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새로운 세자
한지의 거처에서 일어난 소란은 형무원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한 씨는 이혼 후 친가로 다시 돌아온 처지였기에, 하인들은 이런 큰일을 한 씨에게 보고할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형무원의 중앙 뜰, 등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한 씨는 반쯤 만든 신발창을 내려놓고 걸어 들어오는 설란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잠들었느냐?”
“아니요. 방 안의 불이 아직 켜져 있습니다.”
한 씨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짜증을 냈다.
“요즘 도대체 왜 그렇게 책에 매달리는지. 몸을 해치면 어쩌려고!”
설란이 따라나서자, 한 씨가 고개를 돌렸다.
“따라올 필요 없다. 그저 이야기를 나누러 가는 것이니.”
정미는 형무원의 과원(跨院)에 머물렀다. 한 씨는 월량문(月亮門)을 지나 곧장 정미의 거처로 향했다. 방 안엔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정미는 책을 한 권 들고 집중해서 보다가는 피곤한 듯 수시로 눈을 비비적대는 중이었다.
한 씨가 다가가 잽싸게 책을 빼앗았다.
“어머니―”
정미는 눈을 끔뻑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한 씨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느냐. 밤에는 책을 보지 말라니까! 젊은 나이에 눈이 상하면 어쩐단 말이니? 이러다 시집갈 때 신부 눈 밑이 새파랗게 되어있으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다!”
정미는 정철의 상황을 알릴 수도 없었고, 한 씨의 잔소리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기에, 얌전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안 볼게요. 지금 바로 잘 테니 어머니도 어서 돌아가 쉬세요.”
한 씨가 정색했다.
“그럼 바로 자야 한다. 또 밤새워 책을 읽는 걸 들키면 내 방으로 옮겨 지내게 할 테니.”
“네.”
한 씨가 나간 뒤, 정미는 하품을 하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환안이 미리 침상 위에 이불을 예쁘게 펴놓았기에, 정미는 곧장 신발과 옷을 벗은 뒤 침상 휘장을 내렸다.
그때 갑자기 비명이 들려오자, 정미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환안, 무슨 일이야?”
맨발로 달려온 환안은 막 잠에서 깬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밖에서 난 소리 같은데, 소인이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정미는 급히 겉옷을 걸치고 침상 머리맡의 서랍에서 비수를 꺼내든 뒤 달려 나갔다.
처마 밑의 붉은 등롱이 작은 과원을 환히 비추고 있었고, 한 씨는 산발이 된 여인을 붙잡고 발길질을 해대는 중이었다.
찌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겉옷이 찢어지고 뽀얀 어깨가 드러났다.
화미가 히익 하고 놀라더니 급히 정미의 시야를 가리며 화를 냈다.
“어디서 온 미친 여자야? 속옷도 입지 않았다니! 아가씨의 눈을 더럽힐 뻔했잖아!”
환안이 앞으로 나서려다가, 용맹한 한 씨의 모습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씨는 여인을 걷어차 쓰러트린 뒤 침을 퉤 뱉었다.
“감히 내 딸을 해치려 하다니, 네가 누군지 확인해봐야겠다!”
한 씨는 앞으로 다가가 여인의 헝클어진 머리를 넘겨보더니 놀란 채 중얼거렸다.
“정요?”
그 틈을 타, 정요는 매서운 눈빛을 한 채 교도를 들어 한 씨에게 휘둘렀다.
“어머니, 피하세요!”
정미가 놀라 소리쳤다. 형무원으로 달려오던 한평은 정미의 목소리를 듣고 다급히 안으로 돌진하며 크게 외쳤다.
“정미, 괜찮아?”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교도를 든 정요의 손이 멈칫했다.
한 씨는 그 틈을 타 정요를 퍽 걷어차버렸다.
과원으로 달려 들어온 한평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정요를 보자마자 급히 뒤돌아서 붉어진 얼굴로 당황하며 말했다.
“고모님, 무사하신 거죠? 정미는?”
“평 오라버니, 저흰 괜찮아요…….”
정미는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왜 정요가 겉옷만 걸치고 나를 죽이러 온 거야? 평 오라버니는 대체 왜 왔고?’
“무사하면 됐어. 그럼 다행이야.”
한평은 차마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방금 봤던 상황이 계속 떠올라 얼굴이 뜨겁기만 했다.
“다들 뭐 하느냐. 어서 이 천한 것에게 옷을 걸쳐주거라!”
한 씨가 시종들을 노려봤다.
화미가 옷을 들고 한 씨에게 걷어차여 정신을 못 차리는 정요에게 둘러줬을 때,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작은 과원에 많은 사람이 들이닥쳤다.
“넷째야, 이게 무슨 일이니?”
한 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넷째 나리가 사방을 둘러봤다.
“큰누님, 맹 씨가 여기 있습니까?”
한 씨가 입을 삐죽였다.
“자, 저기 있지 않느냐. 넷째야,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
넷째 나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말하자면 깁니다! 큰누님, 우선 저 애를 묶어 어머니께 보낸 뒤 다시 말씀드리지요.”
순식간에 정요는 완벽히 묶이게 되었다. 그렇게 넷째 나리의 주시 하에 정요는 단 노부인에게로 끌려갔고, 한 씨가 그를 뒤따랐다.
“평 오라버니―”
정미가 떠나려는 한평을 불러 세웠다.
한평이 뒤돌아섰다. 귀는 여전히 붉어진 채였지만, 표정은 이미 침착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정미, 걱정하지 마. 어른들이 잘 처리하실 거야.”
정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평 오라버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없나요?”
정미의 물음에 한평의 얼굴이 다시 붉어지더니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 그건, 나중에 고모님께 직접 여쭤보는 게 좋겠어.”
한평은 이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떠나버렸고, 남은 정미는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참 뒤 한 씨가 돌아왔을 때야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정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어떻게 그런 일이!”
건청궁 안, 창경제가 노위국공의 보고를 듣고 외쳤다.
노위국공이 새빨개진 얼굴로 사죄했다.
“가문의 망신이옵니다!”
창경제 또한 면목이 없었다.
“제 어리석은 손자는 유왕을 때려 기절시켰고, 맹 씨가 휘두른 교도에 찔려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가 깨어나면 소신이 곧바로 오랏줄로 꽁꽁 묶어둔 뒤 폐하의 처리에 따르겠습니다.”
창경제가 한숨을 쉬었다.
“처리는 무슨. 따지자면 국공부도 피해자 아니오. 하지만 맹 씨가 그 녀석을 그간 숨겨주고 교도로 사람을 해쳤으니, 한지도 부군으로서 책임을 피할 순 없소. 한지는 국공부의 장자이자 적손이지만, 이번 부상으로 앞으로 건강이 어찌 될지 모르겠군. 짐이 기억하기로는, 집안에 손자들이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노위국공이 고분고분히 대답했다.
“소신의 둘째 손자 한평도 이미 혼인하여 처가 있습니다. 뛰어난 인재는 아니지만, 효성스러운 녀석이지요.”
“그럼 다행이군.”
두 사람의 간단한 대화로, 한지는 이미 세자 신분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어졌다.
노위국공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유왕을 숨겨준 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었으니, 황상의 기분에 따라 처분이 정해질 터였다.
‘다행히 장자가 아직도 변경에서 전투 중이니, 황상도 국공부를 중벌로 다스리지 못하실 테지. 한지의 세자 신분을 포기하는 건 궁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으니 되었다.’
처분이 결정되자, 노위국공은 안타까우면서도 후련해졌다.
‘확실히 지야보단 평이가 더 세자의 신분에 어울리는 편이니.’
“그래, 화 씨의 수양딸 맹 씨 말이오. 회인백부와도 관련이 있었지 않소?”
위국공부는 건들고 싶어도 건들지 못하는 상황이니, 창경제에게는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다.
정요의 진짜 신분에 대해서는 창경제도 노위국공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창경제는 위국공부에 벌을 내릴 수는 없었기에, 회인백부에게 화를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천하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쥔 황제가 근본 없는 훈귀 가문을 멸문시키는 건 그 무엇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금린위가 회인백부를 포위하고 곧장 백부의 대문을 걷어차 열었다.
정수문은 단장을 마친 뒤 조정에 나갈 준비를 하다가 몰려오는 금린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왕 대인, 이게 무슨 일이오?”
왕 대인이 칼을 쥐고 냉정하게 말했다.
“정 대인, 귀댁에서 유왕을 숨겨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지금 바로 수색에 들어갈 테니, 협조해주시오.”
왕 대인이 정수문의 어깨를 치고 지나쳐가자, 정수문이 비틀거렸다.
소란을 들은 회인백이 급히 달려 나왔다. 그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신발은 한 짝만 신은 상태였다.
“둘째야, 이게 무슨 일이냐?”
정수문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저도 모릅니다. 왕 지휘사께서 우리 집안이 유왕을 숨겨주었다고 하시더군요―”
회인백의 눈이 커졌다.
“그럴 리가! 어서 왕 대인께 말씀드리거라. 우리 집안은 유왕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정수문이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습니다. 누가 금린위를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회인백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괘, 괜찮다. 어쨌든 우리 집안엔 유왕이 있을 리 없으니.”
반 시진 뒤, 왕 대인이 금린위 한 부대를 이끌고 정수문 앞에 나타나더니 왕관을 들고 차갑게 웃었다.
“정 대인, 이 물건이 어디서 난 것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소?”
정수문은 왠지 그 왕관이 낯익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서 난 것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왕 대인이 피식 웃었다.
“정 대인, 아직도 못 알아본 것이오? 이건 유왕이 자주 쓰는 왕관이오. 방금 곁채에서 발견했소!”
“말도 안 됩니다! 왕 대인, 반드시 제대로 알아보셔야 합니다. 저희 집안은 유왕을 숨겨주지 않았습니다. 이, 이 왕관이 어디서 났는지 누가 안단 말입니까. 누군가 저희 백부를 모해하려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회인백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했으나, 왕 대인은 회인백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수문만을 빤히 노려봤다.
“정 대인, 더 할 말이 있소?”
정수문이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회인백이 발을 동동 굴렀다.
“둘째야, 왕 대인께 해명해야지!”
왕 대인은 가져온 증거물을 옆에 있던 부하에게 넘겨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바로 복명하러 가겠소. 백부 사람들은 오늘 외출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정 대인, 그럼 이만!”
왕 대인이 금린위를 이끌고 떠나가자, 백부는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어질러진 채였고, 남은 정수문은 여전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둘째야, 도대체 무슨 일이냐? 어찌 왕 대인께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게야? 왕 대인이 돌아가 황상께 아뢰면, 우리 백부는 어쩌란 말이냐!”
정수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비참하게 웃었다.
“죄를 씌우고자 마음만 먹으면, 구실이야 어떻게든 만들 수 있지요. 형님,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신 겁니까? 집안사람들에게 얌전히 있으라 전해주십시오. 그럼 황상께서 벌을 좀 경감해주실 수도 있으니.”
그리고 점심이 되기도 전에 창경제의 처분이 내려졌다.
회인백부는 유왕을 숨겨준 혐의로 작위를 빼앗겼고, 정수문은 관직을 잃고 다신 재직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회인백부의 저택을 압수하여 백부 사람들은 사흘 안에 저택을 떠나야 했다.
하루아침에 전설로 떠올랐던 회인백부는 그렇게 별똥별처럼 떨어져 백 년의 윤회 끝에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