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쌍관제하(雙管齊下)
“소진 도장 아니십니까?”
그때 한 사내가 소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진은 눈앞의 사람을 정확히 알아보진 못했지만, 사내가 입은 관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소진 도장,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는군요. 저는 축(祝)씨 가문의 병마사(兵馬司) 부지휘사(副指揮使)입니다. 예전에 도장을 한 번 뵌 적 있지요.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라도―”
소진은 마침내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도둑을 마주쳤는데 붙잡지 못했습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잃어버렸군요. 축 대인, 혹시 저를 서쪽 큰 거리로 데려다주실 수 있습니까? 현청관의 마차가 그곳에 있습니다.”
사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익숙한 마차와 도동이 보이자, 소진은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사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그 순간, 사내가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소진은 온몸의 피가 마르는 느낌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뒤이어 예전엔 아주 혐오했지만, 지금은 선녀와도 같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진 사질, 먼저 돌아와 있었구나.”
소진은 천천히 걸어오는 정미를 보며 숨을 크게 헐떡였다. 화창한 햇살 아래, 왠지 구원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내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녀를 보고 다시 소진을 보았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미는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다가왔고 웃으며 물었다.
“당신은…… 축 대인이시지요?”
사내는 더욱 의아해져 되물었다.
“나를 아시오?”
정미가 웃었다.
“전에 춘시에서 압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축 대인과 마주친 적 있습니다.”
“그럼 아가씨는―”
사내는 정미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갑자기 떠오른 듯 급히 예를 갖췄다.
“현미진인이셨군요.”
“그리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축 대인께서 어찌 제 사질과 함께 계신 겁니까?”
“소진 도장이 도둑을 쫓다가 길을 잃어, 여기까지 데려다드렸습니다.”
“그렇군요.”
정미가 담담히 소진을 흘끗 쳐다보더니 사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마차가 출발하자, 정미는 그제야 소진에게 물었다.
“운상의에서 나를 기다리기로 한 것 아니었나? 어찌 도둑질을 당했어?”
“도둑이 가게 손님 중에 섞여들었고, 물건을 도둑맞자마자 쫓아나갔습니다.”
소진이 당황하며 설명했다.
“그렇군. 앞으로 조심하게.”
정미는 무심하게 위로한 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늘 사지 못한 물건이 많아. 내일 다시 나와 함께 나오도록 하지.”
그러자 소진의 몸이 비틀거리더니 마차 벽에 이마를 부딪치기까지 했다.
정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와 물건을 사러 돌아다니는 게 싫은 건가?”
소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럼 다행이군. 내일 아침에 도동을 보내 소진 사질을 부르겠네.”
“아, 예.”
소진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고 눈앞이 캄캄해져만 갔다.
마차는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천천히 성 밖으로 향했다. 정미는 눈을 감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 * *
같은 시각, ‘축 대인’은 거리를 한 바퀴 둘러보는 중이었다. 형부(刑部) 관아를 지나가는 길에, 아는 사람 둘이 관아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축 대인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둘 중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네. 마침 한잔 하러 가는 참인데, 축 형도 함께 가지.”
축 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며칠 동안 바빠서 발에 불이 날 지경이더니, 오늘은 어찌 이 시간에 술을 마시러 가는가?”
둘 중 하나가 축 대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윗사람들이 주시하는 그 사건이 마침내 갈피가 잡혔다네. 그래서 상관들께서 기분이 좋아 일찍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지.”
“오, 그 방화 사건 말인가―”
“쉿, 입 밖에 꺼내지 말게. 생각보다 복잡한 사건이니 최대한 모르는 척하는 게 좋아.”
축 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렸군. 자, 술이나 마시러 가지.”
세 사람이 멀리 떠나가자, 형부 관아 입구 근처에 있던 평범한 사내가 조용히 뒤돌아서더니 목은백부로 달려갔다.
목은백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갈피가 잡혔다니. 그럼 나와 관련되었다는 것도 알아냈단 말인가? 그럼 유왕이 오월루에게 태자를 해하라 한 일도…….’
목은백은 생각할수록 섬뜩해졌다.
‘안 되겠다. 유왕에게 알려야겠어!’
하지만 유왕은 현재 황제의 명으로 반성 중이었기에, 목은백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밀서를 써서 심복에게 밤에 몰래 유왕부에 잠입하라 명했다.
어두운 밤중,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조용히 목은백부를 나와 유왕부로 향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또 다른 두 사람이 목은백부 밖의 모퉁이에서 나와 서로를 마주 보더니, 그자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앞에 있는 검은 옷의 사람을 따라갈수록 의아해졌다.
앞장서던 검은 옷의 사람은 유왕부의 담장 밖을 잠시 서성이더니 낮은 담벼락을 골라 넘어갔다.
남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따라 들어갈까?”
둘 중 하나가 물었다.
나머지 하나가 옆에 있는 평왕부를 가리켰다.
“내가 따라 들어가지. 너는 우선 돌아가서 주인님께 아뢰고, 도와줄 사람을 더 불러와 줘.”
“알겠다.”
상의를 마친 뒤, 한 사람은 유왕부의 담장을 넘어갔고, 나머지 한 사람은 평왕부의 담장을 넘어가 각자 어두운 밤빛 속으로 사라졌다.
“목은백부의 사람이 유왕부에 잠입했다고?”
암위의 보고를 들은 평왕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입을 열었다.
“분명 음모다. 뭔가 음모가 있어!”
‘그날 유왕과 우연히 마주친 뒤, 유왕과 목은백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목은백부에 감시를 붙였고, 이후 정말로 단서를 잡게 된 것을…….’
“사람을 몇 명 더 데리고 유왕부에 잠입하여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거라.”
한밤중의 유왕부는 고요했고 복도의 처마 밑에 걸려 흔들리는 등불만이 미미한 기척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옷의 사람은 조심스럽게 유왕의 서재로 다가갔다.
서재의 촛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유왕이 일어나 앉았다.
“누구냐?”
그러자 문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야, 저는 목은백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서신을 전하러 왔습니다.”
유왕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기까지 조용히 찾아오다니, 왕부의 호위들은 뭐 하고 있는 거지?’
유왕은 반신반의하며 베개 밑에서 비수를 꺼내 소매 속에 숨긴 뒤 문을 열었다.
검은 옷의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절을 올리더니, 유왕에게 밀서를 바쳤다.
유왕은 밀서를 건네받은 뒤 열어보았다. 특수한 표기를 사용해 목은백이 직접 쓴 것임을 알아보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밀서를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밀서는 곧바로 촛불에 타올랐다.
유왕은 창가의 책상 앞으로 가 서신을 적기 시작했고, 반쯤 적었을 때쯤 또 뭔가 불안해져 구겨버린 뒤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생각할수록 간담이 서늘해져 이미 식은 차를 꿀꺽꿀꺽 마신 뒤 찻잔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그 순간,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아닌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유왕은 식은땀이 흘러내려 고함쳤다.
“밖에 누구냐?”
아무도 유왕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급히 떠나가는 발소리만 들려왔다.
유왕이 방 안의 검은 옷을 입은 자에게 물었다.
“몇 명을 데리고 왔는가?”
“혼자 왔습니다. 바로 나가보겠습니다!”
검은 옷의 사람이 창문을 뛰어넘어가자, 유왕이 크게 외쳤다.
“여봐라, 자객이다!”
유왕부는 곧바로 떠들썩해졌다.
한바탕 소란이 지난 후, 유왕은 왕부의 호위들을 호되게 꾸짖은 뒤, 사람들을 내보내고 책장 뒤에 숨어있던 검은 옷의 사람을 다시 불러냈다.
“내일 아침, 왕부의 하인으로 변장해 나가거라. 이 서신을 백야(*伯爺: 백부의 주인에 대한 경칭)께 반드시 전해드려야 한다.”
“예.”
그날 밤, 유왕은 완전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외숙부님의 밀서에 따르면, 윗사람들이 방화 사건을 끈질기게 조사한 끝에 결국 대강 갈피가 잡힌 상태이고, 오늘 밤 왕부를 탐색하러 온 자도 있다. 설마, 부황께서 벌써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여 왕부에 암위를 보낸 건가?’
유왕은 이리저리 뒤척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답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꽉 닫힌 창문을 보자 갑자기 이 거대한 유왕부가 무서운 감옥처럼 느껴졌다. 언젠간 이 감옥에서 뼈도 못 추릴 날이 올 것만 같았다.
* * *
소진은 사흘 연속으로 정미와 함께 산을 내려갔고 수십 번의 구사일생을 겪어야 했다.
결국 완전히 정신이 무너져 정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사숙, 저와 함께 궁으로 가 황상을 알현해주십시오. 보고할 일이 있습니다!”
“난 지금 궁에 들어갈 수 없네.”
정미가 단호히 거절했다.
“사숙, 정말 황상께 아뢰어야 할 일이 있단 말입니다!”
정미가 거절하리라 생각지도 못한 소진은 거의 무릎을 꿇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소진 사질, 그대도 알듯이 나는 이미 태자와 정혼한 상태로, 지금 궁에 들어가기엔 시기가 좋지 않네. 정말 보고해야 할 일이 있다면 북명 사형께 부탁드려보게.”
“사부님이요?”
소진의 눈이 반짝였다.
“아, 그렇지요. 사부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급히 떠나가는 소진의 뒷모습을 보며 정미는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오라버니가 내게 준 임무를 드디어 완수했구나.’
* * *
북명진인은 소진이 궁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해야 한다고 말하자 계속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했고 유일한 여제자가 이토록 애원하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경제는 어화원의 양정(凉亭)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진인, 짐과 장기를 두러 왔는가?”
창경제는 최근 기분이 무척 좋았다. 북명진인의 늙은 얼굴을 보아도 왠지 주름의 개수가 적어 보인다고 느낄 정도였다.
“빈도의 제자 소진이 폐하께 아뢸 말이 있다 하옵니다.”
북명진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음?”
창경제가 소진을 쳐다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소진 도장, 무슨 일인가?”
소진은 황제의 눈빛을 마주하며 주먹을 꽉 쥐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하, 빈도는 용서를 빌기 위해 왔습니다!”
창경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소진 도장, 죄를 저질렀는가?”
소진이 고개를 들고 정자 안의 궁인들을 쳐다봤다.
“너희 모두 물러나거라. 주홍희, 그대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밖을 지키고 있게.”
양정 안에 세 사람만 남게 되자, 소진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입을 열었다.
“폐하, 전에 빈도가 귀비마마의 부름으로 궁으로 와 경전을 읽어드렸을 때, 폐하께서 적혈고혼법으로 황손을 치료하기 위해 빈도를 부르셨지요…….”
창경제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는군. 실패하지 않았던가?”
“예, 실패했지요…….”
소진이 눈을 들어 북명진인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왜냐하면, 폐하의 심혈은 황손의 약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진―”
북명진인이 깜짝 놀라 소진을 불렀다.
창경제는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문제가 되는가?”
소진의 얼굴엔 조금의 핏기도 남아있지 않았고 떨리는 입술로 겨우 말을 이었다.
“그것은…… 폐하와 황손이 혈연관계가 아님을 뜻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창경제는 곧바로 멍해졌고, 소진을 쳐다봤다가 다시 북명진인을 쳐다보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간 멀리 있는 화초를 쳐다보더니,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물었다.
“그럼, 황손이 유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