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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332화 (331/375)

332화. 기다림

정철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밤하늘에 가장 빛나는 별보다 더욱 찬란했다.

“바보야, 울지 마. 내 마음이 아프잖아.”

정미가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자 얼굴에 검은 땟자국이 묻어나왔다.

정철은 정미를 빤히 쳐다보며 손을 천천히 들었다.

정미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해, 걱정을 끼쳤네.”

정미는 울다가 웃다가, 정철의 손을 제 가슴에 갖다 대며 횡설수설 말했다.

“오라버니, 걱정만 한 게 아냐. 그동안 여기가 얼마나 허전했는데. 심장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고.”

정미는 말하며 힘을 주어 정철의 손을 꽉 눌렀다.

그 감촉에 정철의 귀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당장 손을 빼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기에, 결국 멍한 표정으로 제 손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오라버니, 왜 그래?”

정미가 쳐다봤다.

“쿨럭쿨럭― 미미, 물 좀 줄래?”

“응!”

정미는 급히 물을 가지러 갔고, 정철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정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사랑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아파 왔다.

“오라버니, 마셔.”

정미가 조심스럽게 정철을 일으켜 앉히고 물잔을 입가에 갖다 대주었다.

“내가 마실게.”

정철이 잔을 받치려 했지만, 손에 힘이 없어 잔을 엎을 지경이었다.

정미는 급히 잔을 똑바로 잡고 꾸짖었다.

“지금은 센 척할 때가 아냐.”

정미는 차분한 모습으로 천천히 물을 받아마시는 정철의 모습을 보며 가슴에 차오르는 환희를 느꼈다.

“바보야, 왜 웃어?”

“좋아서. 오라버니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정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웃었다.

“역시 하늘은 내 편인 것 같아.”

‘아무리 험한 고난을 겪어도, 결국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앗아가지 않으시니까.’

“정말 바보네.”

정철이 정미의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왜 이렇게 야위었어?”

정미가 눈을 부라리며 답했다.

“알면서 물어?”

“다 나으면 매일 맛있는 걸 만들어줄게. 포동포동 살을 찌워줄 테니까 기대해.”

정미는 가슴이 설레어 왔지만, 겉으론 토라진 척 말했다.

“내가 돼진 줄 알아?”

정철이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바보야, 얼른 찌지 않으면 혼례복도 못 입을걸.”

정미는 멍해졌다.

“오라버니?”

“응?”

“그 말은―”

정미는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고, 가슴이 쿵쿵 뛰는 느낌만 생생히 느꼈다. 수줍으면서도 기쁜 나머지 그녀는 정철의 손을 잡아당겨 다시 제 가슴에 얹었다.

“오라버니, 느껴져? 나는 여기가 이미 다 부서진 줄 알았는데…….”

정철은 또다시 멍해졌다.

‘흠, 됐어. 나의 미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고, 어차피 내 아내가 될 거니까.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

달콤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발소리가 들리자, 정철이 정미를 밀어냈다.

정미가 일어나 문을 열자 청령진인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부님―”

“네 오라버니는 깨어났느냐?”

“예.”

청령진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주홍희가 그를 뒤따랐다.

주홍희는 꽤 흥분한 모습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는데, 정미는 그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두 사람이 정철에게 다가가 그를 살펴보았다. 곧 청령진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상은 거의 다 나은 것 같군. 며칠 더 몸보신하면 완쾌할 수 있겠어.”

정철은 청령진인의 말에 곧바로 누가 제 목숨을 구했는지 깨달았다.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진인.”

청령진인이 정미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그리 중한 부상을 입고 수도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결국 현미 덕분이네.”

정철은 놀란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며칠 동안 속앓이를 해온 탓에, 현재로선 정철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왔던지라 소녀처럼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내가 준 호신부를 잊은 거야?”

정철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가슴을 더듬어보았다.

‘미미가 호신부를 준 이후로 늘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결국 정말 내 목숨을 지켜주었구나.’

“정 대인, 축하드립니다.”

다가온 주홍희가 보고 또 봐도 모자라다는 듯한 눈빛으로 정철을 아래위로 훑어보자 정미와 정철은 어리둥절하여 멍하니 서로를 쳐다봤다.

주홍희는 자신이 추태를 부렸다는 걸 깨닫고 얼굴이 살짝 빨개지더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편히 쉬고 계십시오. 소인은 이 좋은 소식을 황상께 아뢰러 가보겠습니다.”

‘소인?’

정철은 생각에 잠긴 듯, 주홍희가 급히 떠날 때까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정미는 정철의 옆얼굴을 그저 기분 좋게 쳐다볼 뿐이었다.

이때 청령진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현미, 따라오거라. 네게 할 말이 있다.”

“예.”

정미는 아쉬운 듯 정철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따 다시 올게. 푹 쉬고 있어.”

정미는 정철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청령진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탁 트인 정원으로 향했다.

이내 청령진인이 말문을 열었다.

“현미, 장고성에서 있었던 일을 스승에게 얘기해주렴.”

“예.”

정미는 장고성에 도착한 날부터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청령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정미의 이야기가 끝나자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해주었구나.”

정미가 입을 오므리고 웃자, 청령진인이 약간 꾸짖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허나 네 자신도 잘 돌보아야 한다. 북명의 배원양기부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네 스스로도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 법. 너는 원래도 원기가 상해있었는데, 지금은 설상가상이지 않더냐. 당분간은 함부로 부적을 만들지 않는 게 좋겠구나. 아, 내가 예전에 영초(靈草)를 하나 얻은 게 있는데, 시기를 봐서 영약으로 만들어 네게 주마. 네가 장고로 가준 것에 대한 포상도 할 겸.”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저는 아직 젊잖아요. 앞으로 몸조리만 잘하면 분명 회복될 겁니다. 정 제게 포상을 주고 싶으시다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무엇이냐?”

달빛 아래 눈처럼 반짝이는 은발의 청령진인은 마치 속세에 실수로 내려온 신선처럼 보였다.

정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스승님, 이 제자의 중매인이 되어주세요.”

“음?”

늘 유유자적한 신선 같던 청령진인이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놀란 말투로 물었다.

“시집을 가고 싶으냐?”

청령진인의 반응에 정미도 당황했다.

“호, 혹시 시집을 갈 수 없는 건가요?”

“……갈 수야 있지.”

청령진인이 하늘을 쳐다보자 정미가 급히 스승을 달랬다.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 시집을 간 뒤에도 열심히 스승님을 따라 공부할 겁니다.”

청령진인은 한참 말이 없다가 곧 조용히 물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느냐?”

정미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철에게 시집가고 싶습니다.”

청령진인이 반응하기도 전에, 정미는 술술 말을 이어갔다.

“오라버니는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니, 황상께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실 때 분명 저와의 사혼을 청할 테지요. 하지만 저희는 양남매였잖아요. 가족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거예요. 그래서, 만약 스승님이 제 중매인이 되어주신다면 더 순조롭지 않을까 해서요.”

진지한 모습으로 본인의 혼사를 상담하는 어린 제자를 보며, 청령진인은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남들의 시선만 신경 쓰고, 스승의 마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냐?’

“사부님?”

“현미, 너와 정철의 혼사는 그리 빨리 이뤄지지 않을 게다.”

“어째서요?”

정미는 깜짝 놀랐다.

“설마, 황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실까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서강군의 왕자를 죽여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는걸요. 사혼쯤이야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라, 네 오라버니의 친부모를 찾았다는구나.”

정미는 잠시 멍해졌다가 얼굴에 점점 희색이 드러났다.

“정말 잘됐네요. 오라버니도 분명 아주 기뻐할 거예요. 바로 알려주러 가야겠어요. 아, 사부님. 오라버니의 친부모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건 아마 내일이면 알게 될 거다. 현미, 네 혼사는 도와주도록 하마. 하지만 조급해선 안 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복이 올 게다. 자, 시간이 늦었으니 정철에게 가지 말고 돌아가거라. 사람을 불러줄 테니.”

“예.”

정미는 얌전히 청령진인의 말을 따르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아직 친부모님을 찾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걸요…….”

“그건 내가 이야기를 나눠보마.”

정미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 청령진인에게 작별 인사를 올린 후 위국공부로 돌아갔다.

* * *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위국공부로 돌아온 정미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곧바로 침상 위에 쓰러져 잠에 들었다.

한 씨가 몇 번이나 불러도 정미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단 노부인이 말렸다.

“일단 자게 두거라. 역병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몇 날 며칠 동안 눈도 붙이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정말 고생 많았을 게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뼈만 남은 것 좀 보세요. 아무리 큰 공로라 해도 목숨을 잃으면 다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단 노부인이 한 씨를 노려봤다.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이제 역병은 해결되었으니, 내일부터 정미의 몸조리를 잘해주면 되는 일 아니냐. 그래, 철이가 태의서에서 나오면 그 아이도 위국공부로 데려와 함께 보살펴주거라.”

“예.”

* * *

건청궁 안.

창경제는 주홍희가 돌아오지 않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내시에게 명했다.

“한번 가서 살펴보거라. 시간이 이리 지났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다니!”

내시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홍희가 급히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황상, 정말 기쁜 일입니다!”

“어찌 되었는가?”

창경제가 벌떡 일어났다.

주홍희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정 대인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창경제가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이냐? 어, 어서 태후께 전하거라!”

주홍희가 즉시 달려나가려는데, 창경제가 다시 외쳤다.

“아니, 잠깐, 짐이 직접 찾아가야겠다!”

‘정철이 깨어났다면 황후와 나의 정혈이 약인(藥引)이 되었다는 뜻이니, 태후와 적황자에 대해 직접 상의해야겠군.’

창경제는 얼른 자녕궁으로 달려갔고, 황상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태후는 몹시 기뻐했다.

며칠 동안 태후도 창경제 못지않게 태의서의 동세를 신경 쓰고 있었던지라 창경제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당연히 잘 알았다.

태후의 예상대로, 창경제는 태후를 보자마자 다급히 말했다.

“모후, 정철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깨어났군요. 정말 잘 되었습니다.”

태후는 오히려 담담한 반응이었다.

창경제는 감격하며 말을 이었다.

“모후, 국사께서 그때 그리 말씀하셨지요. 친부모의 정혈이 약인이 되어야 정철을 살릴 수 있다고요. 정철이 깨어났으니, 황후와 짐의 아이가 분명합니다!”

“음, 그럼 황상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태후가 아무렇지 않게 묻자, 창경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틀 동안 고민해봤는데, 대외적으로는 당시 강도가 황궁에 침입하여 적황자를 빼앗아 갔고, 국사께서 정철이 당시 실종된 적황자임을 증명해주셨다고 할 생각입니다.”

“황상, 그럼 백성들이 황궁의 시위들을 우둔하다 여기지 않을까요?”

‘황상은 아직까지도 그 천한 것이 저지른 짓을 숨겨줄 생각인 게야. 정말 속도 넓지!’

“정철을 적황자로 인정받게 할 수만 있다면, 시위들이 아무리 우둔하다 취급받아도 상관없습니다.”

태후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찬물을 끼얹었다.

“조금 억지스러운 면은 있지만, 그건 중요치 않겠지요. 백성들은 이유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떠들 거리가 필요할 뿐이니. 허나 황상, 우선 종정시경을 설득하셔야겠습니다.”

종정시(宗正寺)는 황가의 종족(宗族)을 뜻했으며, 종정시경은 그 종족을 관리하는 장로였다.

황제라는 자리는 절대적인 지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구속이 없는 건 아니었다. 황족 내부의 일은 대부분 종정시경과 상의해야 했고, 특히 황실의 혈통과 관련된 일을 종정시경에게 증명받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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