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혈주(血呪)
회인백부.
정수문에겐 태묘의 의식을 참관할 자격이 없었지만, 소식은 빠르게 회인백부까지 퍼졌다.
“둘째 나리, 노부인께서 부르십니다.”
정수문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나가라, 혼자 있고 싶다.”
‘정철이 황상께서 잃어버렸던 적황자라고?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꿈이겠지?’
정수문은 천천히 손을 뻗어 스스로를 꼬집어봤다.
통증이 느껴지자, 그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꿈이 아니라니!’
정수문은 넋이 나간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종이 입구에서 외쳤다.
“둘째 나리, 노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정수문이 고개를 들었다.
맹 노부인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엄숙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둘째야, 수도에 퍼진 소식이 사실이냐?”
정수문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태묘 앞에서 친자 확인도 거쳤고 황태자로 책봉까지 되었습니다.”
맹 노부인이 뒷걸음질 치더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철이가 태자라고?”
정수문은 짜증이 밀려와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정철이 지금도 여전히 백부의 공자였다면, 황상께서 우리 회인백부를 푸대접하실 리는 없지 않은가. 만약……, 만약 한 씨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간 정철을 키운 정이라는 명분이 우리 회인백부에 남아있었다면, 태자가 된 양사자가 보답하지 않을 리 없지 않느냔 말이야!’
“이렇게 될 운명인가 봅니다. 한 씨와 이혼한 뒤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더군요.”
정수문이 중얼거리자, 맹 노부인은 앞섬을 움켜쥐며 점점 안색을 굳혔다.
“둘째야, 철이가 태자라고? 말도 안 된다. 믿을 수 없단 말이다!”
맹 노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정수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럼, 그때 우리가 한 씨의 혼수와 황태자를 맞바꿨단 말이냐?”
정수문이 후회 가득한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예.”
“고작 마을 하나와 태자를 맞바꾸다니……. 하하하, 참 우습구나. 참 우스워! 그럼 나는 무얼 위해 몇십 년간 회인백부를 알뜰살뜰히 꾸려왔던 게냐? 다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맹 노부인이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정수문이 당황하며 말했다.
“어머니―”
그때, 맹 노부인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정수문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이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의원을 모셔와라!”
반 시진 후, 방 안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중풍에 걸리셨습니다. 더 뛰어난 의원을 모셔야겠습니다.”
‘중풍?’
사람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맹 노부인은 전신이 경직된 채 침상 위에 누워있었고,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귀는 열려있었기에, 의원의 말을 듣고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맹 노부인의 입 밖으로 침이 흘러나왔다.
정수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태의를 모셔오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중풍에 걸린 맹 노부인은 이제 산송장이나 다름없다는 것임을.
* * *
안양 공주부 안, 소식을 들은 안양 공주는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정철이라니? 정확히 누굴 말하는 게냐?”
“아이고, 공주 전하. 정철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예전에 전하께서…… 큼, 하여간 그 정철이지요.”
‘내가 마음에 둔 그 정철?’
안양 공주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큰일 났다. 정가 둘째가 태자가 되다니, 그럼…… 내 동생이란 소리잖아?’
안양 공주는 이마를 짚었다가 붉어진 제 뺨을 여러 번 내리쳤다.
‘남동생을 마음에 두다니! 게다가 만천하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니!’
이 잔혹한 현실이 떠오르자, 안양 공주는 이마로 바닥을 쿵 내리치고만 싶었다.
‘잠깐!’
안양 공주가 천천히 일어나 앉더니,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큰일 났다. 정철은 사내를 좋아하잖아. 부황께선 알고 계신가?’
안양 공주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즉시 궁으로 향했다.
“안양, 무슨 일이냐?”
유왕과 평왕의 소란을 겪은 창경제는 지금 이 골칫덩이 공주를 전혀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당장 태자를 곁에 불러 하나씩 가르쳐주며 서로 친해지기에도 마음이 급했다.
“부황, 적황자를 되찾아 황태자로 책봉하셨다 들었습니다.”
안양 공주의 질문에 창경제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맞다. 이 녀석, 제 남동생을 마음에 두었었지! 정말 엉망진창이로군!’
창경제는 괴로운 듯 이마를 팍팍 치더니 차갑게 물었다.
“그래서?”
안양 공주는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내며 말했다.
“부황, 태자 책봉을 너무 서두르신 것 아닐까요?”
“안양, 이의라도 있는 게냐?”
창경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시끄러운 대신들도 이번엔 아무 말 않더니, 공주가 이리 나설 줄이야. 설마, 아직도 마음을 접지 못한 겐가?’
“부황, 저는 그저…… 적황자를 되찾자마자, 그 아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태자로 책봉하셨기에…….”
창경제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안양,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보거라.”
‘아니면 그때의 일이 응어리로 남아 태자를 괴롭히려는 건가?’
안양 공주는 창경제의 언짢은 모습에 잠시 망설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부황, 태자에게 숨겨진 병이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뭐라?”
창경제의 눈빛이 매서워지자, 안양 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모르셨군요.”
“무슨 병이냐, 똑바로 말하지 못하거라!”
안양 공주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작게 말했다.
“부황, 태자는 사내를 좋아합니다!”
덜그럭 소리와 함께 창경제의 손가에 있던 찻잔이 엎어졌다.
안양 공주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창경제의 손에 묻은 찻물을 닦아냈다.
창경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안양 공주를 빤히 노려봤다.
“안양,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
안양 공주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사람을 보내 태자를 미행하다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
안양 공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어찌 마음을 접을 수 있었겠습니까?”
창경제는 완전히 멍해졌다.
“부황?”
창경제가 손을 내저었다.
“우선 돌아가거라.”
안양 공주가 떠나자마자, 창경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저 멀쩡한 아들 하나만 바랄 뿐인데, 어찌 이리 험난하단 말인가!’
“여봐라, 태자가 최근 친근하게 교제한 사람들을 조사하거라. 여인은 더 각별히 주의해서 조사해야 한다!”
창경제는 차마 동궁으로 정철을 보러 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창경제가 며칠 동안 어두운 표정으로 조정으로 나온 탓에 문무백관들은 몹시 어리둥절했다.
* * *
정미는 소식을 들은 뒤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가…… 진짜 태자가 됐다고?”
한 씨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래, 그동안 출신 때문에 그리 고생했는데 드디어 하늘이 도우시는구나.”
정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늘이 돕는다고? 하늘이 내게 장난을 친 거겠지! 오라버니가 태자가 되면, 마음대로 나와 혼인할 수 있겠냐고!’
“미야, 왜 그러니?”
정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에요. 너무 놀라서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단 노부인과 한 씨, 그리고 정미에게는 황궁의 연회에 참석하라는 태후의 의지(懿旨)가 도착했다.
세 사람은 단장을 마친 뒤 마차를 타고 급히 황성으로 향했다.
* * *
동궁은 새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창문의 휘장마저 단장을 마친 상태였다.
정철은 남색 평복을 입고 정원의 정자에 앉아있었고, 그의 맞은편엔 백포를 입은 청령진인이 앉아있었다.
“국사, 이미 갈피를 잡으신 게지요?”
정철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청령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 전하와 남안왕의 독은 후천적인 중독이 아니라, 배 속에서부터 타고난 독입니다.”
“태독(胎毒) 말입니까?”
“아니오, 태독이라기보단 혈주(血呪)라 하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 혈맥에 흐르는 주술 중 하나로, 주술사의 목숨을 대가로 원한이 깊은 사람에게 저주를 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후손들은 대대로 혈주를 타고나게 되지요. 아마 황실에서 예전에 어떤 유능한 술사의 원한을 샀던 것 같습니다.”
정철은 의아했다.
“하지만 저와 남안왕은 조금 다릅니다. 남안 왕숙께선 어려서부터 허약해 약을 입에 달고 지내오셨는데, 제 몸은 늘 건강했습니다. 그저 근 2년 전부터 조금씩 이상이 있었을 뿐이지요.”
청령진인이 정철을 빤히 쳐다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예. 그래서 남안왕은 계속 허약한 몸으로라도 지내올 수 있었으나, 태자 전하는 병이 갑자기 들이닥쳤기에…….”
정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국사, 그 말씀은…….”
정철은 입을 꾹 다물더니 차분히 물었다.
“제 몸이 남안 왕숙보다 더 심각하단 뜻입니까?”
청령진인은 침묵으로 정철의 물음에 답을 주었다.
정철은 꽉 쥐었던 주먹을 풀고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제 몸은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빠르면 1년, 최대 3년입니다.”
정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청령진인에게 읍을 했다.
“정미에겐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청령진인을 보낸 뒤, 정철은 정자에서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자녕궁에서 그를 모시러 오자 그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자녕궁 안.
태후는 다정다감하게 단 노부인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미는 한 씨 옆에 조용히 앉아있었으나, 마음은 이미 저 멀리 있던 탓에 수시로 입구를 쳐다봤다.
“태자 전하 납시오―”
정미는 그제야 입구에서 급히 시선을 거두고 눈을 내리깔았다.
정철이 미소 띤 얼굴로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태후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손을 흔들었다.
“경아, 이리 오거라.”
정철이 앞으로 다가가 태후에게 예를 갖췄다.
“황조모님을 뵙습니다.”
이어서 단 노부인과 한 씨에게 인사를 건넨 정철은 정미에게 시선을 주더니 웃으며 말했다.
“며칠 못 봤다고 저번보다 기운이 좋아 보이는구나, 미미.”
정미는 정철을 빤히 쳐다보았고 왠지 가슴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예전의 오라버니는 다 나으면 내게 직접 국을 끓여줄 거라고까지 했는데. 이제 태자의 신분이니, 태후 앞에선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겠구나.’
정철이 시선을 옮겨 태후를 보며 미소 짓곤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황조모님.”
“그렇지 않단다. 자, 어서 앉거라.”
그러고는 태후가 단 노부인과 한 씨를 보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는 애가가 경이 대신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불렀단다.”
“아닙니다, 태후마마. 하늘이 길인을 도왔을 뿐이지요.”
단 노부인이 겸손하게 말했다.
잔과 접시가 연이어 상에 올랐고, 정철은 직접 태후와 단 노부인, 한 씨에게 음식을 덜어준 뒤 정미에게 웃으며 말했다.
“자녕궁의 대추떡은 특히나 부드럽고 달콤하니, 먹어봐.”
정미는 은젓가락을 꽉 쥐었으나 그 순간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라버니의 태도가 좀 이상해! 내가 바보도 아니고, 오라버니의 애정을 느껴본 이후에 어찌 이런 미묘한 차이를 지나칠 수 있겠어. 지금 오라버니는 말투, 행동, 그리고 눈빛까지도 그저 여동생을 대하는 오라버니의 모습이잖아! 이게 뭐야? 태자가 됐다고 지금 나랑 선 긋는 거야?’
정미는 가슴이 아파져 눈을 들어 정철을 빤히 쳐다보다가 일부러 떠보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정철은 잠시 멈칫하더니, 평소의 표정을 되찾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미, 계속 둘째 오라버니라 불러도 돼.”
“빈도가 어찌 감히요.”
정미가 입을 꾹 다물고 차갑게 말했다.
‘나쁜 오라버니. 무슨 이유든 간에, 나와 혼인하지 않으면 그냥 진정한 도사가 되어버릴 거야.’
정철은 당연히 정미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기에 순간 마음이 씁쓸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내시가 외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