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비바람
“황제 폐하 납시오―”
창경제가 안으로 들어왔고, 그 뒤로 주홍희가 뒤따랐다.
“오, 다들 와있었구나.”
창경제는 정철을 잠시 쳐다보았다가, 방금 밀정의 보고를 떠올리자 또 속이 안 좋아졌다.
‘남안왕, 임랑, 위무행, 아, 사동 팔근까지. 이 사람들이 바로 용경이 최근 가까이 지낸 사람들이라지. 사동은 그렇다 쳐도, 다른 세 사람은 다들 용모가 출중한 자들 아닌가. 그리고 용경은 한 번도 통방과 동침하지 않았다고까지 했지. 게다가 그 통방과 사동을 이어줄 생각까지 하고 있고! 그럼 최근 용경과 가장 가까이 지낸 여인은 바로―’
창경제의 시선이 정미에게 꽂혔다.
‘이거 정말 큰일이군. 용경이 정말로 남색을 즐긴단 말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현미 도장과 아들을 이어주는 게 낫지. 최소한 여인이기라도 하니! 뭐, 여동생이니 안 된다고? 예법 상으로도, 혈연 상으로도 여동생이 아닌데, 내 아들이 남색만 아니라면 조금도 상관없다!’
“부황을 뵙습니다.”
정철이 인사를 올리자, 창경제는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용경, 이제 적응이 좀 되었느냐?”
“부황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창경제가 자리에 앉아 단 노부인에게 말했다.
“노부인, 편히 계시오. 오늘은 요리도 평소 식사와 다름없고, 짐도 식사를 얻어먹으러 왔을 뿐이니.”
태후가 웃었다.
“황상의 말이 맞네. 노부인, 그대들은 경이의 가족이니, 편하게 대해도 좋네.”
태후가 창경제를 쳐다보며 말했다.
“황상께서도 노부인과 명주에게 감사하셔야지요.”
“아, 모후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이미 용경을 처음 주웠던 정씨 일가에 양전(良田) 백 경(頃)과, 벼슬을 하사하여 세를 면하게 해주었습니다.”
정미는 깜짝 놀랐다.
‘아홉째 당숙부한테 관직을 하사했다고?’
정미는 갑자기 앞이 막막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돌고 돌아 결국 꿈속과 똑같은 장면이 일어나는구나. 그럼, 오라버니의 운명도 마찬가지일까?’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한 일이지요. 어찌 되었든 간에, 경이는 그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회인백부는 지금도 처지가 그리 나쁘지 않으니, 따로 포상을 내리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 그 부분은 짐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허나 한 부인에겐 역시 감사를 표해야겠지요―”
한 씨가 급히 말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신녀는 지금 부족함 없는 생활을 누리고 있사옵니다.”
창경제가 정미를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짐이 현미를 공주로 봉하는 건 어떻소? 용경, 어찌 생각하는가?”
‘음, 용경이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현미를 며느리로 삼는 희망을 가져 봐도 되겠지!’
정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부황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자 정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급히 일어난 탓에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정미!”
한 씨가 경고하는 눈빛으로 정미를 노려봤다.
정미는 가슴이 칼에 베인 것만 같은 느낌에, 한 씨의 눈총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정철을 빤히 노려볼 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빛을 보나 했더니, 결국 오라버니를 포기해야 할 줄이야!’
“현미진인, 도대체―”
창경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미는 꼿꼿이 서서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저는 평소 제멋대로 구는 습관이 배여, 그런 구속이 많은 지위는 가질 수 없습니다. 황송하오나, 폐하의 호의를 저버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오, 괜찮다. 괜찮아. 마저 식사하게.”
단호히 거절당한 창경제가 멋쩍은 듯 말했다.
태후는 분위기를 완화시키려 말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현미는 남아서 애가와 며칠 지내주게.”
“예.”
‘바라던 바다. 오라버니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반드시 물어볼 생각이었으니까!’
식사 후, 단 노부인과 한 씨는 작별 인사를 올린 뒤 출궁했고, 정미는 궁에 남게 되었다.
태후가 정미를 남긴 이유는 당연히 황후의 치료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미는 지금 그럴 여유가 없었기에, 아무 핑계나 대고 정철을 만나러 동궁으로 향했다.
“태자 전하, 현미진인께서 오셨습니다.”
“음……. 들라 하게.”
정미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자, 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맞이했다.
“한창 더울 때인데, 왜 왔어?”
“태자 전하와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궁인을 물러주실 수 있습니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결국 정철은 한숨을 쉬더니 궁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정철이 조용히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당장이라도 코끝이 닿을 만큼 바짝 다가와 정철에게 물었다.
“태자 전하,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제 어느 점이 부족하여 태자비의 자리에 걸맞지 않은 겁니까?”
정철이 뒷걸음질 치자, 정미가 다시 다가왔다. 그렇게 침상 난간까지 몰린 정철은 그제야 작게 말했다.
“그런 게 아냐.”
“그럼 제게 왜 그리 서먹하게 대하시는 겁니까?”
정미는 고개를 들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미가 울자, 정철은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미미, 내 말 좀 들어봐―”
“쓸데없는 변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정미는 정철이 방심한 사이 곧바로 그의 입술을 덮쳤다. 부드러운 혀가 살짝 벌려진 그의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뒤엉켰다.
정철은 완전히 멍해졌다.
정미는 정철을 힘껏 침상 위로 밀어 덮쳤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입술과 부드러운 몸이 느껴졌고, 가늘고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정철은 이성의 끈을 놓고 정미에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냘픈 꽃봉오리를 조심스럽게 적시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가 몰아치는 비바람처럼 점점 거세졌다.
그 귀한 자단나무 침상도 둘의 비바람을 견뎌내지 못하고 삐걱거렸고, 검푸른 색의 휘장이 휘날리며 그 위에 달린 향구(香球)가 끊임없이 흔들리자 짙은 향이 방 안 가득 퍼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정취에 깊이 취해갔다.
비단옷이 하나씩 침상 밖으로 던져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정철은 마침내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 힘겹게 입을 뗐다.
“미미―”
정미는 입술을 꽉 깨물고 정철의 손을 잡아 제 가슴 위에 올렸다.
“태자 전하, 이제 설명해주세요.”
정철은 감전이라도 된 듯 손을 떼더니, 소녀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은 뒤 옆으로 옮겼다. 그는 다급히 얇은 이불을 잡아당겨 곡선이 뚜렷한 소녀의 몸을 가려주고는, 침상에서 내려와 청옥 바닥에 떨어진 옷을 급히 주워 몸에 걸쳤다.
정미는 다급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아, 가녀린 손을 이불 위에 올린 채 눈을 가늘게 뜨고 허둥지둥 옷끈을 매는 정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철은 몇 번이나 실수하고 나서야 완전히 차려입을 수 있었고, 그제야 침상 위에서 얇은 이불 한 장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정미를 발견했다. 드러난 가녀린 목과 새하얀 어깨에 다시 온몸이 달아오르는 듯했지만, 애써 참아내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미, 옷부터 입어.”
정미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아니, 설명 먼저.”
“미미―”
정미가 고집스런 태도로 꿈쩍도 하지 않자, 정철은 어쩔 수 없이 다가가 두꺼운 이불을 끌어 올려 정미의 어깨를 가려주며 한숨을 쉬었다.
“바보야, 나도 사내야. 내 자제력을 시험하면 안 돼.”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음대로 해도 돼. 상관없어.”
‘어차피 오라버니에겐 목숨도 아깝지 않으니까, 이까짓 몸뚱이쯤이야. 게다가 방금 오라버니의 반응에 아주 기뻤는걸.’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소녀의 얼굴이 순간 복사꽃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정철은 그런 정미를 도저히 내칠 수 없었지만,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미가 정철에게 다가왔다.
“오라버니, 자녕궁에서 왜 내게 그런 태도로 대했던 거야? 내가 거절하지 않았으면 정말 공주가 되게 내버려 두고, 다시 남매가 될 생각이었어?”
“그건―”
“핑계 대지 마. 거짓말은 용서 못 해.”
정미가 이불을 꽉 붙잡고 매섭게 말했다.
“거짓말하면, 황상의 말대로 공주가 되어 안양 공주처럼 면수를 아주 많이 기를 거야!”
‘응, 황상께는 이미 면수를 기르는 공주가 하나 있으니까. 하나 더 늘어난다 해도 금방 적응하시겠지.’
“정미, 그렇게 되면 내가 절대―”
정철은 화가 나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정미가 도발하듯 아래턱을 치켜들었다.
“어찌, 태자 전하께서 공주부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개입하시려고요?”
그러고는 정철에게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말했다.
“오라버니, 알지?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거.”
정철이 눈을 질끈 감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맞아.”
“응?”
“내 말은, 자녕궁에서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게 맞다고.”
“오라버니!”
정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철을 빤히 노려보다가 정철의 눈에 슬픔이 드러나자 가슴이 아파 와 물었다.
“어째서?”
정철은 침묵했다.
정미는 빠르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내면서도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라버니는 그렇게 쉽게 날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 설마―’
정미가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
“사부님께서 오라버니와 남안왕의 병증에 대해 말씀하셨어?”
정철은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하셨어?”
정미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에 손을 벌벌 떨었다.
‘어쩐지, 어쩐지 사부님께 여쭤봐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고 하더니, 뭔가 큰일이 있었구나!’
정철은 이런 상황에 이르자,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조용히 한숨 쉬고는 정미에게 알려주었다.
“국사께서 말씀하시길, 나와 남안왕은 선천적으로 혈주를 타고났다고 하셨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럼 오라버니는…….”
정미는 숨이 턱 막혀와 말을 잇지 못했다.
정철은 정미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아채고 솔직하게 말했다.
“빠르면 1년, 최대 3년이야.”
정미는 완전히 멍해져서는 손에 힘이 풀려 이불을 놓쳤다.
정철이 바닥에 있는 옷을 주워 정미에게 하나씩 입혀주었다.
정미가 갑자기 정철의 손을 붙잡았다. 정미의 눈물 한 방울이 맞잡은 두 손 위에 떨어졌다.
“오라버니, 그래서 날 포기한 거야? 오라버니가 없으면 내가 다른 사람과 혼인할 거라 생각했어?”
정미는 말할수록 가슴이 아파 왔다.
“오라버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든 간에, 그동안이라도 진정한 부부가 되어 행복하게 지내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진 않은 거야?”
“당연히 알지―”
정철이 정미의 눈물을 닦아주며 작게 말했다.
“내가 그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정철이었다면, 당연히 최대한 빨리 너와 혼인했겠지. 그럼 우리 아이가 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까진 듣고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 하지만, 난 지금 태자잖아.”
“그게 뭐 어때서?”
정철이 몸을 기울여 정미의 입가에 입을 맞췄다.
“바보야, 우리에게 적자가 생기면 나중에 둘만 남았을 때 어떻게 무사히 지낼 수 있겠어?”
정미가 정철의 품속으로 들어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나와 차마 혼인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지금 날 가져. 난 오라버니를 가지고 싶어.”
정철이 정미를 꽉 끌어안고 작게 웃었다.
“어떻게 혼인하지 않을 수 있겠어. 네가 면수를 기른다는데. 그렇게 되면 죽어서도 편히 눈감지 못할걸―”
정미가 정철의 입을 막았다.
“그 소린 하지 마. 우리에게 겨우 일 년의 시간밖에 없다고 해도, 우린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할 거야. 그러니까 빨리 나와 혼인해.”
정철이 다정한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