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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338화 (337/375)

338화. 태자 책봉

노위국공의 맑은 눈빛이 창경제의 얼굴을 스쳤다. 이어 여기 억지로 끌려온 듯한 유왕을 쳐다봤다가, 뒤이어 평왕과 문약하고 앳된 오황자, 마지막으로 이런 장소에서도 집중하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육황자를 쳐다보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라렸다.

‘황자들 꼬락서니하고는, 황상께서 큰 이득을 보셨군!’

노위국공이 속으로 분해하는 가운데, 유왕의 가슴이 싸늘해졌다.

‘적황자라고? 정철이 어찌 적황자일 수 있겠는가! 그 황자는 분명 20여 년 전 죽었을 텐데?’

유왕은 옥계단 위 현포를 입은 채 서 있는 청년을 빤히 쳐다봤다가, 옆에 있는 창경제를 쳐다보았고, 가슴이 점점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부황께서 모비를 속였구나. 적황자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야. 그래서 모비를 사형시키고, 내 황태자 자리를 박탈한 거구나! 그 모든 게 오늘을 위한 준비였다고?’

유왕이 눈을 내리깔고 솟아오르는 후회와 원망을 꾹 참아냈다.

유왕 옆에 서 있던 평왕은 왠지 마음이 허해져 조용히 허벅지를 꾹꾹 눌렀다.

‘그럼 나는…… 쓸데없는 짓을 한 건가?’

창경제가 손을 들었다.

“의식을 시작한다!”

종정시경이 의식을 시작했다.

음악이 울렸고, 정철은 종정시경의 장엄하고 엄숙한 노랫소리에 맞춰 제왕석을 향해 한 걸음씩 올라갔다.

태묘 앞에 얼마나 오랜 시간 세워져 있었는지 모를 제왕석은 일 장(*약 3m) 정도의 높이였고, 매끄럽게 잘린 석벽으로 청묵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용과 봉황의 기운을 가진 황자가 제왕석에 피를 떨어트리면, 반드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적혀있었다.

사람들은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백포를 입은 네 명의 소년이 비수와 흰 천을 들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정철이 비수를 들고 왼손 약지를 살짝 긋자, 손끝엔 곧바로 선명한 핏방울이 맺혔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핏방울을 제왕석 위에 떨어트렸다.

옥계단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머리를 내밀고 까치발을 들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과연 제왕석이 어떤 기이한 현상을 보일지 신기하면서도 조급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유왕과 평왕은 모처럼 마음이 통하고 있었다.

‘제발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기를. 제발!’

창경제는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엔 땀이 흥건했고, 시선은 잠시도 제왕석에서 떼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지만, 제왕석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옥계단 아래 있던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창경제가 무거운 표정으로 종정시경에게 물었다.

“피가 모자란가?”

종정시경이 가차 없이 대답했다.

“한 방울이면 족합니다.”

창경제의 안색이 점점 새파랗게 질렸고, 제왕석 앞에 있는 정철을 쳐다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유왕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참았다.

‘하하하, 결국 가짜였구나! 부황, 적황자를 너무나도 찾고 싶으셨나 봅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시다니요? 하하, 황제가 이 많은 대신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으니 정철의 목숨도 곧 끝장이겠구나!’

유왕은 눈을 돌리다가 평왕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피했다.

유왕이 속으로 비웃었다.

‘설마, 저 절름발이도 그 자리를 탐내고 있었던 건가? 참으로 우습군!’

평왕도 마찬가지로 비웃고 있었다.

‘가짜 주제에 뭐가 저리 뿌듯한지. 적황자가 없다 해도 폐위된 태자는 바라지도 못할 자리이거늘.’

옥계단 아래의 신하들이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제왕석에 아무 반응도 없다니, 정 대인은 적황자가 아니란 뜻인가?”

“허, 참으로 안타깝군. 이번 일로 정 대인 앞길도 막혀버릴 테니!”

노위국공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시력이 이 노인네만도 못하군! 석벽의 색깔이 점점 옅어지고 있지 않소!”

사람들은 깜짝 놀라 급히 제왕석을 자세히 살펴봤고, 그제야 변화를 눈치챘다.

칠흑 같던 석벽의 색깔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사이에 옅어진 것이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렸던 탓에 처음엔 인지하지 못했으나, 사람들이 눈치챈 뒤로는 점점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는 순식간에 투명하고 깨끗한 백옥으로 변했다.

중신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때 누군가 제왕석을 가리키며 감격한 듯 외쳤다.

“정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검은 돌이 백옥이 되다니요!”

그 순간 백옥이 갑자기 번쩍 빛을 내더니, 점점 투명해졌다. 그리고 구름과 안개 사이로 금룡이 머리를 내밀고 나오더니, 봉황의 울음소리가 천지에 울려 퍼졌다. 금룡이 빠르게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며 백옥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처음의 청묵색 제왕석으로 돌아갔다.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한참 뒤, 중신들이 갑자기 우르르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폐하, 적황자를 되찾으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적황자를 되찾으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이 말은 창경제의 가슴을 울렸다.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제왕석 옆의 정철을 쳐다봤다.

정철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래, 그래! 역시 짐의 아들이야!’

창경제가 후련해진 기분으로 드높이 외쳤다.

“방금 증명되었듯이, 정철은 짐과 황후의 아들이오. 정철은 장원의 재능과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무술을 겸비한 인재로, 성품이 공손하고 옥처럼 온화하여 짐은 정철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용경(容璟)이라 개명한다.”

창경제는 말을 마친 뒤, 대신들의 반란을 기다렸다.

‘흥, 반대하는 자는 호되게 욕을 퍼부어주마. 감봉도 물론이고. 마침 최근 천재지변이 끊이질 않아 국고가 모자란 참이니.’

하지만 현장엔 정적이 흐를 뿐이었다.

창경제가 천천히 사람들을 훑어봤다.

“이의 있는가?”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창경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잠깐,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잖아! 언관(言官)들은 어디 가고? 이런 일에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대신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반대할 리가 없지! 내시와 뒹굴고 태후의 연회에서 방귀나 뀌는 폐태자보단 지금의 황태자가 훨씬 나으니!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우리 대량에 마침내 훌륭한 황태자를 내려주셨군요.’

“아무 이의도 없다면,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 짓겠소.”

창경제는 여전히 뭔가 찝찝하고 허무한 기분이었다.

* * *

의식이 끝나고, 왕부로 돌아온 유왕은 생각할수록 속이 답답해 술병을 들고 꽃그늘 아래에서 홀로 술을 마셨다.

“하하하, 모비, 모비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였습니다!”

유왕이 고개를 젖혀 술을 한잔 들이켰다. 알싸한 느낌이 목을 지나쳤다.

“분명 사람을 시켜 적황자를 묻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그 적황자는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정철이라니, 어째서 정철이 적황자란 말입니까?”

유왕은 술병을 들고 붉은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담장 너머엔 평왕부가 있었다.

평왕이 떠오르자, 유왕은 피식 웃었다.

‘형님, 불난 집에 부채질하며 저를 비웃더니, 지금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둘 다 헛수고만 했군요!’

유왕은 눈을 질끈 감고 술병을 담장 너머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담장 너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누구냐, 어느 무엄한 놈이 본왕에게 술병을 던진 것이냐?”

평왕은 노발대발하며 담벼락을 기어올라서는 피가 철철 흐르는 이마를 잡고 욕을 퍼부었다.

‘안 그래도 짜증 나서 나무 아래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거늘. 갑자기 하늘에서 웬 술병이 날아온단 말인가! 술조차 못 마시게 하다니, 일부러 날 자극하는 건가?’

“유왕?”

담벼락 위에 선 평왕은 잠시 멈칫했다가 곧바로 화가 끓어올라 또박또박 따져물었다.

“자네가 술병을 던졌나?”

유왕이 눈을 끔뻑였다.

‘그냥 아무렇게나 던졌을 뿐인데, 평왕을 맞췄다고? 운이 지지리도 없는 놈이군!’

유왕이 비웃으며 말했다.

“형님도 나와 계셨군요?”

평왕이 이마를 감싸 쥔 채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술병을 던졌냐고 묻지 않나?”

“어…….”

유왕이 망설이자, 평왕은 즉시 담벼락에서 뛰어 내려와 아무 돌이나 집어 들어 유왕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형님!”

유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고, 돌이 휘이익 소리를 내며 눈앞에까지 다가왔을 때쯤에야 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유왕은 오랫동안 황태자의 자리에 앉아 사치스럽고 편안한 생활을 해왔고, 선천적으로 문약했기에 체구가 우람한 평왕을 이길 수 없었다. 유왕은 머리에 돌을 얻어맞고 피를 흘리며 기절해버렸다.

“자객이 나타났다! 왕야께서 쓰러지셨다!”

기척을 들은 하인이 이쪽으로 다가오다가 상황을 발견하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러댔다.

* * *

건청궁 안.

창경제는 정철의 일로 기쁠 새도 없이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아들을 상대해야 했다.

“부황―”

“부르지 말거라!”

창경제는 숨을 몇 번이나 고르고 나서야, 두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낼 수 있었다.

“적황자를 되찾아 천하와 함께 기뻐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거늘, 너희 둘은 그 시간에 치고받고 싸워 머리를 깨 먹었단 말이냐?”

창경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너희 둘, 짐의 결정에 불만이라도 있는 게냐?”

유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해명했다.

“부황,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술병을 아무 데나 던졌을 뿐인데, 마침 그곳에 형님이 계셨던 겁니다…….”

“사실이냐?”

창경제가 평왕을 쳐다봤다.

“용진, 유왕의 말이 맞느냐?”

“예.”

평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 성정이 안 좋은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지. 최근엔 황태자가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조금 생겨서 사리고 다녔지만, 이미 태자는 적황자로 정해졌다. 그럼 이제 참을 이유도 없지! 참아봤자 속에 화만 쌓일 뿐!’

창경제는 평왕의 뚱한 모습에 이를 악물고 꾸짖었다.

“용진, 네가 그러고도 형님이냐? 용침이 고의로 그런 게 아니거늘, 어찌 돌로 동생의 머리를 친단 말이냐!”

“취했나 봅니다.”

평왕은 무표정으로 대답하며 차가운 눈빛으로 유왕을 곁눈질했다.

‘아쉽게도 취한 탓에 손에 힘이 덜 들어갔다. 이 짝퉁을 살려두다니!’

“취했다고? 속상해서 술을 마셨던 게냐?”

창경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평왕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오해십니다. 우리 대량에 마침내 명실상부한 황태자가 생겼으니, 기쁜 마음에 술을 좀 많이 마신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 흥이 올랐을 때, 갑자기 술병이 날아왔습니다. 부황, 제가 제때 피하지 않았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유왕은 뭔가 불길한 예감에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부황, 저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기뻐서 그만―”

창경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너희 둘 다 돌아가 반성하고 있거라!”

평왕과 유왕이 물러난 뒤, 창경제는 깊은 한숨을 쉬었지만 오히려 조금 기쁜 마음도 들었다.

‘적황자를 찾아와서 정말 다행이구나. 황위를 물려줄 황자가 저 두 놈밖에 없었다면 차라리 손자에게 기대를 걸어야 했을 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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