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44화 (343/375)

344화. 재촉

가을이 되어 방 안의 얼음 그릇을 치웠지만 여전히 더운 느낌이 남아있었다. 한지는 얼굴을 씻은 뒤, 마당 앞으로 나갔다.

“세자, 어찌 그리 우울해 보이십니까?”

뒤에서 익숙한 매화향이 전해져왔다.

한지는 뒤돌아서서 조용히 정요를 쳐다봤다.

정요가 눈을 내리깔았다.

“제 거처의 마당도 마음대로 걸을 수 없는 겁니까?”

“아니, 그럼 난 이만 돌아가 보지.”

한지가 지나쳐가자, 정요가 한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한지가 눈살을 찌푸리고 정요를 쳐다봤다.

정요는 한지의 옷자락을 더욱 꽉 쥐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내 몸은 아직도 그리 원하면서, 평소엔 어찌 이렇게 서리처럼 차갑게 구는지. 내가 옛사람들의 시를 표절한 것 외에, 무슨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예전엔 분명 죽을 때까지 나만 사랑하겠다고 해놓고선, 그 사랑이 이토록 보잘것없는 마음이었단 말인가? 한지가 사랑한 건 내가 아니라, 상상 속의 완전무결한 여인이었나보구나!’

“정요, 이거 놓거라. 이렇게 들러붙는 건 보기 좋지 않아.”

정요가 피식 웃었다.

“여기 저희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정요가 한 걸음 다가서자, 은은한 향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세자, 며칠 전 제가 한 말 때문에 그리 우울하신 겁니까?”

“그게 뭐 어때서?”

“정미는 늘 예상 밖의 행동을 저지르곤 하니까요. 세자께서 정말 정미를 연모하신다면, 제게 세자의 바람을 이루어드릴 방법이 있습니다.”

정요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저도 제 잘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자께 확실히 보상해드려야지요. 그저 앞으로 세자께 새로운 사람이 생기더라도, 저를 조금만 더 생각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한지는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정요를 쳐다봤다.

“바람을 이루어주다니? 정요,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제게 정말 방법이 있―”

한지가 정요의 말을 끊었다.

“정요, 아직도 철 형님의 새로운 신분을 모르고 있는 것이냐?”

“새로운 신분이요?”

“철 형님은 황상께서 오래전 잃어버린 적황자고, 지금은 이미 태자로 책봉 되었어. 곧 정미와 혼인할 거라고!”

한지는 멍하니 서 있는 정요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뒤돌아 가버렸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가을바람이 떨어진 낙엽을 휩쓸고 지나가자 마침내 조금 쌀쌀한 기운이 돌았다.

정요는 넋이 나간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정요의 시종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가 말렸다.

“큰며느님, 밤이 늦었습니다.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정요는 시종을 휙 밀치고 근처에 심어져 있는 계수나무로 달려갔다. 그녀는 나무를 짚고 숨을 헐떡였다.

‘태자라고? 말도 안 돼. 그렇게 적혀있지 않았어. 절대 그렇게 적혀있지 않았다고! 그럼 정미는?’

정요가 고개를 번쩍 들고 시종을 노려보았다.

“정미가 정말 정철과 정혼하였느냐?”

시종은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큰며느님, 소인은 온종일 여기 있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정요가 갑자기 손을 내려놓았다.

‘도 씨 그 악랄한 여자 같으니, 마당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하니,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구나! 정철이 태자가 되고, 정미가 태자비가 되다니, 내가 읽었던 그 책은 도대체 뭐가 되는 거지? 내 계획은? ……잠깐!’

정요는 마침내 뭔가를 떠올렸다.

‘그 책, 끝까지 다 읽지 않았어…….’

“아, 아, 아악!”

완전히 무너진 정요는 계수나무에 머리를 박아댔다.

계화가 천천히 떨어져, 정요와 시종에게 향을 덧씌웠다.

시종은 깜짝 놀라 정요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큰며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다 정말 시골 마을로 쫓겨나실 겁니다!”

이 말에 정요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계수나무가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려왔다.

정요는 나무를 짚고 손을 천천히 긁어 오므렸다. 나무줄기에 옅은 자국이 남았고, 정요의 손톱은 소리 없이 부러져버렸다.

“돌아가지.”

정요가 시종을 밀치고 천천히 돌아갔다. 바닥 가득 떨어진 계화에선 은은한 향이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 *

정미는 위국공부에서 며칠 지내다 현청관으로 돌아갔다.

“사매, 무슨 일인가?”

정미가 의서를 안고 웃으며 말했다.

“최근 사부님이 제게 준 필기를 공부하고 있는데,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요. 사부님은 폐관 수련 중이시니, 사형께 여쭈러 왔습니다.”

북명진인이 다가와 보더니, 곧바로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사매, 사부님이 네게 준 필기이니, 수련이 끝나고 나오시면 직접 여쭤보는 게 좋겠다.”

‘이거, 사형 노릇도 쉽지 않군. 이게 다 사부님이 편애해서 그래!’

“아, 그럴까요.”

정미는 실망한 듯 의서를 꽉 쥐었다가 다시 웃으며 물었다.

“아, 그렇지. 사형, 소진 사질은 요즘 왜 밖에 나오질 않는 겁니까?”

“도인이 인내하고 수련하는 건 좋은 일이지. 소진은 그간 속세에 너무 관여해왔다.”

“그렇군요.”

정미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현청관엔 여제자가 많지 않고, 제 또래는 소진 사질 뿐이라서요. 같이 나가서 물건 좀 사려고 했거든요.”

“물건이야 다른 제자에게 시키면 되지.”

정미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북명진인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

‘사매는 지금 아가씨들이 쓰는 물건을 사려는 거구나.’

“큼큼, 내가 소진에게 전해주겠네. 너무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좋지 않으니.”

* * *

화 귀비의 비밀을 안 뒤로, 소진은 겁이 나 그간 단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부의 명령으로 정미와 함께 산을 내려가게 되니, 얼굴은 그야말로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정미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소진 사질,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나? 몸이 안 좋다면 그냥 쉬어도 좋네.”

“아닙니다!”

소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바로 채비하여 사숙과 하산하겠습니다.”

‘이미 이 사숙에게 너무 많은 미움을 샀어. 이 기회를 틈타 관계를 조금이라도 회복시키는 것도 좋겠어. 태자는, 아, 아니지, 유왕은― 설마 아직까지도 날 노리고 있진 않겠지.’

이렇게 자기 위로를 하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소진은 불안감에 온몸이 긴장되었다.

현청관은 금수봉(錦綉峰) 위에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그리 험하진 않았으나 굽이굽이 돌아가야 했기에 꽤 멀고 긴 거리였다.

규칙에 따르면 소진은 정미의 후배였기에, 하산할 때 정미보다 앞장서야 했다.

그러다 어느 모퉁이에서 소진은 발이 미끄러져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정미가 소진을 꽉 붙잡았다.

“소진 사질. 조심하게. 여기서 넘어지면 아주 위험할 테니.”

정미가 손을 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소진은 깜짝 놀라 식은땀을 흘렸고 연이어 감사 인사를 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숙.”

소진은 돌계단 위에 번들번들한 기름 얼룩을 보고는 흠칫했다.

“소진 사질, 무슨 일인가?”

“아, 아닙니다. 사숙, 저쪽은 조금 미끄러운 것 같으니, 이쪽으로 가시지요.”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수도의 서쪽 거리로 향했다. 거리 양쪽엔 가게가 즐비했고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오가고 있었다.

소진은 사방을 둘러봤다. 인산인해를 이룬 거리가 왠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에 산을 내려온 탓이겠지. 괜찮을 거야.’

소진이 고개를 들어 바람에 휘날리는 간판 깃발들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피식 웃었다.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소진 사질, 우선 찻집에서 차나 한잔 마시지.”

“아, 예.”

두 사람은 아무 찻집이나 들어가 아실을 요청했다.

아실의 창가에 마주 앉은 뒤, 정미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차를 홀짝였다.

따뜻한 차가 뱃속에 들어오자 소진은 점점 긴장이 풀렸고, 정미도 소진에게 별 말을 건네지 않았기에, 소진은 아무렇지 않게 창밖을 쳐다봤다. 그리고 창밖을 쳐다본 순간, 손을 잘게 떨어 찻잔을 엎을 뻔했다. 뜨거운 찻물이 그녀의 뽀얀 손등에 튀어 곧바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소진은 손등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창밖을 더욱 유심히 쳐다볼 뿐이었다.

맞은편 거리에도 찻집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2층에 아실이 있었으며, 창문도 열려있었다.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검푸른 쇠뇌가 조용히 이쪽 창문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진은 벌떡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심장은 북처럼 쿵쿵 뛰었다.

“소진 사질?”

소진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햇살이 너무 강해서 사숙께서 따가우실까 봐―”

“괜찮다. 난 해를 쬐는 걸 좋아해.”

정미가 일어나 창문을 다시 열려고 하자, 소진이 갑자기 정미의 옷자락을 잡았다.

“사숙, 이제…… 물건을 사러 가지요.”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일찍 사고 일찍 돌아가지.”

정미의 시선이 소진의 창백한 얼굴에 꽂혔다.

“소진 사질, 오늘 안색이 좋지 않은데,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괜찮습니다!”

소진은 우는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사숙과 함께 가겠습니다.”

찻집을 나와 아무 가게나 몇 군데 둘러보는 동안, 소진은 심신이 아주 지쳐만 갔다.

“좀 색다른 옷을 몇 벌 사고 싶은데, 소진 사질은 평소 좋은 가문의 부인들과 왕래했으니 괜찮은 가게를 추천받을 수 있을까?”

소진의 눈에 운상의의 간판이 들어와, 손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옷가게가 유명합니다. 맞춤 제작도 되고요.”

정미가 미소 지었다.

“그럼 가보지.”

운상의에 들어가자,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네.”

정미는 세심히 둘러보다가 옷을 하나 골라 여직원에게 말했다.

“한번 입어보고 싶은데.”

여직원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인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소진은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가게 안을 드나드는 손님들 덕분인지, 왠지 안전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셨군요.”

여직원이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진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보자, 서른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여인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여인은 평범한 차림이었는데, 단정하게 쪽을 진 머리에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소진은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낯이 익은데.’

소진은 곁눈질로 여인을 쳐다봤고, 여인은 안으로 들어오면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소진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소진도 흠칫 놀랐다.

‘생각났다. 예전에 동궁에서 본 적 있는 사람이야! 이 여인은 유왕의 사람이라고!’

소진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금까지의 불길한 예감은 그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유왕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자 소진은 더 이상 제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분명 유왕이야! 유왕이 계속 사람을 보내 나를 주시하고 있다가, 내가 외출하는 순간 나를 죽일 셈이었구나!’

그 여인이 갑자기 소진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자, 소진은 가슴이 요란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딱딱히 굳은 채 여인을 빤히 노려봤다.

여인의 발걸음은 침착했고 옷자락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소진은 순간 움찔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저 여자, 소매 속에 날카로운 비수를 숨기고 있어! 아,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날 해칠 순 없을 거다!’

소진은 주변을 둘러봤고,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잣집 부인들과 아가씨들의 편한 방문을 위해, 운상의의 점원은 모두 여자밖에 없어. 그러니까, 여기 점원들은 저 여인이 나를 해친다 해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소진은 벌떡 일어나더니, 저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주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뒤돌아 밖으로 달려나갔다.

빠르지만 여유로운 발소리가 뒤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소진은 차마 고개도 돌려보지 못하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를 시간 동안, 소진은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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