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인생이 우리의 첫 만남과 같다면
정철은 정미가 깨어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누워있을 수 없어 팔근에게 명했다.
“가서 튼튼한 마차를 빌려오거라. 위국공부로 가야겠다.”
팔근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렸다.
“공자님, 그건 안 됩니다. 아직 몸도 다 회복하지 않으셨는데요.”
정철이 차갑게 팔근을 쳐다보자, 팔근은 곧바로 고분고분하게 ‘예’하고 대답했다.
태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물밀 듯이 몰려와 정철과 팔근이 나가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았다.
“정 대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황상께서 아시면 저희의 머리가 달아날 겁니다.”
조 원사가 정철의 옷자락을 잡고 통곡했다.
“조 원사, 나는 이미 꽤 회복했소. 위국공부에 잠깐 갔다가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 마시오.”
정철이 화를 참으며 말했다.
조 원사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외쳤다.
“너, 너, 너희들은 남아서 정 대인을 모시거라. 그래, 환자는 종종 헛소리를 하곤 하니, 환자의 뜻대로만 들어주어선 안 된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도망쳐버렸다.
정철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제야 조 원사 같은 사람에겐 어떤 수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 궁으로 돌아온 창경제도 정철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모후, 정철의 몸이 완전히 나은 뒤에야 이 일을 알려주자는 뜻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요?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황상, 일단은 때를 기다리시지요.”
태후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흥, 이렇게 오랫동안 황후를 고생시켰으니, 황상도 좀 애를 태워봐야지.’
태후가 강경한 태도를 취하자, 창경제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북명진인 등을 위해 연 축하 연회에서도 영 집중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마땅히 내려야 할 상은 하사해야 하는 법. 정미는 잠들어있는 사이에 ‘진인’이라는 봉호를 받았고, 그 외에도 문무백관들에게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 * *
화서는 정미를 보러 형무원으로 향했다.
꽃다운 소년은 침상 옆에 앉아 조용히 잠들어있는 소녀를 쳐다봤다.
방 안은 아주 조용했고, 소녀의 고른 숨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그 순간, 화서는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이 제 자신 같다고 느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화서는 침상과 탕약을 떼어놓지 못하며 살아온 바였다. 최근에 정미가 만들어준 부수를 마시니 몸이 꽤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어릴 때만큼 가볍지 않았다.
소년은 손을 뻗어 소녀의 뺨을 살짝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정미, 너와 내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나는 여전히 생부도 모르는 약골 사생아인데, 너는 귀하디귀한 도가의 진인이 되었네.”
하지만 소년의 눈빛엔 질투가 아닌 깊은 걱정이 묻어나왔다.
“네가 높은 곳으로 갈수록, 훌륭한 사람이 될수록, 너와 철 형님의 일이 드러났을 때 더 큰 후폭풍을 맞게 될까 두려워…….”
그때 발소리가 들려오자, 화서는 말을 멈추고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입구엔 한지가 서 있었다. 화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한지는 가관을 앞둔 창창한 청년치고는 꽤 무기력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이유가 있어야만 올 수 있는 건가? 잊었나 본데, 나는 정미의 사촌 오라버니야. 사촌 동생이 아픈데 당연히 와봐야 하지 않겠어?”
화서가 웃었다.
“형님이 정미를 찾아올 때마다 정미에게 아픈 말만 하셨으니 그렇지요.”
정곡을 찔린 한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화서, 난 너와 다투려 온 게 아니다!”
그때,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싸워?”
화서와 한지가 기뻐하며 동시에 달려갔다.
“정미, 일어났구나!”
정미는 오랫동안 자다가 깨어 눈이 뻐근했던 터라, 눈알을 굴리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얼마나 잤지?”
“음, 곧 오시(*午時: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야.”
한지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정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큰일 났다, 오라버니를 보러 가야 해!”
정미가 다급히 침상에서 내려가려 하자, 화서가 막았다.
“정미, 왜 그래? 철 형님을 보러 가는 건 급할 게 없잖아.”
“어젯밤에도 오라버니를 찾아가지 않았는데, 오늘도 늦었잖아. 분명 걱정하고 있을 거야.”
한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미, 네가 잠든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며칠이요?”
정미는 잠시 멍해졌다가 크게 외쳤다.
“환안―”
환안이 서둘러 달려왔다.
“아가씨, 깨어나셨군요!”
“환안, 내가 얼마나 잤지?”
환안이 손가락을 꼽으며 세어보더니 정미에게 말했다.
“오늘이 나흘째입니다. 태의서에서 돌아온 날 밤부터 깨어나지 못하셨어요.”
“아…….”
정미는 한참 침묵하다가 화서와 한지에게 말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다들 나가주세요.”
“그래,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
한지가 다정하게 말했다.
화서는 뭔가 말하려다가 결국 삼키고, 한지와 함께 떠나갔다.
* * *
한지가 거처로 돌아왔을 때, 입구에 선 정요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지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그냥 지나치려 했다.
정요가 한 걸음 다가가 한지의 길을 막았다.
한지는 아무 말 없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정요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저를 낯선 사람 취급하시는 겁니까?”
‘이리 무정한 사내가 다 있나. 여전히 며칠마다 내 방을 찾아오면서, 밤새 아무 말도 하지 않지. 마치 나를 욕구를 푸는 도구로 여기는 것마냥. 그리고 낮이 되면 이렇게 앞길을 막아서야만 만날 수 있고.’
한지는 정요를 흘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지나쳐갔다.
“세자, 정미를 보고 온 거지요? 그렇지요?”
정요가 뒤에서 외쳤다.
한지가 휙 뒤돌아서 정요를 노려봤다.
“그게 뭐 어때서?”
정요는 가슴이 북받쳐 올랐고, 그간의 억울함과 속상함을 토해낼 구실을 마침내 찾았다는 듯 이를 악물고 물었다.
“후회하시는 겁니까? 당시 정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만민이 떠받들고 황상께서 포상을 내리는 아내를 놓쳐서, 후회하고 계신 거지요?”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한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간 꿈에 무수히 등장했던 청초한 얼굴이 처음으로 가증스럽게 느껴져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정요, 당시 정미가 내게 마음을 밝혔을 때, 그 일이 어쩌다 소문이 난 건지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정요는 잠시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차갑게 웃었다.
“제가 했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이런 분이신 줄은 이제야 알았군요. 제게 마음이 있을 땐 그리도 잘해주시더니, 마음이 떠나니 제가 뭘 하든 잘못이라 하시네요. 심지어 제가 세자의 눈앞에 있는 것마저 싫은 거지요, 그렇지요?”
한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요를 쳐다봤다.
“정요, 내가 바보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서까지 그런 말을 해야겠소?”
한지는 대화를 나누기도 성가시다고 느껴 발걸음을 뗐다.
정요가 뒤에서 차갑게 웃었다.
“정미를 연모하게 되신 건가요?”
한지가 휙 뒤돌아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정요, 뚫린 입이라고!”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세자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요.”
정요가 입을 꾹 다물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미의 마음속에 여전히 세자가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뜻이지?”
정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세자, 정철을 쳐다보는 정미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신 겁니까? 여동생이 그런 눈빛으로 오라버니를 쳐다보다니요.”
“헛소리!”
한지가 대로했다.
“헛소리가 아닙니다. 조금만 주의하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정요는 이 말을 남기며 떠나갔고, 그 자리에 남은 한지는 제자리에 서서 한참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형무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정미는 이미 태의서로 외출한 뒤였다.
* * *
정철은 태의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에, 얌전히 방 안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팔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정미의 소식을 전해주어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공자님―”
팔근이 외쳤다.
“음?”
정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팔근이 정철의 손에 있는 서책을 조심스레 가리키며 말했다.
“거꾸로 들고 계십니다.”
정철은 서책을 옆에 두고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소인이 화본이라도 사 올까요?”
“그것도 좋지.”
잠시 후, 팔근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돌아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자님, 소인이 좋은 걸 구해왔습니다!”
그러고는 품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건넸다.
“이 근처의 서재로 갔는데, 마침 사람들이 이 책을 사려고 다투는 걸 보고 얼른 하나 구해왔지요!”
정철이 책을 넘겨보더니, 이상한 표정으로 팔근을 꾸짖었다.
“팔근, 내용은 전혀 보지도 않고 산 것이냐?”
“예?”
팔근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들이 다투고 있기에, 구하기 힘든 책인 줄 알고 손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돌아왔지요.”
이때, 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정 대인, 현미진인께서 오셨습니다.”
정철은 잠시 멈칫했다가, 다급히 책자를 베개 아래에 끼워 넣고는 외쳤다.
“들라 하여라.”
정미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침상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정철과 옆에 단정히 서 있는 팔근이 보였다.
“오라버니, 책 보고 있었어?”
정미가 다가가 자연스럽게 앉더니 책 제목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왜 의서를 보고 있어?”
“태의서는 의서만 많더라고. 아무거나 꺼내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팔근, 가서 차를 내오거라.”
잠시 후, 따뜻한 차 두 잔이 내어져 왔다. 팔근은 눈치껏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좀 어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정미는 풉 웃더니 정철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난 괜찮아. 그저 너무 피곤해서 며칠 동안 잠들었던 것뿐이야. 오라버니는?”
“나도 많이 괜찮아졌어.”
정미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정철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망진이 끝난 뒤에야 방긋 웃었다.
“꽤 회복된 것 같네. 하지만 미간에 조금 푸른빛이 보여. 사부님의 약 때문인지 나중에 여쭤봐야겠어. 일단 아직 몸이 약하니까 누워있어야―”
정미가 허리를 숙여 베개를 잡으려 하자, 정철의 안색이 굳더니 베개를 꾹 눌렀다.
“오라버니?”
정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정철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앉아있는 게 좋아서…….”
“그럼 등 뒤에 베개를 받치는 게 더 편할 텐데.”
정미가 베개를 빼려 하자, 정철은 더욱 꽉 눌렀다. 이에 정미는 의심이 일었다. 그때, 퍼뜩 고개를 든 정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도 오셨어요?”
정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그의 손에 힘이 풀리자마자 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베개 밑에 얼마나 좋은 걸 숨겼길래.”
정철은 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정미는 이미 책자를 든 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정철은 얼른 책자를 빼앗아가며 철없는 여동생을 꾸짖듯이 무마하려 했으나, 당황한 나머지 한참이나 정미를 쳐다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요정들이 싸우는 내용이야. 별로 재미없어.”
정미는 한참 전에 이런 책을 본 적 있었기에, 정철의 말에 속으로 폭소했으나 겉으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요정들은 싸울 때 옷도 안 입는대?”
정철은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아 일부러 단호히 말했다.
“요정이 어떻게 사람과 같아? 이제 그만, 아가씨가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냐!”
정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어. 이런 건 오라버니가 관심 가져야 할 내용이라는 거지? 응, 그럼 오라버니는 요정의 싸움을 공부하고 있었던 거야?”
정철은 속이 뒤집히는 느낌에 갑자기 한참 기침을 해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 머리가 좀 어지러운 것 같은데……. 미미, 좀 쉬어야겠어. 내일 다시 와.”
정미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정철의 모습을 한껏 감상한 뒤 만족스럽게 다시 돌아갔다.
정철은 어두운 표정으로 팔근을 불렀고, 그 책자를 돌돌 말아 팔근의 머리를 치며 꾸짖었다.
“잘 보관해놓거라. 이렇게 좋은 책을 소매 앞에서 읽게 해줄 테니!”
팔근이 머리를 감싸 쥐며 펄쩍 뛰었다.
“아이고, 공자님, 공자님! 그러지 마세요. 소인이 아내를 구하기가 어디 쉬웠습니까!”
정철이 더욱 화내며 말했다.
“너만 어려운 줄 아느냐!”
‘나중에 미미와 혼인하면 이를 어찌 설명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