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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331화 (330/375)

331화. 정미의 귀환

유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으나, 자신은 이끼만 가득 낀 채 뭍으로 기어 올라가는 늙은 거북이가 된 것만 같아 도저히 이 시끌벅적한 거리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유왕은 눈살을 찌푸린 채 한숨을 쉬었다.

‘그 존귀한 태자에서 유왕이 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보는 사람마다 나를 피하는구나. 조금 더 있으면 유왕이라는 명분도 지키지 못할 수 있겠어.’

“미행이 있는지 잘 살펴보거라.”

호위에게 이리 당부했지만, 유왕은 딱히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목은백부로 향했다.

태자의 신분을 잃은 뒤, 그는 오히려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목은백부는 내 외가임에도 소문이 신경 쓰여 왕래를 단절했더니 더욱 의심을 사게 된 모양이군.’

“왕야, 무, 무슨 일이십니까?”

목은백이 깜짝 놀라 묻자 유왕이 피식 웃었다.

“외숙부님, 본왕은 이제 혈혈단신인데 찾아뵙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얼마 전 그런 소문이 돌았는데 윗분들이 알게 되시면 왕야께서 난처하실까 봐…….”

유왕이 비웃었다.

“이제 부황은 저를 상대하지도 않으십니다. 정철이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태의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신 것을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철이 친아들인줄 알겠습니다!”

유왕은 그제야 깨달았다. 부모의 잔소리와 꾸중도 관심이자 애정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창경제는 이제 유왕에게 꾸중은 물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외숙부님, 대화하기 편한 장소는 없습니까?”

목은백은 잠시 멈칫하더니 유왕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상 머리맡의 기관을 돌리자 어떤 통로가 나왔다.

입구를 닫자 통로가 어두워졌고, 목은백은 양측의 등불을 켰다.

유왕은 목은백을 따라 한 계단씩 위로 올라가다가 이내 어느 밀실에 도착했다.

“왕야, 말씀하세요. 여기는 안전합니다.”

유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목은백에게 물었다.

“이 밀실 뒤에 통로가 더 있는 듯했는데, 저택 밖으로 나가는 길입니까?”

목은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의 추측이 맞습니다. 밀실 뒤의 통로는 동쪽의 어느 골목과 이어져 있습니다.”

유왕이 눈을 질끈 감더니 물었다.

“뭔가 켕기는 일이라도 있어 만들어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유왕이 차갑게 웃었다.

“이제 더 이상 속이실 필요 없습니다. 모비, 아니, 고모님께서 다 말씀해주셨으니까요.”

목은백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한참 동안 유왕을 쳐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왕야께선 제 유일한 아들이고, 귀비마마께선 왕야의 고모입니다.”

목은백의 입으로 직접 진실을 듣게 되자, 유왕은 완전히 마음을 접으며 피식 웃었다.

“폐위된 게 그리 억울할 만한 일은 아니었군.”

“왕야, 아닙니다. 그건 누군가 계략을―”

유왕이 목은백의 말을 끊었다.

“그럼 지진은요? 일식은요? 수십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흉조가 어찌 한 번에 일어난단 말입니까? 이게 하늘의 뜻이 아니면 무어란 말입니까?”

유왕이 책망하자, 목은백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지진, 일식 등의 재난을 하늘의 경고거나, 황제의 덕행이 부족하거나, 간신들이 조정을 어지럽히거나, 요비(妖妃)가 궁정에 혼란을 불러왔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황실의 혈통이 다른 자의 손에 들어가는 일도 당연히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저는 이제 그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당시 어째서 그리 대담한 짓을 저지른 겁니까. 고모님이 회임했다 속이고, 저를 궁으로 들여보내다니요!”

목은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달린 등갓을 치우고 심지를 밝혔다.

방 안이 점점 밝아지자,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귀비는 입궁한 뒤 수년 동안 총애를 받았지만,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요. 초조한 마음에 여러 방법을 동원했고 그제야 배 속에 아이가 들어선 듯했습니다.”

유왕은 깜짝 놀랐다.

“그럼, 고모님의 회임은 사실이었단 겁니까?”

목은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늘의 장난이었을지도 모르지요. 당시 귀비는 회임 사실을 알고 몹시 행복해했습니다. 황상께서도 아주 기뻐하여 당직 태의들을 몇 모아 회진하게 하였고, 태의들 모두 회임이라 진단했지요. 하지만 몇 달 후, 귀비의 배가 점점 불러올 때쯤, 늘 귀비의 맥을 짚던 계(季) 태의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귀비는 회임한 게 아니라, 상상 회임을 했던 겁니다!”

유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상 회임이요? 어찌 그런 황당한 일이 다 있단 말입니까? 회진한 태의들은 다 바보란 말입니까? 회임하지 않았다면, 고모님의 배가 어찌 불렀겠습니까?”

목은백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 귀비의 배는 정말 커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증상이 회임과 동일했고요. 귀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마침 왕야의 친모도 회임한 상황이었고, 출산일이 귀비보다 고작 며칠 빠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와 상의했습니다. 만약 제 부인이 낳은 아이가 아들이면, 외부엔 요절했다 알리고 몰래 궁으로 데리고 들어가 키우기로…….”

“그거 참 일거양득인 좋은 생각이로군!”

유왕이 차갑게 웃었다.

유왕을 쳐다보는 목은백의 눈빛에 자애로움이 묻어나왔다. 예전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었다. 유왕은 그 눈빛이 불편해 고개를 돌렸다.

목은백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 죄를 물으셔도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그 계략을 꾸민 자가 또 소란을 일으킬까 걱정이 되는군요……”

“그자가 나설 필요도 없을지 모릅니다. 오늘 제가 여기 찾아온 건, 당시의 일을 정확히 알고 싶어서도 있지만 외숙부님께 도움을 구하러 온 게 더 큽니다.”

유왕이 한 마디씩 또박또박 말했다.

“이번에 반역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정철과 동시에 수도로 호송되었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자는 제가 보낸 사람입니다.”

“예?”

목은백의 안색이 굳었다.

“왕야, 설마―”

“그저 정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혼을 좀 내줄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본왕은 이제 유왕부에 얌전히 지내야 하니, 절대 경거망동해선 안 되지요. 그러니 외숙부님의 도움을 좀 빌려야겠습니다.”

유왕과 목은백은 같은 배를 탄 처지였기에, 유왕은 목은백이 이 일에서 손을 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목은백은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왕야께선 일찍 돌아가세요.”

* * *

정미 일행은 저녁쯤에야 수도 교외의 부두에 도착했다. 창경제가 보낸 사람과 위국공부의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정미가 북명진인에게 말했다.

“사형, 날이 늦었으니 저는 입궁하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일을 부탁드립니다.”

북명진인은 정미의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말리지 않았다.

“그래. 사매는 얼른 돌아가 쉬게. 내일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정미는 곧장 위국공부로 돌아갔다.

위국공부 사람들은 아까부터 눈이 빠질세라 정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훌쩍 야윈 정미가 나타나자 한 씨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단 노부인은 정미를 품에 안고 몹시 마음 아파했다.

정미는 마음이 너무 허했다. 가족들의 다정한 말과 따뜻한 포옹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라버니의 소식은요?”

한 씨가 조심스럽게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진정하고 듣거라. 네 오라버니는 지금 태의서에 있고, 국사께서 치료해주시고 있단다.”

말이 끝나자마자, 정미는 곧바로 뒤돌아서 밖으로 달려나갔다.

7월은 일 년 중 가장 더울 때였다. 저녁이라 하더라도 거리엔 행인이 아주 드물었고, 길 양쪽에 늘어선 가게들도 간판 깃발들만 휘날릴 뿐 모두 고요했다.

정미는 미친 듯이 달렸다. 가슴은 불꽃처럼 뜨겁게 타올라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침내 태의서에 다다른 정미는 허리를 푹 숙인 채 숨을 헐떡였다.

문지기는 도포를 입고선 속세의 티가 얼굴 가득 느껴지는 어린 소녀가 찾아오자, 이상하게 여기며 다가가 쫓아냈다.

“아가씨, 여긴 쉬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저기 찻집이 있으니 그곳에서 쉬어가세요.”

정미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한 손으로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마치 방금 막 물에서 건져낸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이고, 아가씨. 어디 아픈 겁니까? 허나 여기는 태의서입니다. 아무에게나 진료를 봐주지 않지요. 정 아프면 어서 이 길을 따라 저쪽으로 가세요. 가까운 곳에 의관이 있습니다. 지금 시간엔 아직 영업 중일 겁니다.”

“서쪽에서 수도로 온 정 대인이 여기 태의서에 있지요?”

정미가 문지기의 말을 끊고 묻자, 문지기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 대인이라는 사람이 있긴 한데―”

정미는 곧장 안으로 돌진했다.

문지기가 급히 정미를 막아섰다.

“아가씨, 이곳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태의서의 대인들은 물론, 근 이틀간엔 귀인들까지도 찾아오셨단 말입니다. 그분들과 마주치면 큰일 날 겁니다!”

정미는 다급한 나머지 허둥지둥 설명했다.

“저는 정 대인의 여동생입니다. 오라버니를 보러 왔어요.”

“그렇다고 해도 안 됩니다. 근 이틀간 정 대인을 보러 온 분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하지만 윗분들께서 아무나 들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국사님의 치료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요.”

문지기는 말을 잇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

“주 공공이시군요, 어서 들어가시지요.”

주홍희는 성큼성큼 걸어오다가 정미를 보고 멈칫하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현미 도장 아니십니까? 정 대인을 보러 오셨지요? 함께 들어갑시다.”

정미가 주홍희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주 공공.”

주홍희가 급히 옆으로 피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마십시오, 도장. 도장께선 만민을 구한 성인 아니십니까. 폐하께서도 도장에 대해 여쭈셨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태의서 안으로 들어갔고, 문지기는 황상의 곁에 있는 사람 중 으뜸인 주홍희가 소녀의 옆에서 한걸음 물러나 걷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아래턱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주홍희는 곧바로 정미를 어느 방 앞으로 안내했다.

“현미 도장, 정 대인은 이 안에 계십니다. 하지만 우선 국사께 인사를 드리고 들어가세요. 치료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이때 천천히 방문이 열리더니 청령진인이 걸어 나왔다. 그가 웃으며 정미를 쳐다봤다.

“현미, 돌아왔구나.”

“사부님―”

정미가 절을 올렸다. 안에 있는 사람이 떠오르자, 온몸이 덜덜 떨렸다.

“들어가거라, 치료는 다 마쳤다. 언제 깨어나는지만 지켜보면 된단다.”

청령진인은 몸을 옆으로 피해 정미에게 들어가라 눈짓했다.

정미는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청령진인에게 다시 인사를 올리고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닫히자 적막만이 흘렀다.

정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침상 위에 누워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정철은 똑바로 누운 채 얇은 이불을 덮고 있었고, 두 손을 가슴 위에서 맞잡은 채였다.

정미는 침상 앞으로 달려가 반쯤 무릎을 꿇고 외쳤다.

“오라버니―”

정철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며칠 동안 햇볕을 쬐지 않아서인지 그의 피부는 아주 하얬고, 짙고 풍성한 속눈썹은 눈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워 더욱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꾹 다문 입술은 조금의 혈색도 보이지 않았다.

정미는 마음이 쓰라려 정철의 손을 잡고 제 뺨에 살짝 비볐다.

“오라버니, 나 왔어. 눈 좀 떠봐. 나 좀 봐봐…….”

소녀의 눈물이 떨어져 정철의 속눈썹을 적셨다.

그러자 정철의 속눈썹이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오라버니?”

정미는 순간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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