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도망
소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창경제를 쳐다봤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사실 그날의 전날에 빈도는 이미 유왕의 심혈로 황손께 적혈고혼법을 행한 적 있습니다. 황손께선…… 유왕의 아들이 확실합니다.”
소진은 바닥에 엎드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순간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유왕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결코 이대로 당하기만 할 순 없지! 죽을 때까지 현청관에 숨어 지낼 순 없어. 목숨에 위협을 받는 상황은 이미 충분히 겪었다고!’
소진은 고개를 숙인 채 단호하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오, 유왕의 아들이라니 다행이군―”
창경제는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황손과 내가 혈연관계가 아닌데, 용침의 아들은 맞다면…….’
창경제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져 칼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진을 노려봤다.
“소진 도장, 사실이 아니라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텐데!”
소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빈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당시에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창경제가 고함을 질렀다.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찌 말할 용기가 생겼지?”
소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고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창경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지금은 화 귀비도 죽었고 용침도 태자가 아니니, 이제야 말할 용기가 생긴 것이겠지. 그럼, 용침은 정말로 내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화 귀비……, 화 귀비!’
이 순간 창경제는 화 귀비의 시신을 다시 꺼내 산산조각 내고픈 심정이었다.
창경제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가까스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고작 도사 한 명의 말만 믿어선 안 되는 일이다!’
“진인, 오늘은 짐과 장기를 두지 않아도 되네.”
북명진인이 소진을 쳐다봤다.
“폐하, 제 제자는―”
“소진 도장은 여기 남게. 짐이 물어볼 것이 많으니.”
“그렇다면, 빈도는 우선 물러나 보겠습니다.”
북명진인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조용히 떠나갔다.
* * *
창경제는 곧바로 태감 양량(楊良)을 유왕부로 보내 유왕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유왕은 서신을 받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양 공공, 부황께서 무슨 일로 본왕을 부르셨는가?”
유왕이 묵직한 염낭을 양량의 손에 쥐여주었다.
양량은 염낭의 무게를 어림짐작하더니 꽤 만족스러웠는지 목소리를 낮추어 알려주었다.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북명진인께서 소진 도장을 모시고 폐하를 알현한 뒤, 폐하께서 곧바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소진 도장이라면―’
유왕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황이 뭔가 조사해내어 소진을 불러 물어본 것이구나. 지금 궁에 들어가 봤자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닐 터.’
유왕은 생각할수록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왕야―”
양량이 재촉했을 때야, 유왕은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본왕이 어제 잠을 이루지 못해 꼴이 좋지 않네. 잠시 단장을 마치고 올 테니 기다려주게.”
그러고는 양량에게 묵직한 염낭을 하나 더 쥐여주었다.
“그럼 서두르십시오. 황상께서 즉시 궁으로 오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유왕은 급히 방으로 돌아가 하인 차림으로 갈아입고는 비단 주머니를 꺼내 품에 집어넣은 뒤, 비수를 하나 쥐고 비밀 출입구로 빠져나갔다.
권세를 잃은 황자는 늘 유난히 처량한 법이었다. 거대한 유왕부는 대낮에도 죽은 듯이 조용했다.
유왕은 마지막으로 왕부를 한 번 쳐다봤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갔다.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용훤을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목은백부의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뒤쪽의 측문은 열려있었다.
“누구냐?”
문지기가 급히 들어오는 젊은 하인을 막아섰다.
젊은이는 조용히 손가락의 반지를 내보였다.
“쌍희(雙喜)였군. 고개를 숙이고 있어 못 알아봤네. 어머니는 좀 괜찮으신가?”
문지기가 몸을 비켜 젊은이를 들여보내자, 젊은이는 곧바로 목은백의 서재로 향했다.
목은백은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서재로 달려왔다.
“외숙부님!”
“왕야, 도대체―”
목은백을 본 유왕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외숙부님, 우리의 생각보다 부황께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 벌써 저를 잡으러 오셨다고요!”
“어찌 이리 빨리?”
목은백은 깜짝 놀랐다.
‘사건에 진척이 있음을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친다고?’
“소진, 그 망할 도사 때문입니다. 그 여자가 내가 부황의 아들이 아님을 알고 있어요!”
“세, 세상에…….”
목은백이 발을 동동 굴렀다.
“왕야, 그런 사람을 어찌 살려두셨습니까!”
“저와 모비도 죽이려 했지만, 그 망할 도사가 어찌나 교활한지 현청관에 숨어 나오질 않았단 말입니다! 외숙부님, 이제 와 이런 걸 말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금린위에서 곧 여기까지 들이닥칠 겁니다. 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창경제는 유왕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는 몹시 노여워했고, 즉시 금린위에 유왕부와 목은백부를 포위하라 명했다.
* * *
목은백부 안.
화량은 침실 안에 불쑥 나타난 비밀 통로를 가리키며 크게 물었다.
“백부님, 방 안에 어찌 이런 게 있습니까? 보물을 숨겨둔 밀실 같은 겁니까?”
“조용히 하거라!”
목은백은 화량을 꾸짖고는 화가의 둘째 나리에게 당부했다.
“둘째야, 우선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거라. 난 나중에 뒤따를 테니. 통로를 빠져나간 뒤론 서로 갈라져서 이동하고, 이강(漓江)에서 모여 수로를 따라 정주로 가거라.”
둘째 나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화량은 꿈쩍 않았다.
“백부님, 어찌 수도를 떠나는 겁니까? 제 어머니는요? 조모님, 조부님, 백모님은―”
“입 닥치거라. 죽고 싶으면 여기 남든지!”
유왕이 화량의 멱살을 쥐고 포악하게 말했다.
둘째 나리는 화량을 비밀 통로로 밀어 넣은 뒤 울먹이며 말했다.
“소란 피우지 말거라. 백부님 말씀대로 해.”
비밀 통로의 문이 닫히고 화량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멀어지자, 목은백은 잠시 조용히 서 있다가 뒤돌아 본채로 달려갔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던지라, 목은백 부인은 억지로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침상 위에 옆으로 누워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옆에선 시녀 두 명이 부채를 살살 부쳐주고 있었다.
기척이 들리자, 목은백 부인은 뒤돌아 기침을 수차례 하더니 노랗게 질린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백야, 오셨습니까? 식사는 하셨고요?”
“식사는 했소. 너희는 모두 물러나거라.”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목은백은 시녀들을 내보낸 뒤, 침상 옆에 앉아 목은백 부인을 빤히 쳐다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목은백 부인이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부인, 몸은 좀 괜찮소?”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직 몸에 힘이 없어서 그렇지요.”
목은백은 부인의 얼굴을 응시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 하지 않았소. 몸이 상한다고.”
목은백 부인은 눈가가 시큰해져 왔다.
“침이가 갑자기 태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황상께서 반성하라 명하기까지 했으니, 걱정이 안 될 리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소. 부인, 용서하시오.”
목은백이 눈을 질끈 감자, 목은백 부인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백야?”
목은백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안타까운 눈빛으로 부인을 쳐다봤다.
목은백 부인은 그 눈빛에 얼굴이 달아올라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목은백의 손이 그녀의 목을 감싸더니 이내 꽉 조여 갔다.
“쿨럭 쿨럭, 백…… 백야?”
목은백 부인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목은백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현재 목은백 부인은 몸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던 데다가, 건장한 사내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잠깐의 발버둥 끝에 결국 그녀의 두 손이 아래로 축 처졌다.
“어…… 어째서…….”
목은백 부인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목은백은 떨리는 손으로 부인의 눈을 감겨주며 중얼거렸다.
“미안하오. 정말 달리 방법이 없었소. 몸이 좋지 않으니 나와 함께 갈 수도 없고, 여기 남으면 곧 모욕을 당할 테니, 차라리 이렇게 깔끔하게 떠나는 게 낫겠지…….”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얇은 천 이불로 목은백 부인의 몸을 가려준 뒤, 밖으로 나갔다.
“부인은 이미 잠들었으니 들어가지 말거라.”
목은백은 시녀들에게 명령한 뒤, 마당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을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이 쾌적하여 왠지 동경하는 마음을 느끼게 했지만, 목은백은 그 하늘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만 싶었다.
그는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른 채 본채를 나와, 부모가 있는 거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 아들의 불효를 용서해주십시오. 고의로 두 분을 여기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두 분의 연세와 건강을 생각하면, 저와 함께 도망치느니 차라리 여기 남는 게 편하실 겁니다…….”
목은백은 몇 번이나 바닥에 머리를 내리치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밀실로 달려갔다.
* * *
화가 둘째 나리를 포함한 세 사람은 좁고 긴 비밀 통로를 지나 마침내 출구를 찾아냈다.
그곳은 작은 골목과 이어진 문이었는데, 양쪽의 흑청색 담장은 높고 낡았으며, 최근에 비가 온 적이 없음에도 골목은 오수가 넘쳐흘러 축축하고 더러웠다.
세 사람은 코를 막고 골목의 끝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곧 평범하고 작은 마차와 그 마차 앞에 앉은 마부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목은백이 미리 준비해놓은 마차였다.
화가 둘째 나리는 필히 갈라져서 도망쳐야 한다는 형님의 말을 떠올리고 유왕에게 말했다.
“왕야, 타십시오. 저는 화량과 함께 저쪽으로 가겠습니다.”
유왕이 둘째 나리를 막았다.
“아닙니다, 둘째 외숙부님. 화량과 함께 타십시오. 저는 저쪽으로 갈 테니.”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거리를 순시하는 관군이 눈에 띄게 늘어난 상태였다. 유왕은 동성(東城)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이리저리 숨어다니다가, 날이 어두워졌을 때쯤 겨우 동성문을 찾아냈다.
평범한 백성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용모가 지나치게 출중했기에, 귀족이 많은 서성과는 달리 동성에서의 그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유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동성을 나가는 대열에 줄을 섰다.
대열은 대부분 이른 아침 수도로 와 장사를 하는 소상인들과 교외 농부들이었다.
성문 앞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거 놓으시오, 내 아버지도 놓아주시오!”
‘화량이구나!’
유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을 느끼다가, 순간 어리둥절했다.
‘화량과 둘째 외숙부님은 마차를 탔으니 진작 성 입구에 도착했어야 할 텐데, 왜 지금 여기 잡혀있는 거지? 내가 당시 마차를 선택하지 않았던 건, 우리 모두 평민 차림을 하고 있으니, 마차를 타고 단속을 받으면 들킬 확률이 더 크기 때문이었는데.’
“대인, 윗분들께서 찾는 사람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생사람 잡지 말고 이거 놓으시오!”
화량이 발버둥 쳤다.
귀하게 큰 도련님 화량은 아직까지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째서 저들이 도망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생사람 잡지 말라고?”
관차가 화량의 손을 덥석 잡으며 비웃었다.
“평민 백성의 손에 굳은살 하나 없군. 아가씨 손보다 희고 곱다니, 정말 이상하지 않나? 여봐라, 이 부자를 데려가거라!”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왕은 고개를 숙여 제 손을 쳐다보더니 조금씩 대열에서 벗어나 깊은 골목으로 숨어 들어갔다.
‘안 되겠군. 동성문에서도 벌써 단속을 하고 있다니. 다른 성문은 더 엄격하겠지. 며칠 동안은 수도를 벗어나지 못하겠어. 그럼 어떡해야 하지?’
20여 년간 곱게 자라온 유왕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낡은 벽에 기대 잠시 고민하더니 결심을 내렸다.
‘서성으로 돌아가야겠어! 익숙한 곳에 있어야 조금의 기회라도 볼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