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숨을 곳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통행 금지 시간이 가까워지자 거리엔 점점 행인이 사라졌고, 관군들만이 이리저리 순시를 다니고 있었다.
유왕은 담벼락에 기대 숨을 헐떡이다가 위국공부의 순금 문패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 여기에 도박을 걸어봐야겠군!’
한지는 한때 유왕의 반독이었기에, 어릴 적 유왕 또한 종종 위국공부에 와 놀곤 했다. 그는 가볍게 뒤로 돌아가 약간 낮은 담벼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유왕이 넘어간 곳은 구석진 곳이었고, 무성한 꽃과 나무가 심겨 있었다.
유왕은 일어나 몸에 있는 흙을 털어내고 곧바로 세자의 거처로 향했다.
수도에 있는 훈귀 가문 저택은 대부분 비슷한 구조였다.
게다가 유왕은 여기에 온 적도 있었기에, 어두운 밤이었을지라도 쉽게 원하는 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달이 이곳을 밝게 비추었고, 바람은 은은한 계화향을 머금고 있었다.
정요는 연분홍색에 노란 국화가 수놓인 평상복을 입고 정원을 천천히 거닐다가 멈춰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야윈 뒷모습이 더욱 처량해 보였다.
‘그날 이후, 한지는 이제 밤에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구나. 설마, 앞으로 평생 이곳에 갇혀 외로이 여생을 보내야 하는 건가?’
정요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때, 뒤에서 갑자기 손이 나타나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정요가 발버둥 쳤다.
“움직이지 마라, 나다.”
익숙한 목소리가 열기와 함께 귓가에 들려왔고, 정요는 곧바로 발버둥을 멈췄다.
손이 풀리자, 정요가 휙 뒤돌아섰다.
“태자 전하?”
유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태자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것이냐?”
정요는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아, 깜빡했습니다. 왕야께서 어찌 여기 계십니까?”
유왕이 정요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역시 본왕의 추측대로, 저번 시회 이후 꽤나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겠군.”
정요가 정색하며 말했다.
“저를 모욕하러 굳이 찾아오신 겁니까?”
유왕이 손을 뻗어 정요의 턱을 붙잡았다.
“못 본 새 꽤 대담해졌구나. 감히 본왕에게 대들다니?”
정요가 고개를 휙 돌리며 차갑게 웃었다.
“이 야밤에 이렇게 여기 나타나셨으니, 제가 보고 싶어 오셨을 리는 없고……. 뭔가 죄를 저질러 오갈 데가 없으신가 봅니다?”
유왕이 대로하며 정요의 뺨을 내려쳤다.
“입 닥치거라!”
정요는 뺨을 감싸 쥐고 유왕을 노려봤다.
유왕이 손을 탈탈 털고는 씩 웃었다.
“역시, 총명한 아이로구나.”
유왕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더니, 한 떨기 계화를 꺾어 정요의 귀에 꽂아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추측이 맞다. 본왕은 지금 쫓기는 신세라, 네가 숨겨주어야 한다.”
눈을 크게 뜬 정요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물었다.
“왕야, 어찌 저 같은 부녀자를 찾아오셨습니까?”
“부녀자라고?”
유왕은 이 말을 되뇌다가 피식 웃었다.
“넌 평범한 부녀자가 아니지 않더냐. 본왕은 지금 같은 상황에 너보다 더 마땅한 거처가 떠오르지 않더구나.”
정요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가 유왕을 말렸다.
“왕야, 지금이라도 돌아가십시오. 여기 계시다가 세자께서 보게 되시면 저희 둘 다 큰일 납니다.”
“하하.”
유왕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정요를 쳐다봤다.
“세자가 여길 온다고? 의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본왕은 못 속이지. 한지는 한때 본왕의 반독이었다. 나도 그 녀석을 꽤 잘 알고 있지. 네 ‘재녀’라는 명성은 옛사람들의 시를 표절해 얻은 것인데, 한지처럼 우둔하고 오만한 녀석이 너를 가까이할 리 없지. 의매, 오랫동안 독수공방하며 지내지 않았나? 마침 본왕을 숨기기에 딱 좋은 상황 아닌가?”
정요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피곤하고 배도 고프군. 얼른 나를 안으로 들이거라. 네 말대로, 누가 우릴 보기라도 하면 둘 다 큰일 날 테니.”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유왕은 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정요의 야윈 뺨을 건드렸다.
“다른 이의 시를 표절했다는 추문도 모자라 사내와 간통했다는 명성까지 얻고 싶진 않겠지?”
정요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다가, 한참 뒤에 겨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정요는 유왕에 대한 혐오감과 후회를 꾹 참고 말했다.
“우선 기다리고 계세요. 시종들을 내보내겠습니다.”
잠시 후, 유왕은 안방의 침상 위에 앉아 간식을 허겁지겁 먹었고, 다 먹은 뒤에는 정요를 놀리듯 웃었다.
“의매, 국공부는 참 너그럽군. 널 냉대하지만 음식만큼은 이리 잘 대접해주니.”
“다 드셨으면 일찍 쉬십시오. 저는 다른 곳에서 자겠습니다.”
정요가 눈을 내리깔고 말하자, 유왕이 정요를 잡아당겨 침상 위로 눕혔다.
“다른 곳은 무슨. 어차피 한지는 여기 오지 않을 테니, 본왕이 네 외로움을 달래주마.”
“으으읍, 왕야, 이러시면 아니됩―”
“쉿, 시끄럽게 굴었다간 네 시종들이 눈치챌 것이다.”
이 말에 정요의 온몸은 굳었고, 곧 발버둥을 멈췄다.
유왕은 정요의 품에 머리를 묻고 손을 들어 침상의 휘장을 내렸다.
두 사람은 날이 밝을 때까지 서로 뒤엉켜 떨어지지 않았다.
* * *
유왕부와 목은백부가 갑자기 포위 수색을 당하자, 소식을 들은 각 가문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다음 날 조정, 대신들은 모두 어두운 표정으로 얌전히 있다가 조정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흩어졌다.
창경제는 건청궁으로 돌아와 종인령(*宗人令: 종인부의 우두머리)에게 물었다.
“등안에겐 물어보았는가?”
종인령이 고개를 저었다.
“등안은 유왕의 출생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완강히 주장하였습니다.”
“화 귀비의 시중을 20년 넘게 들어왔거늘, 이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더 엄하게 고문하거라. 사실을 고하지 않으면 짐이 그놈의 구족을 멸할 것이다!”
종인령이 명을 받들고 물러나자, 창경제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유왕도 도망치고, 목은백 또한 집에 노부모와 여식구들을 남기고 도망쳤다. 더 끔찍한 건, 목은백은 도망치기 전 제 부인을 직접 목 졸라 죽였다는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려 살인으로 입막음을 하려 한 게 아니라면 이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화씨 가문의 둘째 부자는 잡혀 왔지만, 목은백과 그 출처도 알 수 없는 자식은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백 명이 넘는 목은백 가문 사람 중 아무도 당시에 일어났던 일을 모른다니!’
“각 성문을 엄격히 지키고, 수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샅샅이 수색하라. 반드시 그 두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유왕이 확실히 내 친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천한 화씨가 어찌 모두를 속였는지 사건의 경위를 반드시 알아내야겠다!’
어서재에서 나온 창경제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녕궁에 향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창경제가 손을 살짝 들었다.
“모두 일어나거라. 태후께 보고드릴 필요 없다. 짐은 황후를 보러 갈 터이니.”
그는 곧장 풍 황후에게로 향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황후는 눈만 살짝 돌려 안으로 들어오는 창경제를 흘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에서 노니는 새를 쳐다보며 까르르 웃었다.
창경제는 황후 옆에 앉아 한참 침묵하다가 뒤에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 위에 얹었다.
“진진, 짐이 미안하오. 그동안 내가 눈이 멀어 우리의 적자를 잃어버리고, 화씨 그 천한 것이 20여 년간 부귀영화를 누리게 두었소. 짐이 어리석었소. 그대도 분명 내가 원망스러울 테지.”
황후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진, 어서 깨어나시오. 그동안의 설움은 짐이 반드시 갚겠소. 짐은 그대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 가슴이 칼에 베인 것만 같소.”
황후는 창경제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서더니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하하하, 새, 저 새가 가지고 싶어요. 태자 오라버니, 가서 잡아 와주세요.”
창경제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는 밖으로 나가 맨손으로 나뭇가지 끝의 새 한 쌍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웃긴 동작으로 이리저리 허둥대다가 결국 옷자락에 걸려 넘어져 바닥에 엎어졌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후는 입가에 옅은 웃음기를 띠었다.
* * *
며칠 동안 수도 전체가 뒤숭숭했고, 백 명이 넘는 목은백부의 사람 모두 황궁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왕부의 노비들은 수감되기도, 해고되기도 했고, 유왕의 첩들은 모두 종인부에 갇혔지만, 정동과 용훤만이 정철의 부탁으로 잠시 황궁에 머물게 되었다.
다시 수일이 지나 금린위의 암위가 정주의 경계에서 목은백을 체포해 하루이틀 만에 수도로 호송했고, 목은백은 이틀도 지나지 않아 갖은 수단의 심문을 버티지 못하고 자백하게 되었다.
마침내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알게 된 창경제는 몹시 노여워하며, 유왕이 체포되기도 전에 주살령(誅殺令)을 내렸다.
관례대로라면 여덟 살 미만의 아이는 사형을 면할 수 있었지만, 화 귀비의 죄는 너무나 극악무도했다. 적황자를 모해하려 한 것도 모자라 목은백의 아들로 대량의 황위를 빼앗으려 했으니, 목은백부의 사람 모두가 참수형에 처해졌고, 화씨의 방계 혈족에 해당하는 오백여 명의 사람들은 유형(*流刑: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하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또한 화 귀비에게서는 귀비의 봉호를 빼앗았고, 황릉에서 유해를 다시 꺼낸 뒤 산산조각내어, 무덤이 마구 널려 있는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뿌렸다.
며칠 동안 서쪽 거리 시장의 바닥은 어두운 핏빛으로 물들었고, 지하 수로에도 핏물이 흘러내려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며, 매일 해가 지기도 전에 거리는 텅 비어 한산했다.
화씨 일족을 모두 처리했음에도 창경제의 기분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온 천하가 황실을 웃음거리로 여기고 있으니, 창경제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당시 화 씨에게 사형을 내릴 때도 귀비의 신분만은 유지 시켜주었기에, 이 생각만 떠오르면 창경제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에 창경제는 더욱 부지런히 황후를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황후는 늘 바보 같은 모습 그대로였기에, 창경제는 더욱 심란해졌다.
창경제는 이 답답한 마음을 유왕을 체포하는 데 쏟아부었고, 때문에 금린위와 오성병마사는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으로 바빴다.
* * *
회인백부 안, 정수문은 한참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관리인에게 물었다.
“백부 밖의 관차들은 아직도 떠나지 않았는가?”
관리인이 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곳곳에 있습니다. 집안사람 모두 외출 시 단속을 받아야 합니다.”
“알겠다. 우선 물러나거라.”
정수문이 손을 내젓자, 회인백이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둘째야,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우리 백부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정수문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황상은 목은백부만 처리하셨습니다. 유왕은 아직 잡히지 않았고, 유왕부의 사람들도 잠시 수감된 상태지요. 우리 백부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황상의 의중에 따라 다르겠군요.”
회인백은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흐느끼며 말했다.
“화가의 죄는 평범한 집안이라 해도 절대 용서치 못할 극악무도한 짓이건만, 감히 황가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둘째야, 총명한 네가 방법을 좀 찾아보거라.”
회인백은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 백부에 태자비와 양제가 있으면 뭐 한단 말이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 오히려 이런 일에 연루될 판이라니!”
정수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지금 저를 탓하시는 겁니까?”
회인백은 정수문의 표정을 보고 급히 해명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걱정 되어서 그런다! 우린 둘째치고, 아이들은 어떡한단 말이냐?”
옆에 있던 셋째 나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큰형님, 저희는 유왕의 정식 처족(妻族)이 아니고, 황상께선 늘 어질고 너그러운 분이셨으니, 최악의 결과라 해봤자 작위를 박탈당하는 정도일 겁니다. 그 무엇보다도 목숨을 부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요.”
정수문이 비웃었다.
“작위를 빼앗기면, 우리 식구더러 굶어죽으란 말 아닌가?”
그는 울화가 치밀어 소매를 뿌리치고는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