 물이 완수의 얼굴에 뿌려졌다.
완수는 얼굴을 가리고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 틈에 정철은 욕탕에서 휙 나와 옆에 놔뒀던 옷을 몸에 걸쳤다.
바깥에 있던 궁녀들이 비명을 듣고 얼른 들어오자, 하의는 연두색 치마만 입고 상의는 노란 배두렁이만 걸친 채 새하얀 등을 드러내고 있는 완수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자태의 미인이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고 있음에도, 정철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여유롭게 옷고름을 여미고 있었다.
“태자 전하―”
어느 궁녀가 용기를 내어 정철을 불렀다.
정철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욕당의 관리를 맡은 궁인과 여관 완수는, 함께 태자비를 찾아가 벌을 받거라.”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바꾸었다.
“여관 완수는 태자비에게 가지 말고, 본궁을 따라오거라.”
‘완수는 자녕궁에서 보낸 궁인이고, 미미는 아직 어리니까 처벌을 너무 가볍게 할 수도, 너무 심하게 할 수도 없지. 차라리 내가 처리하는 게 낫겠어.’
정철은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고, 완수는 황급히 옷을 두르고 불안한 마음으로 정철을 따라나섰다.
정철이 자녕궁 방향으로 걸어가자, 완수의 낯빛이 크게 변하더니 그제야 후회하기 시작했다.
“전하―”
완수는 멈춰 서서 애원하는 눈빛으로 지척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하늘에 뜬 밝은 달처럼 포근하고 은은한 후광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달빛이라도, 어떤 이에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갑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정철이 뒤돌아섰다.
완수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태자 전하, 소인이 죄를 저질렀습니다. 앞으로 다신 이러지 않을 테니, 제발 소인을 자녕궁으로 데려가지 말아주십시오. 전하와 태자비마마께서 제게 어떤 벌을 내리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태자비라면, 태후의 체면을 고려해서 내게 큰 벌을 내리진 않을 거야.’
정철은 차가운 눈빛으로 완수를 쳐다봤다.
‘가장 처음으로 내게 접근한 여인이니, 본보기로 마땅한 벌을 내려야 다른 궁녀들도 헛된 마음을 품지 않겠지. 미미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은데, 이런 의미 없는 일에 조금의 시간도, 감정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어야 앞으로 더 이상 소란이 일지 않을 거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람을 불러 너를 끌고 가게 하겠다.”
완수는 정철의 뒷모습을 쳐다보았고, 그곳에서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아 순순히 정철의 말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