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대혼
대량 황태자의 납비(納妃) 의식은 아주 성대하고 장중하게 치러졌다.
대혼이 치러지는 동안 옷을 몇 벌이나 갈아입었는지, 가마를 몇 번 오르내렸는지 정미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신혼방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가슴 가득했던 기대감과 기쁨은 피곤함으로 뒤바뀐 뒤였다.
정미는 그저 당장 봉관(鳳冠)을 벗고 침상에 뒹굴며 뻐근한 몸을 풀고 싶었지만, 동궁 안팎에서 수많은 눈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으니 도저히 편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때 어느 여관이 조용히 들어오더니, 손에 든 작은 찬합에서 간식을 한 접시 꺼내고는 몸을 숙여 정미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태자비마마, 간식으로 요기 좀 하세요.”
정미는 눈을 들어 봉관 너머로 여관을 한 번 쳐다봤다.
여관은 왠지 긴장되어 몸을 피해 간식을 옆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겁니다. 드셔도 예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정미는 간식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분히 물었다.
여관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소인의 이름은 완수입니다. 동궁의 관리인 여관입니다.”
“알겠다. 넌 이만 물러나 보거라. 환안과 화미에게 내 시중을 들라 전하고.”
태자비는 관례에 따라 두 시녀를 궁에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예.”
완수는 빠르게 정미를 훑어보았다. 봉관의 반짝이는 붉은 구슬 너머로 태자비의 아리따운 외모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자 최근 조용히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작은 발소리가 들려온 뒤, 환안과 화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 아니, 태자비마마. 소인을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환안이 기쁜 표정으로 탁자에 놓인 간식을 흘끗 쳐다보더니 물었다.
“시장하셨어요?”
“방금은 어디 갔었어?”
“방금 저분이 소인과 화미에게 축하주를 마시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화미가 작게 말했다.
“소인과 환안은 태자비마마의 시중을 들 생각이라, 여태 술을 마시지 않았거든요. 근데 저 여관이 황궁에는 규칙이 있으니 본인이 마마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소인은 황궁의 규칙을 잘 모르니까, 혹시라도 마마께 누가 될까 봐 계속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미가 웃었다.
“괜찮아. 난 내 침실 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게 싫어. 너흰 이 규칙만 기억하면 돼.”
‘나보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 해도 좋아. 어쨌든 난 낯선 사람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으니까. 앞으로 내가 동궁의 여주인이니, 문제가 되지 않는 선상에선 편하게 살고 싶어.’
“알겠습니다.”
화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환안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고는 간식을 정미 앞으로 바쳤다.
“마마, 좀 드세요. 작은 간식이라 화장이 망가지지 않을 거예요.”
태자의 대혼례는 아주 복잡했기 때문에, 주인공 중 하나인 태자비는 중간에 볼일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정미는 새벽부터 일어나 단장을 마친 뒤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고, 종일 고생했으니 목마르고 배고픈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물 한 잔을 내어줘.”
환안과 화미의 시중을 받으며, 정미는 한 번에 두 잔의 물을 들이킨 뒤, 접시의 간식을 깨끗이 비웠다. 이후 입가심을 하고 손을 씻자 그제야 조금 힘이 났다.
화미가 작게 말했다.
“마마, 시간이 되었으니 소인들은 우선 물러나겠습니다.”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본인의 작은 숨소리만 들려오자, 정미는 그제야 조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이따 오라버니가 들어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정미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주먹을 꽉 쥐었다.
문이 살살 열리자, 굵고 큰 용봉(龍鳳) 화촉이 바람에 흔들렸다.
익숙하고 상쾌한 체취와 술 냄새가 정미를 둘러쌌다.
정철은 아무 말 없이 화려한 차림의 신부를 내려다보았다.
정미 또한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정철의 깊은 눈동자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정미는 늘 정철에게 무법천지처럼 제멋대로 굴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 오라버니가 아닌 태자이자 부군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제 앞에 서있으니 왠지 긴장이 되었다.
정미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혀끝을 살짝 깨물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오라버니, 배고프진 않아?”
정철이 멈칫했다.
“내가 간식을 다 먹어버렸네. 오라버니 걸 남겨둬야 했는데―”
정미가 제 허벅지를 꽉 꼬집으며 생각했다.
‘내가 지금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람!’
정철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웃음 덕분에, 방 안에 흘렀던 미묘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풀려버렸다.
정철이 정미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배부르게 먹었어?”
정미는 왠지 얼굴이 달아올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위에서 익숙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제 씻고 자자.”
태자의 대혼은 평범한 혼례와 달리, 전 안에서 사회자와 여관의 안내를 받으며 합근주(合巹酒)를 마셔야 했는데, 두 사람은 이 절차를 생략했다.
일주향 후, 두 사람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침상 위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는 서로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정철이 정미를 가볍게 껴안았다.
“이제 쉬자.”
진홍색의 휘장이 층층이 내려왔다. 정미는 정철의 팔베개를 베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 이렇게 그냥 잔다고?’
정미가 조용히 몸을 뒤척였다.
정철이 가볍게 숨을 들이켜더니 정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피곤하지 않아?”
옅은 술 냄새와 뜨거운 숨결이 뺨에 닿자, 정미는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코앞의 사내를 빤히 쳐다보며 정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원래는 엄청 피곤했는데, 간식도 먹고 오라버니를 보니까 갑자기 안 피곤하네.”
정철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정미의 귓가로 다가와 속삭였다.
“피곤하지 않다면, 부부가 해야 할 일을 할까?”
정미는 대답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정철이 가까이 다가오자, 정미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정미의 입술에서 한참을 뒤얽혔다. 정미가 저도 모르게 정철의 어깨를 감싸 안았을 때, 정철은 움찔 몸을 떨더니 그제야 더 아래로 내려갔다.
옷이 한 겹씩 벗겨졌고, 정미는 마치 처음 꽃망울을 터트린 꽃처럼 부드럽고 풋풋한 모습으로 햇살과 이슬을 기꺼이 맞이하고 있었다.
겹겹이 둘러싼 진홍색 휘장은 산들바람에 잔잔한 물결이 이는 호수처럼 찰랑였다.
화촉의 촛농이 한 줄씩 흘러내렸고, 촛불이 춤을 추듯 흔들리며 휘장 안에 뒤엉킨 두 사람의 모습을 어렴풋이 비추었다.
밤은 고요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지만, 휘장만은 계속 흔들리며 두 사람의 숨소리와 낮은 신음을 밖으로 흘려보내 창밖에서 조용히 둘을 엿보던 반달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먹구름이 달을 가렸을 때, 휘장 안은 마침내 잠시 조용해졌다.
“오라버니?”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청겸―”
정철은 정미를 품에 껴안고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주었다.
“일찍 자. 내일도 바쁠 테니.”
“응.”
정미는 환안을 불러 목욕 시중을 들게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몸을 뒤척이다가 순간 놀라 움찔했다.
방금 겨우 익숙해진 물건이 다시 정미를 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미는 그제야 깨달았다. 늘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 왜 먼저 목욕 얘길 꺼내지 않았는지.
“피곤해?”
정철이 정미의 귓가에 웃으며 속삭였다.
그렇게 휘장은 아침이 밝을 때까지 흔들렸다.
* * *
“태자 전하와 태자비마마께선 아직도 기침하시지 않았나요?”
여관 완수가 초조한 듯 문을 지키고 있는 환안에게 묻자, 환안이 고개를 저었다.
완수가 환안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려하며 말했다.
“환안, 더 이상 늦으면 안 됩니다. 시간이 다 되었어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환안이 손을 뻗어 완수를 막았다.
“태자비마마께서 낯선 사람을 방에 들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저는 여관입니다.”
완수의 말투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나왔다.
이때 문이 삐걱대며 열렸고, 평복을 입은 정철이 입구로 나와 완수를 쳐다보았다.
완수가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전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면복(冕服)으로 환복 하셔야 합니다. 태자비마마의 적의(翟衣)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알겠다. 환안에게 넘겨주면 된다. 태자비는 낯선 사람이 제 방에 들어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니, 네가 다른 궁인들에게도 일러두거라. 앞으로 주의하고.”
정철은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완수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젯밤은 원래 관리인 여관인 완수가 숙직을 맡는 게 옳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숙직을 맡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수는 차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침이 밝을 때까지 깨어 있었던 것이다.
밤새 뜨겁고 농밀한 소리가 어렴풋이 귓가에 들려왔고, 완수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끼며 머릿속으론 자꾸 온갖 생각을 했다.
‘태자 전하처럼 차가운 사람이, 어젯밤엔―’
완수는 조용히 태자와 태자비가 오늘 입어야 할 예복을 가지러 가다가 친한 궁녀에게 붙잡혔다.
“완수 언니, 어젯밤은 어땠어요?”
궁녀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황궁에서 몇 년이나 지낸 여인은 세상 물정을 겪지 못했더라도 평범한 아가씨보다는 아는 게 더 많기 마련이었다.
삭막하고 조용한 심궁의 궁녀들은 당연히 풍채가 준수한 태자에게 열렬한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절대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몰래 뒤에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했다.
완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린 녀석이 갈수록 대담해지는구나. 어찌 그런 걸 물어?”
궁녀가 완수를 잡아당겼다.
“언니, 말해주세요. 태자 전하께선 얼마나 대단하신가요? 몇 번이나 물을 길어오라 하셨죠?”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비밀스럽게 말했다.
“부부의 예를 치르고 나서, 몸을 씻어야 한다고 들었어요.”
‘물은 한 번만 길어오라 하긴 하셨지만, 침전 안의 움직임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지. 하지만 이 어린 녀석에게 그걸 말해줄 순 없어.’
* * *
정철이 창문을 열자, 신선한 공기가 밀려들어와 방 안에 은은하게 남은 농밀한 분위기를 흩어지게 했다. 정철은 그제야 침상 앞으로 걸어가 몸을 숙여 정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미미, 일어나야 해.”
피곤한 정미가 무의식적으로 정철을 밀쳐내고 뒤돌아 누웠다.
아직 날씨가 추워지기 전이라 정미는 얇은 면 이불만 덮고 있었는데, 이렇게 뒤돌아 누우니 뽀얀 등과 봉긋한 엉덩이가 선명히 드러났다.
정철의 눈빛이 순간 굳더니, 조용히 숨을 들이켜 다시 밀어 오르는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러고는 침상 머리맡에 있던 속곳을 정미에게 단정히 입혀주었다.
정미는 게으르게 팔을 뻗어 정철의 팔에 걸쳤다.
“미미―”
정철은 어이없으면서도 그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져, 정미의 귓가로 몸을 숙여 귓불을 살짝 깨물고는 작게 경고했다.
“계속 이러면, 또 할 거야.”
“뭘?”
비몽사몽한 정미가 중얼거렸다.
엉덩이에 어떤 물건이 조용히 닿자, 정미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나 당황하며 말했다.
“안 돼, 안 돼. 또 하면 나 진짜 큰일 나.”
정철은 뒤로 물러나 정미에게 속곳을 입혀주며 따뜻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 나도 이 녀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
정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어젯밤의 장면이 떠오르자 정철의 눈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부드럽고 진중한 오라버니가, 어젯밤에 나를 그렇게 괴롭힐 줄이야. 책자에서 봤던 그림은 다 진짜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