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혼전 교육
승평 27년의 가을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가을이었다.
회인백부가 몰락했고, 체포된 유왕은 봉호를 빼앗겨 천민이 되었으며 당일 밤 그의 희첩까지 모두 죽게 되었다. 그리고 오직 정동과 용훤만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위국공 세자 한지는 지병이 재발하여 몸이 허약해지자 자진해서 세자 자리를 포기했고, 그 지위는 위국공이 양자로 들인 한평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소란들은 당연히 수도 백성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화제의 중심에 있는 당사자들은 당연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다행히 수도엔 그들의 관심을 돌릴 만한 큰 경사가 예정되어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자의 대혼이었다.
신부에게 혼인 선물을 주는 날, 정미는 경왕세자비 증 씨와 함께 온 작은 패왕 용흔을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오랜만에 본 용흔은 키가 커져 있었고, 살도 조금 빠져있었다. 조금 초췌해 보이는 면도 있었지만, 예전보다 훨씬 진중해 보였다.
용흔은 최고급 비취 팔찌 한 쌍을 정미에게 쥐여주며 작게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정가 둘째 형님일 줄은 몰랐네.”
정미는 팔찌를 건네받고 명랑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용흔이 고개를 숙였다.
“만약…… 형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널 궁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다. 넌 성질이 나쁘니까 참고 살수도, 당하고 살 수도 없으니, 황궁에서 한 달도 못 견딜걸.”
“알고 있습니다. 둘째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저도 절대 궁에 가지 않았을 거예요.”
정미는 이런 모습의 용흔에게 다소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용흔의 성장에 기쁘면서도 왠지 미안함을 느꼈다.
‘용흔이 상처를 받아 성장한 거라면, 내가 그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늘 벗으로 남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용흔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어쨌든 궁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형님이 지금은 태자라 해도 난 널 도우마.”
그러고는 정미를 빤히 한 번 쳐다보더니 뒤돌아 나가버렸다.
점점 청년 태가 나는 뒷모습엔 여전히 소년의 패기가 남아있었고, 정미는 그 모습을 보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용흔은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니까. 언젠간 좋은 아가씨를 만날 거야.’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대혼 전날 밤이 되었다.
형무원으로 들어온 한 씨는 아직도 책을 읽고 있는 정미를 보며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책을 빼앗으며 나무랐다.
“지금이 어느 땐데, 책이나 보고 있어!”
‘평범한 아가씨라면 대혼 전, 긴장하고 불안해해야 하지 않나? 설마…… 정미는 늘 철이를 오라버니로만 봐서,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한 씨는 가슴이 아파 와 정미의 손을 잡고 한숨을 쉬었다.
“미야, 네가 궁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걸 안다. 이 혼사로 네가 고생하겠구나.”
정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전 괜찮아요.”
‘세상 사람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오라버니와 혼인할 수 있는데,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다고?’
“그럼 너는 철이를…… 어찌 생각하고 있니?”
한 씨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정미가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오라버니는 세상에서 제게 가장 잘해주는 사람이에요. 오라버니와 혼인할 수 있다니 안심이지요.”
“억울하진 않니?”
한 씨의 눈에 정미는, 국공부와 태자의 특수한 운명 때문에 평생의 행복을 희생한 가여운 여자애로만 보였다.
정미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조금 귀엽다고 느껴져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같은 사내에게 시집가는데, 세상 그 어떤 여인이 억울해하겠어요?”
한 씨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지만, 아직 중대한 임무가 하나 남아있음이 떠오르자 골치가 아파졌다.
한 씨가 머뭇대며 가만히 앉아있자, 정미가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음…….”
한 씨가 마른 입술을 꾹 다물었다.
“미야, 내일이면 대혼을 치르니 이제 진짜 어른이 되는 게다. 태자와 서로 존중하며 지내고, 더 이상 성질대로 굴어선 안 돼.”
“걱정 마세요. 알고 있어요.”
한 씨가 또 우물쭈물 대자, 정미가 웃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편하게 하셔도 돼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듯이, 이제 저도 어른이니까요.”
한 씨는 민망한 표정을 한 채 황금색 천으로 감싸진 작은 책자를 품에서 꺼내들더니 어색하게 풀며 말했다.
“미야, 여인이 혼인한 뒤론 대를 이을 책임을 지게 된단다. 너무 두려워 말렴. 모든 여인이 겪어야 할 관문이란다.”
그러고는 두 뺨을 붉히며 황급히 책자를 정미에게 쥐여주었다.
“우선 한번 살펴보거라. 만약…… 큼큼,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아도 된다.”
정미가 책자를 건네받으며 웃었다.
“제가 화본을 좋아하는 걸 어머니도 알고 계실 줄이야.”
정미는 아무렇게나 책자를 펼쳐보았고, 순간 멈칫하더니 한참 뒤에야 한 씨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음, 무슨 뜻인지 알아보겠니?”
정미는 왠지 이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책자를 넘기고 말을 더듬었다.
“내가 알려주마. 여길 보렴. 왜 허리 밑에 부드러운 베개를 넣는지 알겠니? 이렇게 하면 회임에 도움이 된단다.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점이지……. 미미, 듣고 있니?”
정미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듣고 있어요. 근데 그림이랑 어머니의 설명이랑 달라서요. 저는 그림만 보고 이 사람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이 사내가 일으켜 세워주는 건 줄 알았거든요.”
환안이 천신만고 끝에 뺏어온 책에 비해서는 너무 추상적인 장면이라, 정미는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딸이 방긋 웃으며 책자의 사내를 가리키자, 한 씨는 기분이 복잡해졌다.
‘부끄럽지도 않나? 완전히 못 알아본 건가, 아니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건가? 못 알아본 거라면, 지금 당장 자세히 가르쳐줘야 할 텐데, 만약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거라면…… 엉엉, 차라리 못 알아보는 게 낫겠네!’
한 씨가 잠시 넋이 나간 사이, 정미는 책자를 아무렇게나 몇 번 넘겨보더니 투덜댔다.
“책에 그려진 사람들이 너무 못생겼어요. 화공이 누군가요?”
‘어쩐지 환안이 구해온 책은 다들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라더니. 역시 싼 게 비지떡인가 보군.’
한 씨가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정미는 책자를 든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한 씨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미야, 자세히 살펴보고 있거라. 나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마. 모르는 게 있으면…… 큼, 앞으로 천천히 알게 될 게다.”
도망치듯 떠나가는 한 씨의 뒷모습을 보며 정미는 고개를 휘휘 젓더니 침착한 표정으로 책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렇게나 옆에 내려놓더니, 문득 어떤 생각을 했다.
‘이 책자엔 그네 그림이 없잖아? 여러모로 부족한 책이로군.’
예전에 보았던 생생한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정미는 얼굴이 달아올라 그제야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들었다.
* * *
태자의 동궁 곳곳이 초롱과 오색 천으로 장식되어있었다.
정철이 천천히 방문을 나섰다.
수려한 외모의 여관이 팔각 유리 궁등을 들고 다가왔다.
“태자 전하, 소인이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괜찮다.”
정철은 따뜻하게 웃고는 곧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관은 궁등을 꽉 쥐며 소나무처럼 꼿꼿한 태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어떤 궁녀가 다가와 팔꿈치로 여관을 툭툭 치며 작게 웃었다.
“완수(婉秀) 언니, 내기에서 졌죠? 어서 돈 내요. 제가 말했잖아요. 태자 전하는 남들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 같아도 사실 자세히 보면 우리 궁녀들에게 냉담하시다고요. 끝까지 안 믿더니.”
“난 그냥 길을 안내하려던 것뿐이야.”
완수가 중얼거렸다.
“어쨌든 내기는 진 거예요. 완수 언니, 어리석은 짓 하지 마세요. 태자 전하는 황태자이시고, 우리는 궁녀일 뿐인걸요. 괜한 욕심은 접어야 해요.”
궁녀는 완수를 데리고 떠나갔다.
정철은 궁녀들의 내기 거리가 된 줄도 모른 채, 오색 천과 비단꽃이 걸린 나무들을 지나 자녕궁으로 향했다.
“태후마마,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궁녀의 보고에 태후가 기뻐하며 대답했다.
“어서 들라 하라.”
정철이 성큼성큼 걸어와 공손히 예를 갖췄다.
“황조모님을 뵙습니다.”
“내일이면 대혼을 치러야 하거늘, 어찌 일찍 쉬지 않고?”
“내일이면 혼인을 해야 하니, 그 전에 황조모님과 모후를 다시 뵈러 왔지요.”
태후의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졌다.
“역시 경이는 효성스럽구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시간이 흘러서야 태후가 말했다.
“시간이 꽤 늦었으니, 어서 황후를 만나고 오거라. 일찍 돌아가도록 하고.”
정철은 일어나 황후에게로 향했다.
발소리가 들려오자, 풍 황후가 고개를 돌렸다.
정철은 황후 곁으로 다가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모후, 내일 제가 대혼을 치릅니다.”
황후의 손이 멈칫했다.
정철은 눈을 내리깔고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어릴 때부터 제가 정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제 친어머니가 어떤 분이실지, 수없이 생각해왔었지요.”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황후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모후께선 제 상상속의 모습과 똑같으십니다.”
황후의 속눈썹이 잘게 떨리더니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떨어졌다.
정철은 황후에게 기대며 이어서 말했다.
“어머니, 미미를 알고 계시지요? 제가 가장 방황하던 시절, 저를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사람입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여인이지요. 그런 여인이 내일이면 제 아내가 됩니다. 어머니께서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더라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깨어있으셨다면, 분명 함께 기뻐해주셨겠지요.”
정철은 황후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이 정철의 머리에 떨어졌다. 황후는 손을 들어 정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기쁘단다.”
정철이 고개를 휙 들었다.
“어머니, 깨어나셨군요!”
정철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애써 진정시켰다.
사실 얼마 전부터, 황후가 깨어났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무의식적인 반응과 세세한 부분을 자세히 관찰해보자면 환자와 다른 부분이 확연히 보였기에, 아무리 숨긴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특히 황후는 제 친아들을 볼 때 더욱 티가 났다.
오늘 정철이 이와 같은 말을 했던 이유는,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기도 했지만 황후의 상태를 확인해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미친 척하는 건 정말 미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기에, 정철은 어머니가 계속 이렇게 지내길 원치 않았다. 최소한, 친아들인 제 앞에서만큼은 굳이 숨기지 않길 바랐다.
황후는 손을 뻗어 정철을 껴안고 흐느끼며 말했다.
“경이가 대혼을 치른다니, 어미는 정말 기쁘구나. 아주 기뻐.”
“모후, 깨어나셨으면서 어찌―”
황후는 따스한 눈빛으로 정철을 쳐다봤다.
“어머니라 부르는 게 더 듣기 좋구나. 모후는 너무 차가워.”
“어머니.”
황후가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깨어난 건 맞지만, 네 부황을 용서하기 싫어서 그랬단다. 나를 20여 년간 고생시켰는데, 그가 황제라는 이유로 다시 부부로 공경하며 지낸다는 건 내키지 않구나. 네 부황 앞에선 이렇게 지내는 게 더 편하단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아내 앞에선 굳이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황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황태자 용경이 태자비를 친영(*親迎: 중국의 혼인의례인 육례 중 하나로 신랑이 신부집에서 신부를 맞아와 자신의 집에서 혼인을 진행하는 절차)했고, 수도 사람들 모두가 거리로 나와 그 모습을 구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