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지난 마음
차라리 울고 싶은 정철과는 달리, 정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청관을 향해 달려갔다.
“푹 쉬라 하지 않았느냐?”
청령진인이 담담히 묻자, 정미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이 보고 싶어서요.”
옆에 있던 북명진인이 코를 쓱 매만졌다.
‘사매는 참 애교가 많군. 하지만 사부님은 백 살이 넘은 사람이라고. 이런 말엔 꿈쩍도 안 하실걸.’
그러나 북명진인의 예상과는 달리, 청령진인의 얼굴에 따뜻한 웃음이 피어났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북명진인은 기가 찼다.
‘사부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때 정미가 본론을 꺼냈다.
“오늘 태의서로 가 오라버니를 만났는데, 부상은 꽤 회복된 듯 보였으나 미간에 푸른빛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제자는 배움이 부족하여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어, 사부님께 가르침을 얻고 싶습니다.”
부의의 열세 가지 과목은 몹시 광대하여, 대부분의 부의들은 평생 한 과목도 정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정미에게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한 걸음씩 배워야만 했다.
청령진인이 웃음기를 거두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건 치료할 때부터 나도 발견했다. 그 푸른빛은 어쩔 땐 나타나고, 어쩔 땐 사라지더구나. 병은 아닌 것 같고, 독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맞지 않아…….”
“독이요?”
정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떠올라 표정이 크게 변하며 외쳤다.
“사부님, 독일 가능성이 큽니다!”
“음?”
청령진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정미는 조금 격앙되어 설명했다.
“남안왕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기운도 그렇고, 입술 색도 파랗게 질려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독에 중독되어 오랜 세월이 지나며 그 상태까지 이른 게 분명했어요. 오라버니의 미간에 어렴풋이 푸른빛이 보이는 건 아직 증상이 약한 걸 테고요. 사부님이 독을 얘기하지 않으셨다면 전혀 감도 못 잡았을 겁니다!”
부의의 망진은 환자의 기운을 주로 살펴보는 식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부의가 보는 환자의 기운과 안색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창백한 안색’이나 ‘혈색이 도는 안색’과는 완전히 다른 현묘한 것이었다.
청령진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중독 같진 않았다.”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부님, 저는 생각하면 할수록 오라버니와 남안왕의 증상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중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북명진인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사매, 언제 남안왕의 망진을 봤느냐? 부의의 망진은 털끝만 한 차이도 천 리만큼 다른 결과를 내지 않느냐…….”
정미는 말문이 막혔다.
그땐 부의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 잘못 봤을 가능성도 있었다.
청령진인이 입을 열었다.
“현미가 정철의 증상이 남안왕의 증상과 비슷하다 했으니, 북명, 네가 남안왕을 현청관으로 모셔오거라. 내가 한번 살펴보마.”
“사부님, 며칠 전 황상께서 역병을 구제한 사람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푸셨을 때도 남안왕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 외출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북명진인이 말했다.
“사부님―”
정미가 간절한 눈빛으로 청령진인을 쳐다봤다.
“알겠다. 북명, 내일 아침 나와 함께 남안왕부로 가자꾸나.”
북명진인의 수염이 떨렸다.
‘수석 제자 취급이 이게 뭐람. 나도 사부님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사부님,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정미의 말에 청령진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현미,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한다. 더는 심신을 소모해선 안 돼. 이 정도도 지키지 못하면 스승도 너를 도와주지 않겠다.”
정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고분고분히 대답하고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위국공부로 돌아갔다.
* * *
정미가 형무원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청가가 보고를 올렸다.
“아가씨, 세자께서 오셨습니다.”
‘지 오라버니가?’
정미는 한지가 하루 만에 두 번이나 찾아왔단 소식에 이해도 되지 않고 상대하기도 귀찮았지만, 위국공부에서 세자에게 너무 매몰차게 굴어봤자 좋을 게 없었기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들어오시라 해.”
한지는 형무원으로 들어갔다. 푸른 기와와 청색 담장 옆엔 잎이 무성한 석류나무가 한 그루 심겨 있었고, 석류나무에는 설익은 석류가 가지 끝에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그러자 한지는 정미와 함께 과일을 먹으며 놀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왠지 씁쓸해졌다.
‘어릴 적엔 둘도 없는 사이였지. 내 발소리가 들려오면 한껏 기뻐하며 달려 나와 날 맞이해주곤 했는데. 나로 인해 기뻐하고, 나로 인해 웃던 정미였는데……. 하지만 지금은 시종이 내 말을 전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되었구나.’
“세자, 아가씨께서 들어오시라 하셨습니다.”
청가가 나와 한지에게 예를 갖추며 말하자, 한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며 왠지 모르게 마음을 놓았다.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자, 차분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평상 위에 단정히 앉아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한지는 정미에게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방금 태의서에서 돌아온 거야?”
“현청관에도 다녀왔어요. 어쩐 일이세요?”
“아, 아침에 너무 급하게 왔다 간 것 같아서. 몇 마디 하지도 못했잖아. 그래서 다시 와봤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괜찮아요.”
한지는 도저히 이 무미건조한 대화를 이어갈 수 없어 옆에 있는 시종들을 흘끗 쳐다보더니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정미, 너와 따로 나누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정미가 환안과 시종들을 내보낸 후 조용히 한지를 쳐다봤다.
한지는 그 눈빛에 순간 제가 가진 의심이 터무니없다고 느꼈지만, 달리 다른 이야깃거리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말문을 열었다.
“정미, 너와 철 형님은…… 무슨 사이야?”
정미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한지가 당황하며 설명했다.
“너, 너와 철 형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어. 이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너를 해칠까 봐, 그래서 알려주러 왔―”
정미가 한지의 말을 끊어냈다.
“어디서 들었는데요?”
정미는 확신하고 있었다. 화서는 입이 가벼운 아이가 절대 아니었다.
“어…….”
한지가 조금 망설이자,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 알겠네요. 그 ‘소문’은 분명 사촌 올케언니한테 들으셨겠지요.”
“역시 헛소리지? 이미 따끔하게 경고해뒀―”
정미가 보석 장식품을 만지작거리며 차갑게 말했다.
“헛소리가 아니에요.”
한지가 멈칫했다.
정미는 한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전 거짓말 안 해요. 게다가, 저와 둘째 오라버니의 사이도 떳떳하고요.”
소녀는 아래턱을 살짝 들고 거만하면서도 기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라버니가 다 나으면, 황상께 사혼을 청할 거예요.”
“정미!”
한지는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보며 뒷걸음질 쳤다.
“너, 너 어디 아픈 거 아냐?”
정미는 짜증이 났다.
‘가뜩이나 오라버니의 몸도 걱정되고, 오라버니의 친부모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봐 불안한데, 한지와 실랑이까지 하게 될 줄이야.’
“의원이라도 되시나 봅니다?”
소녀가 차갑게 말했다.
한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몸을 기울였다.
“정미, 너와 철 형님은 남매야. 어찌 혼인할 수 있단 말이야?”
정미가 담담하게 그를 쳐다봤다.
“지 오라버니도 알고 있듯이, 둘째 오라버니가 독립한 그 날부터 우린 이미 남매 관계가 아니게 되었어요.”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한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십여 년 동안 남매로 지내왔어. 예법 상에선 아무 관계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고!”
정미가 피식 웃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한지는 멈칫하더니 정미의 태도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연거푸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아무 상관이 없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를 멸시할 거야!”
정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지를 비웃었다.
“멸시요? 그럼 지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가 서쪽에서 혈투를 벌이고, 서강의 왕자를 제거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을 때, 그 ‘세상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장고로 가서 만민들을 구하기 위해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일했을 때는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 희생하는 건 당연하게 여기면서, 우리가 함께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 역시 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소녀가 당당하게 외치자 한지의 말문이 막혔다. 정미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면, 제가 위국공부의 사촌 아가씨라 세상 사람들이 지 오라버니를 멸시할까 두려운 건가요?”
“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한지의 반박은 아무런 힘이 없었고, 결국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조모님과 다른 어른들이 못 견디실까 봐…….”
‘세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짓을 한 건 정미인데, 왜 얘기하다 보니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지?’
“이제 더는 이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세상 사람들은 저를 떠올릴 때, ‘위국공부의 사촌 아가씨’가 아닌 ‘현청관의 현미진인’을 떠올릴 테니까요. 창피를 당한다 해도 제 사부님께서 걱정할 일이지요.”
정미는 고개를 들어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지 오라버니, 저는 지금 아주 피곤해요. 정말 더 이상 오라버니와 이런 얘기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한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미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아, 돌아가서 올케언니께 전해주세요. 자신의 거처 밖으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 주제에, 남의 일까지 신경 쓰지 말라고요. 저는 더 이상 몇 년 전의 정미가 아니고, 올케언니도 몇 년 전의 정요가 아니니까요.”
이때, 문밖에서 화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둘째 며느님과 다른 아가씨들께서 오셨습니다.”
둘째 며느님은 바로 지난 달 시집 온 사효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미는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급히 말했다.
“어서 들어오시라 해.”
잠시 후, 여인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사효 외에 한추화와 한추몽 등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한지를 보자 모두 놀란 눈치였다.
한지는 낯이 뜨거워져 급히 작별 인사를 한 후 떠나갔다.
“오호, 큰오라버니도 있을 줄은 몰랐네. 진작 알았으면 좀 늦게 왔을 텐데.”
한추몽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한추화가 한추몽을 노려봤지만, 정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추몽은 정미가 반응하지 않자 흥미를 잃었고, 지금 정미의 신분과 지위를 고려해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사효가 정미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미는 손님들을 앉힌 뒤, 미안한 듯 말했다.
“지난달에 장고에서 지내느라 네 혼례에 참석하지 못했네. 정말 미안해.”
사효가 손사래를 치며 다정하게 웃었다.
“사람들을 구하느라 그런 거잖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축하 선물은 절대 잊으면 안 된다? 헤헤, 며칠 전 친가에 다녀왔는데, 네 얘길 하니까 오라버니가 엄청 감탄했다고.”
사효는 순간 실언했다는 걸 깨닫고 멈칫했다.
‘잠깐, 오라버니는 아직도 정미를 좋아하고 있을 텐데. 내가 그 말을 한 이후로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술만 마셨잖아?’
“정미, 장고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줘.”
한추화가 얼른 말문을 돌렸다.
그렇게 형무원 안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님들이 다 떠난 뒤, 정미는 몹시 불안해졌다.
‘사부님이 남안왕에게서 뭔가 단서를 찾아내셨을까? 나도 직접 가보고 싶은데. 정말 초조해 죽겠어.’
* * *
다음 날, 동틀 무렵.
청령진인은 남안왕부에서 나와 현청관으로 돌아가는 대신, 곧장 태의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