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골치 아픈 황제
자녕궁으로 돌아온 정미는 침상 머리맡의 병풍에 비스듬히 기대어 소리 없이 울었다.
한참 후, 정미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목의 팔찌 위에 천천히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혜―”
오랜 정적 끝에, 아혜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인 줄 알았네. 다신 나와 말도 하지 않을 거라며?」
“아혜, 배우고 싶은 게 있어.”
정미가 간절한 말투로 말했다.
‘사부님도 오라버니의 혈주를 풀 수 없다면, 마지막 희망은 아혜 뿐이야.’
「배우고 싶은 거?」
아혜가 피식 웃었다.
「말해봐.」
“혈주를 어떻게 푸는지 알아?”
「혈주? 그건 왜 물어?」
아혜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
“내 둘째 오라버니가 알고 보니 적황자였거든. 오라버니도 남안왕처럼 선천적으로 혈주를 타고났대. 사부님의 말로는, 주술사가 제 목숨을 대가로 용씨 황족에게 저주를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어. 사부님도 이 혈주를 풀 방법은 없대. 하지만 넌 백 년 전의 사람이고 부법도 뛰어나니까, 혹시 방법을 알고 있을까 해서―”
정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혜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혜?”
정미는 아혜의 웃음소리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악한 웃음소리가 마침내 멈추었고, 아혜가 또박또박 말했다.
「정미, 그 저주를 내린 사람이 누군지 정말 모르는 거야? 하하하하, 나잖아!」
정미는 머리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느꼈다.
아혜가 웃으며 말했다.
「네 둘째 오라버니가 적황자라고? 그럼, 차기 황제가 될 태자로 책봉되었겠지?」
정미는 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뱉을 수 있었다.
“아혜,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어째서냐고?」
아혜의 목소리에서 깊은 원한이 느껴졌다.
「용씨 황족들 중 뛰어난 자손들은 오래 살지 못하게 만들고, 능력 없는 황자가 황위에 오르다가 결국 대량의 주인이 바뀌게 하려고!」
“복수하는 거야?”
「그래. 그들이 태자를 위해서 내 목숨도 앗아갔는데, 내가 복수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태자의 목숨은 중요하고, 나 정교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아혜는 점점 더 흥분했다.
「넌 네 자신의 피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의 몸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평생 겪어보지 못할걸. 마음 같아선 용씨의 모든 자손에 저주를 내리고 싶었다고. 그러기엔 힘이 모자랐을 뿐!」
정미는 간담이 서늘해져 한참 뒤에야 입을 뗐다.
“우리 선조께서 네 피로 태자의 목숨을 구했을 때, 용씨 황족은 그 상황을 모르고 있었잖아?”
「그게 뭐 어때서? 어쨌든 용씨가 내 피로 황가의 혈통을 잇고 있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당시 태자가 살아나자 용씨는 훌륭한 계승자로 황위를 이을 수 있었고, 정씨 가문에 작위를 하사했지. 나보고 그저 그 결과를 위한 희생양으로 남으란 소리야? 정미, 네가 나였다면 원망하지 않을 것 같아?」
정미가 침묵했다.
「대답해, 대답하라고!」
아혜가 길길이 날뛰었다.
“아혜―”
정미가 무거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알려줘. 저주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해?”
「저주를 푼다고?」
아혜가 피식 웃었다.
「정미, 어떻게 아직도 그렇게 천진난만할 수 있어? 내가 왜 널 도와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그래, 그럼 네 몸을 줘!」
아혜가 또박또박 말했다.
정미가 대답하지 않자, 놀리듯 물었다.
「왜, 아쉬워? 잘 생각해 봐. 네 몸만 주면 네 둘째 오라버니의 건강은 보장해준다니까?」
아혜는 바깥을 볼 수 없었지만, 정미는 저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세우고 단호히 말했다.
“아니, 그 요구는 절대 들어줄 수 없어!”
아혜는 정미가 이리 깔끔히 거절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듯, 한참 뒤에야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네 마음은 겨우 그 정도인가 보네.」
정미가 팔찌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넌 모르겠지만, 오라버니는 내가 내 자신이 아닌 걸 알게 되면, 차라리 곧바로 죽으려고 할걸. 오라버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아혜, 돕지 않겠다면 됐어. 나 혼자서 방법을 찾아볼게.”
‘우리 둘 다 같은 부의야. 아혜가 저주를 내릴 수 있다면, 나도 저주를 풀 수 있을 거야!’
「그래, 네가 어떻게 네 오라버니를 구하는지 두고 봐야겠다!」
정미는 더는 아혜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팔찌 위에 얹은 손을 내려놓았다.
‘저주는 서금과에 속해. 어차피 앞으로 내가 전공하려던 과목이니, 최대한 빨리 방법을 찾아야겠어.’
* * *
건청궁 안, 창경제는 수시로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황상, 저녁 수라를 드실 시간입니다.”
주홍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들고 싶지 않다!”
창경제가 뒤돌아버리자, 주홍희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큰일 났다. 황상께서 식사를 거르시다니, 분명 아주 심각한 상황일 게야!’
“황상, 수라를 들지 않으시면 내일 아침 조정에서도 힘이 없으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언관들이 또 듣기 싫은 소리를 할 테고요. 그러니 식사를 거르시면 안 됩니다―”
“입 닥쳐라!”
창경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주홍희를 휙 걷어찼다.
“짐이 지금 언관들을 신경 쓸 때냐? 가서 태자를 불러오거라!”
“예, 곧바로 태자 전하를 모셔와 함께 식사를 드시게 하겠나이다.”
주홍희는 부랴부랴 달려나갔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창경제는 또다시 슬퍼하며 한숨을 쉬었다.
‘태자가 정말 남색을 즐긴단 말인가?’
잠시 후, 정철이 들어왔다.
“부황을 뵙습니다.”
창경제가 힘없이 정철을 훑어봤다.
정철은 새것 같은 청색 평복에 옥관을 쓰고 있었고, 자세는 소나무보다도 꼿꼿했다.
창경제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부분의 여인들보다 제 외모가 더 출중해서 아무도 눈에 들지 않는 건가? 그럼 또 조금 이해가 되는군…….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창경제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정철의 머리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태자, 벌써 목욕을 했느냐?”
정철의 귀 끝이 달아올랐다.
“예, 땀이 조금 나서 간단히 씻었습니다.”
창경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끝났군, 아가씨들보다 더 깔끔을 떨다니!’
“부황?”
정철은 갑자기 황상이 어렵게 느껴졌다.
‘그저 목욕을 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가슴 아픈 표정을 짓는 거지?’
“용경, 수도의 규율대로라면, 소성년식 이후부터 널 모시는 통방이 있을 텐데, 네가 동궁에 들어왔으니 그 통방도 같이 들여와야지 않겠느냐.”
“부황,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백부에서 제게 마련해준 통방은 한 번도 제 시중을 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제 사동과 이어주었습니다.”
정철이 솔직히 말하자, 창경제는 왠지 가슴이 한결 가벼워져 떠보듯 물었다.
“그럼 그동안 한 번도 남녀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게냐?”
정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안 되지. 넌 황태자다. 자손을 낳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지. 그럼 오늘 짐이 여관(女官) 넷을 보내 널 모시게 하마.”
“부황!”
정철은 깜짝 놀랐다.
‘이런 일은 대부분 어머니 쪽이 맡지 않나? 아무리 지금 내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태후께서 맡아야 마땅하거늘, 어찌 황상께서 이리 신경을 쓰신단 말인가? 게다가 한 번에 네 명이나! 뭔가 이상해. 분명 이유가 있을―’
정철은 문득 떠올랐다.
‘얼마 전, 안양 공주가 궁에 찾아왔었지.’
그러자 창경제의 이상한 태도도 어렴풋이 이해가 갔고, 왠지 우스워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자, 부황과 식사나 들자꾸나.”
정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음?”
정철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부황, 안 될 것 같습니다.”
“안 되다니?”
창경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 앞에서 안 된다는 말을 저리 당당하게 하다니!’
정철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부황, 저는 보통 사람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잠깐!”
창경제가 정철의 말을 끊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용경, 넌 이제 태자다. 보통 사람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고치도록 해라.”
정철이 눈을 내리깔고 겨우 웃음을 숨겼다.
“저도 고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평범한 외모의 여인에겐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평범한 외모?”
창경제가 호탕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건 걱정 말거라. 황궁 안엔 평범한 외모의 여인이란 없으니!”
“하지만 제 눈에 보이는 궁녀들은 모두 평범했습니다.”
“그럼 어떤 여인이 네 마음에 드느냐?”
창경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여인에게 흥미가 있는 거라면, 아직 여지가 있구나!’
“흠…….”
정철이 난처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말했다.
“최소한 현미 정도는 되어야지요. 부황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현미와 함께 자라왔기에 현미보다 못한 여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창경제의 말문이 막혔다.
‘결국 여인에게 흥미가 없단 소리 아닌가!’
창경제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합의하자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현미를 태자비로 삼는 건 어떠냐?”
정철의 얼굴이 곧바로 붉어졌다.
“부황, 농을 치시다니요. 다른 사람들은 저희를 그저 남매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위국공부의 어른들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 건 중요치 않다. 현미를 태자비로 간택하는 게 좋으냐, 싫으냐?”
정철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자, 창경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극구반대하지만 않으면 된다. 만약 현미를 그저 여동생으로만 생각한다면서 현미보다 용모가 출중한 여인을 찾으라니, 그건 사내만을 원하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부황―”
정철이 창경제의 말을 끊었다.
“부황, 예전에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국사께서 제 운명이 특별하여 사주팔자가 맞는 여인이 아니면 혼인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창경제가 이마를 짚었다.
“그랬었지. 사주가 맞지 않으면 요절하게 된다 했던가!”
창경제의 말에, 정철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당시 황상의 사혼을 피하기 위해 이 핑계를 둘러댔다가, 이후 친부모의 신분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어 일부러 국사를 찾아갔었지. 내 혼사를 논하게 될 때, 미미의 사주팔자가 나와 가장 맞다고 말해 달라 부탁했고, 국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를 수락했어. 그래서 정말 요절하게 되는 건가? 국사께선 내가 그리 부탁하니 허락해주신 걸까, 아니면 어차피 내 명이 길지 않음을 알아보시고 허락해주신 걸까?’
정철이 잠시 넋이 나가 있자, 창경제는 그가 슬퍼하는 줄 알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경아, 걱정 말거라. 짐이 내일 바로 국사를 궁에 모셔 어떤 사주팔자를 가진 여인이 너와 맞는지 여쭤볼 테니.”
“망극하옵니다.”
식사를 마친 뒤, 정철이 동궁으로 돌아가자 창경제는 자녕궁으로 향했다.
태후도 이제 막 저녁 식사를 마치고 복도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던 참이었다. 정미는 그 옆에 서서 복도의 등불로 책을 보고 있었다.
“황상, 무슨 일이십니까?”
태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창경제가 정미를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모후,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미, 일단 돌아가 일찍 쉬세요. 책은 내일 낮에 보시고요. 눈이 상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정미는 두 사람에게 몸을 숙여 인사하고는 책을 안고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