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딱 맞는 사람
태후는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미소 짓는 얼굴로 창경제에게 말했다.
“아주 부지런한 아이입니다. 한시도 의서를 내려놓질 않아요. 어린 나이에 이리 조예가 깊은 이유가 있더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창경제가 정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맞장구쳤다.
“황상?”
태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현미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황후에게 그 일이 일어난 뒤, 내가 자녕궁 밖을 잘 나가지 않긴 하다만 몇 년 동안 들은 게 없진 않지. 황상은 한명주의 여동생에게도 관심을 보였다고 했어. 현미와 한명주의 여동생은 많이 닮았으니……. 역시 황후의 병이 치료된 이후론, 현미를 오래 머물게 해선 안 되겠구나.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두 사람은 응접실로 들어갔고, 태후는 창경제를 앉힌 뒤 궁인들을 내보냈다.
“그럼 무슨 일인지 말씀해보시지요, 황상.”
“모후, 용경도 스무 살이 넘었으니 태자비를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애가도 며칠 지나면 황상과 상의해볼 생각이었습니다. 황상께서도 마음에 두고 계셨군요.”
창경제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뭔가 어려운 점이라도 있는 겁니까?”
창경제가 한숨을 쉬었다.
“모후, 용경이 출정하기 전에 국사께서 단언하기를, 용경은 운명이 특별하여 사주팔자가 맞는 여인이 아니면 혼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절하게 된다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태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모후, 용경이 황가의 혈통이 된 것도 국사의 말이 인증된 셈입니다. 역시 태자비는 아무나 간택할 수 없겠습니다.”
그래도 태후는 창경제보다 안색이 한결 편했다.
“걱정 마세요, 황상. 우선 내일 국사를 모셔보고, 어떤 사주의 여인이 경이와 맞는지 알아봅시다. 조정의 문무백관 중에 맞는 여식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창경제는 더욱 슬퍼졌다.
‘맞기만 하면 안 되지, 내 아들의 눈에 안 차면 황손을 볼 수 없을 텐데!’
“황상,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 겁니까?”
창경제가 엄중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모후, 짐이 금린위에게 몰래 조사하라 명했는데, 용경은 아직까지도 남녀의 정을 겪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마…… 사내를 좋아할 확률이 큽니다! 어, 어어, 모후, 모후!”
창경제는 쓰러질 뻔한 태후를 급히 부축했다.
태후가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황상, 오해일 리는 없습니까?”
창경제는 쓰라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경과 사내가 입을 맞추는 걸 직접 본 사람도 있습니다.”
태후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선황의 넷째 숙부 북녕왕(北寧王)도 남색을 즐겼다 들었습니다. 설마 이런 것도 유전이 된단 말입니까?”
창경제는 조용히 답답한 숨을 삼켰다.
‘용경의 외모가 출중한 건 풍씨 가문 덕분이고, 남색을 즐기는 건 우리 용씨 가문 탓이란 말인가?’
“모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짐이 용경을 넌지시 떠보았는데, 여인을 완전히 혐오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외모의 여인에게 흥미가 생기지 않을 뿐이라 하더군요.”
태후의 눈이 반짝였다.
“다행입니다. 자태가 출중한 여인이야 황실에 널렸지요. 어느 정도 되어야 경이의 마음에 들까요?”
“아, 현미 정도면 될 겁니다.”
태후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황상, 경이가 여인을 완전히 혐오하지 않는다고 한 건, 그저 황상을 위로하려 한 말 아니었을까요?”
* * *
다음 날, 황궁에서 청령진인을 모시기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청령진인은 폐관 수련 중이라 외출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어쩔 수 없이 정철의 사주팔자만 국사에게 보내 계산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태후와 창경제가 학수고대하는 가운데, 하인이 비단함을 가지고 돌아왔다.
비단함 안엔 사주팔자가 적힌 종이가 두 장 있었다. 하나는 태자 정철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와 맞는 여인의 것이었다.
“2월 초이튿날 미정(*未正: 미시의 한가운데로, 곧 오후 2시를 말함)에 태어난 여인이라…….”
창경제가 곧바로 명을 내렸다.
“어서 수도에서 2월 초이튿날 미정에 태어난, 스무 살 이하, 열세 살 이상의 양가(良家) 여식의 출신과 초화상을 조사해 보고하거라!”
“스물다섯 이하, 열 살 이상으로!”
태후가 덧붙이자, 창경제가 태후를 쳐다봤다.
태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주팔자가 맞고, 게다가 절세미인이어야 하니 서른 이하, 여덟 살 이상도 사실 가능하지요.”
이후의 나날 동안 정철은 평소대로 매일 자녕궁으로 가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후 황후를 살펴봤고, 정미는 황후를 치료하는 시간 외에는 의서에 전념했다.
황궁은 아주 평화로웠지만, 궁 밖의 관아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아주 바빴다.
보름 후, 결국 초화상 한 더미가 황제의 책상 위에 올라왔다.
창경제는 기대에 부푼 채 하나씩 살펴보다가 크게 실망하고는 겨우 몇 개 골라내어 태후에게로 향했다.
태후가 초화상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여인은 서른도 넘은 것 같군요. 게다가 돼지를 잡는 여인이라니요!”
그러고는 또 다른 초화상을 꺼내 들었다.
“이 아이는 여덟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데, 이 아이가 급계할 때쯤이면 경이가 몇 살입니까! 쯧쯧, 황상. 이것 좀 보세요. 아무리 봐도 여인인지 사내인지 구별도 안 갑니다. 이런 자를 태자비로 삼으시겠다고요?”
그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태후는 곧바로 창경제의 뜻을 알아챘다.
‘태자의 취향은 이런 쪽일 수도 있겠구나!’
“안 됩니다. 애가는 절대 사내처럼 생긴 태자비를 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다 황자를 낳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공주를 낳게 되면…….’
태후는 더 이상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럼 짐이 전국 범위로 넓혀 조사하라 명하겠습니다.”
창경제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가다가 정미와 마주쳤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청색 도포를 입은 소녀는 아주 청초하고 단정했다.
창경제는 정미를 잠시 살펴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물었다.
“현미, 생일이 언제인가?”
“화조절에 태어났습니다.”
“화조절?”
창경제가 움찔했다.
‘대량의 화조절은 매년 2월 초이튿날인데.’
“화조절 언제 태어났느냐?”
정미가 경계하듯 창경제를 쳐다보자, 창경제는 난처한 듯 헛기침을 했다.
“화조절에 태어난 여인이 특히나 수려하고 영리하다던데, 마침 현미 도장과 들어맞는 듯하여 호기심에 물어보는 것이네.”
‘왜 저런 눈빛으로 짐을 쳐다보는 게지? 일국의 황제인 내게 비빈이 얼마나 많은데. 최근엔 후궁을 채운 적도 없거늘!’
창경제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2월 초이튿날, 미정에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냐?”
창경제의 눈이 반짝였다.
정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잘 되었군!”
창경제가 기쁜 얼굴로 상냥하게 말했다.
“현미 도장, 그럼 마저 볼일 보고 있게. 짐은 태후와 상의할 일이 있으니.”
바람처럼 떠나가는 창경제를 보며 정미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들어가려 하던 사람은 나라고. 창경제는 안에서 나오고 있었고! 왜 갑자기 다시 들어가는 거람.’
정미는 어쩔 수 없이 황후의 처소로 가 오늘의 치료를 시작했다.
태후는 창경제가 돌아오자 의아한 듯 물었다.
“황상, 어찌 다시 돌아오셨습니까?”
창경제가 흥분하며 말했다.
“모후, 딱 맞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누굽니까?”
“현미입니다. 현미가 2월 초이튿날 미정에 태어났다는군요!”
“현미?”
태후가 멈칫했다.
“현미는 태자의―”
태후는 말을 삼켰다.
‘현미가 가장 걸맞는 사람이라면, 예전에 남매 사이인 게 뭐가 중요한가. 고모와 조카를 한 번에 궁에 들인 황제도 있었는데, 내 보물 같은 손자가 당당하게 태자비를 맞는 게 뭐 어때서?’
“허나, 경이가 받아들일지…….”
태후는 역시 보물 같은 손자의 걱정이 앞서는 심정이었다.
“짐이 보기엔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리 극구 반대하지도 않더군요. 결국 함께 자라온 사이이니, 이 혼사에 큰 반감을 가지진 않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감만 없다면 됐습니다. 일단 혼인부터 한 후 경이의 마음에 들 여인을 천천히 물색해보면 됩니다. 내일 애가가 단 노부인과 한 씨를 궁으로 불러와 이 일에 대해 상의하도록 하지요. 경이의 나이가 적지 않으니, 혼례는 최대한 빨리 치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모후.”
창경제는 마음속에 있던 무거운 바위를 내려놓은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태후는 그런 창경제의 뒷모습을 보며 우습다고 생각했다.
‘역시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나 보군.’
태후가 궁녀에게 물었다.
“현미진인께서 오셨느냐?”
“오셨습니다. 마마께서 황상과 대화를 나누시는 걸 보고 황후마마의 처소로 가셨습니다.”
“황후의 치료가 끝나면, 애가에게 찾아오라 전하거라.”
* * *
정미가 황후를 치료하는 사이, 정철이 찾아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미가 나오자 정철이 맞이하며 물었다.
“힘들진 않아?”
“괜찮아. 최근엔 많이 좋아지셨어. 치료도 쉬워졌고.”
“고생했어. 우선 모후를 뵙고 올게.”
정미는 바깥방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정철이 나오자 궁인을 내보내고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오라버니, 우리 이러다 태후와 황상께서 알게 되시면 노여워하시지 않을까?”
정철이 웃었다.
“그때가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테니, 노여워하시면 같이 벌을 받지 뭐.”
정철이 손을 들어 정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바보야, 내가 언젠간 떳떳하고 당당하게 너와 혼인하고 절대 널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을 거라 했지?”
“오라버니―”
정철이 소녀의 꽃처럼 아리따운 뺨을 어루만지며 작게 말했다.
“미미, 넌 나한테 가장 소중한 최고의 존재야. 네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사내라면, 어떤 난관에 부딪히든 간에 네가 가장 축복받으며 혼인할 수 있도록 정성을 쏟아부어야 해.”
정미는 눈가가 촉촉해져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고 마음속에 차오르는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 내가 사랑하는 오라버니는 늘 내가 힘든 일을 겪지 않게 하려 했지. 어쨌든 오라버니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든 맞을 준비가 되어있어.’
이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궁녀가 문밖에서 말했다.
“현미진인, 태후께서 부르십니다.”
“그래, 곧 가마.”
정철이 정미의 손을 꽉 잡으며 작게 말했다.
“내가 했던 말, 꼭 기억해.”
정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궁녀를 따라 태후의 거처로 향했다.
* * *
정미를 보는 태후의 눈빛은 이미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머리숱도 많고, 피부도 새하얗고, 몸매도 늘씬한 게 경이 옆에 있기에 아주 잘 어울려.’
태후는 정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히 뜯어보려는 듯이 굴었다.
‘역시 곧 열일곱이 될 아가씨로구나. 마르긴 했지만 자랄 데는 다 자랐어. 특히 허리와 골반을 보니 아이를 잘 낳겠구나.’
“현미―”
태후가 멈칫하더니 갑자기 호칭과 그녀를 대하는 말투도 싹 바꾸어 친근하게 말했다.
“미미, 애가 옆에 앉거라.”
정미는 얌전히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정미의 강점은 누구 앞에 있든 기죽지 않고 담담한 태도를 보여 또래 소녀에게서는 보기 드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태후는 보면 볼수록 정미가 마음에 들어 떠보듯 물었다.
“미미, 이제 열여섯 살이지?”
“예, 내년이면 열일곱이 됩니다.”
“곧 다 큰 아가씨가 되겠구나. 혼담은 아직 없느냐?”
“혼사는 당연히 어머니와 다른 어르신들께서 정하시는 일이지요. 허나 지금은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을 따라 부술 연구에 매진하고 싶어서요.”
태후의 마음이 급해졌다.
‘혼인하고 싶지 않다니, 그럼 내 손자는 어떡한단 말이냐!’
태후가 정미의 손을 잡아당기며 칭찬했다.
“이 새싹처럼 부드러운 손 좀 봐라. 미미야, 애가가 세월을 겪어온 사람으로서 조언하마. 사람은 때가 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단다. 때를 놓치면 그 시기만의 것을 누리지 못하게 돼.”
정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자 태후가 웃었다.
“총명한 아이니, 애가의 말을 알아들었겠지. 그럼, 애가가 네 중매인이 되어주는 건 어떻겠느냐?”
“태후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