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30화 (329/375)

330화. 회양부(回陽符)의 약인(藥引)

환안은 잔뜩 성이 나서 북명진인을 쳐다봤다.

‘이 사람은 나보다도 위로를 할 줄 모르네.’

“사형, 그럼 제 오라버니는 이미―”

정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상식적으로는, 사매가 생각한 대로겠지.”

북명진인이 무정하게 말했으나, 정미가 연거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그럴 리 없다고요. 우리 오라버니가 얼마나 대단한데, 외조부님도 오라버니의 창법을 청출어람이라 칭찬하셨다고요. 적에게 부상을 입었을 리 없어요!”

정미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 상식적인 상황이 아니라면요? 사부님이 말씀하셨어요. 오라버니는 이번 전쟁을 통해 전화위복할 거라고요.”

‘어려서부터 오라버니는 단 한 번도 나와 한 약속을 어긴 적 없어. 이번엔 혼인을 약속했는걸. 지키지 않을 리 없잖아? 만약 진짜 죽은 거라면, 차라리 나도 황천에 떨어져서 오라버니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을 거야!’

“운명은 예측불허하고, 인생은 무상하지. 만약 정 대인이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사매는 더욱 만민을 위해야 하네. 큰 공덕으로 정 대인의 전화위복을 도와야지.”

북명진인은 정미가 헛걸음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덕을 쌓는 일을 하면 정철이 복을 받아 목숨을 구할지도 모른다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정미는 북명진인의 뜻을 알아채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후, 정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온종일 부적을 만들어 백성들을 치료했다.

보름 후, 북명진인의 배원양기부로 겨우 버텨오던 정미는 이미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장고성에 드리웠던 역병의 먹구름도 마침내 사라졌다.

장고를 떠나는 날, 도사들은 모두 무척 야윈 모습이었다. 특히 그중 정미는 옷을 걸치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했다.

백성들은 그들을 성 밖 수십 리까지 배웅하며 절을 올리고 환호했다.

구제에 참여한 관원들은 가슴을 똑바로 편 채 이번 일을 큰 영광으로 여겼고, 올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 뼛속 깊이 깨닫게 되었다.

* * *

장고의 역병이 구제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수도에 전해졌고, 창경제는 크게 기뻐했다.

“주홍희, 어서 가서 축하연 준비를 하게. 진인들이 수도로 돌아오면 동락전에서 도장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어야겠네!”

창경제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중서사인이 또 다른 소식을 전했다.

“뭐라, 정 참의가 장병들의 호송을 받아 곧 수도에 도착한다고?”

창경제가 급히 주홍희를 불러세웠다.

“짐의 명을 전하라. 정 참의가 수도에 들어오는 즉시 태의서로 보낸다. 궁중에는 한 명의 태의만 당직을 서고, 다른 태의들은 모두 태의서에서 대기하며 반드시 정철을 살려야 한다!”

옆에 있던 중서사인이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황상께선 어찌 정 참의에 관한 일은 유난스럽게 구실까? 원래는 반역자로 의심되어 수도로 부르려던 것 아니었나?’

주홍희는 명을 받들고 밖으로 나가다가 중서사인을 지나며 잠시 멈칫하더니 순간 꽤 통쾌한 기분을 느꼈다.

‘후후, 나만 황상의 마음을 알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니, 가끔은 꽤 기분이 좋군.’

태의서는 창경제의 명을 전해 받고 모두 긴장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누군가 외쳤다.

“정 참의가 왔습니다!”

태의들이 다급히 밖으로 나가보자, 장병들이 정철을 들고 입구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趙) 원사(院使)가 급히 말했다.

“어서 정 참의를 안으로 모시게.”

장병들은 조심스럽게 정철을 내려놓았다. 태의들은 그를 둘러싸고 정철의 상황을 살피더니, 멍하니 서로를 쳐다봤다.

‘누가 봐도 가망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데리고 왔지?’

“정 참의는 어떤가?”

낮은 목소리가 울리자, 태의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라며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창경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다들 일어나게. 짐은 평복 차림으로 출궁했으니, 예를 갖출 필요 없네.”

창경제는 무릎 꿇은 사람들을 지나 침상 앞에서 정철을 잠시 살펴보았고, 갑자기 긴장감을 느꼈다.

‘이 녀석이 황후와 꽤 닮은 걸 왜 이제야 알아챘을까.’

창경제는 조용히 침을 삼키고 정철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폐하―”

조 원사가 놀란 표정으로 외치자, 창경제가 정색하며 말했다.

“짐은 정 참의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네.”

조 원사는 몹시 감탄했다.

‘황상께서 동공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방법까지 알고 계시다니.’

창경제는 갑자기 아주 슬퍼졌다.

‘그저 정철의 눈이 황후와 얼마나 닮았는지 살펴볼 뿐이거늘. 왜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람? 태의들은 정말이지, 의술은 형편없고 그저 아첨할 줄만 아는구나. 역시 믿음직스럽지 않아!’

창경제가 명령했다.

“정철을 수도까지 호송한 병사에게 짐을 알현하라 전하라.”

병사의 상황 설명을 들은 창경제가 곧바로 주홍희에게 분부했다.

“국사를 태의서로 모셔오거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창경제가 태의들에게 물었다.

“정 참의의 상황은 어떤가? 방법이 있는가?”

조 원사가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송하옵니다.”

창경제가 눈을 부라리며 생각했다.

‘이 바보들은 맨날 황송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두 마디만 할 줄 알지!’

“모두 물러나거라.”

창경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예.”

태의들은 멋쩍은 듯 방을 나가다가 뒤늦게 문득 깨달았다.

‘아니, 여긴 태의서잖아. 우릴 내보내고 황상 혼자서 정 참의를 지켜보시다니?’

“원사님―”

그러나 조 원사는 수염을 매만지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쨌든 황상을 따라야지, 별수 있겠나.’

태의들은 어리둥절한 채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문밖을 지켰다.

방 안에 아무도 남지 않자, 창경제는 곧바로 정철의 옆에 앉아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의 덧신을 벗겼다.

정철의 뽀얀 발바닥을 보며 창경제는 몹시 실망했다.

‘붉은 반점은? 왜 없는 거지!’

창경제는 포기하지 않고 정철의 발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붉은 반점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정철은 결국 내 아들이 아닌 건가?’

창경제는 실망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머리를 팍 쳤다.

‘이건 오른발이잖아. 왼발도 봐야지!’

그는 급히 정철의 다른 쪽 덧신도 벗겨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창경제는 점점 그 발에 가까이 다가가며 열심히 붉은 반점을 세었다.

“폐하―”

그때 주홍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뒤에는 안절부절한 태의들이 보였다.

창경제는 그 자세로 몇 초간 얼어있다가 재빨리 정철의 발을 내려놓고 대로했다.

“주홍희, 무엄하구나!”

주홍희가 무릎을 쿵 꿇었다.

“황송하옵니다!”

주홍희는 겉으론 몹시 황공한 모습이었지만, 속으론 깔깔 웃고 있었다.

‘황상, 성질도 급하십니다. 정 대인의 발에 붉은 반점이 있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소인에게 시키셔도 되었을 텐데. 이제 태의들이 아까 왜 쫓겨났는지 눈치챘겠군요.’

태의들도 깜짝 놀라 주홍희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큰일이다. 큰일이야. 역시 원사님이 옳았구나. 괜히 따라왔다가 황상의 괴벽(怪癖)을 보고 말았어! 엉엉엉, 황상께서 발 냄새를 좋아하실 줄이야. 우릴 죽여서 입막음하시는 건 아니겠지?’

창경제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진정하자, 진정. 죽여선 안 된다. 내 아들을 위해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주홍희, 국사는 모셔왔는가?”

주홍희가 급히 대답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모셔오거라!”

잠시 후, 청령진인이 걸어들어왔다.

창경제는 미리 태의들을 내보냈고, 국사를 보며 미소 짓고 말했다.

“국사께서 이리 빨리 오실 줄은 몰랐소.”

청령진인이 말했다.

“빈도가 어제 별을 보았는데, 장고의 별에 재난이 끝난 것으로 확인되어 폐하께 보고드리러 가는 길에 마침 주 공공을 마주쳤습니다.”

“그런 거였군. 어서 정철을 좀 봐주시오.”

창경제는 침상 옆에 서서 혼수상태의 정철을 쳐다봤다. 볼수록 기쁘기도 했으나, 그의 부상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청령진인이 잠시 관찰하더니, 정철의 옷섶을 풀어보았다. 그는 정철의 가슴에 붙어있는 호신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빈도의 제자는 총명하군요. 이런 방법으로 목숨을 살려놓다니.”

“그게 무슨―”

청령진인이 호신부를 가리켰다.

“이 친구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호신부 덕분입니다. 이 부적은 빈도의 어린 제자, 현미가 만든 것이고요.”

“역시 훌륭한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배출하는군!”

창경제가 감탄하며 청령진인을 쳐다봤다.

“국사, 그럼 정철을 살릴 수 있는 것이오?”

“이 친구에게 부모가 없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청령진인이 갑자기 화제를 돌리자, 창경제는 꽤 불쾌해졌다.

‘부모가 없다니? 바로 여기 있거늘!’

“큼큼, 부모가 없는 게 아니라 친부모가 누군지 모를 뿐이오.”

“친부모를 찾지 못하면, 이 친구를 살릴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친부모가 아직 건재하다면, 빈도가 치료를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소?”

창경제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이 친구는 이미 반송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빈도가 이 친구 부모의 정혈로 회양부를 만들어야, 이 친구를 사경에서 다시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길어봤자 사흘에서 닷새까지만 버틸 수 있을 터, 그 안에 친부모를 찾을 수 있습니까?”

“그건 짐이 방법을 강구해 보겠소. 국사께선 미리 준비해주시오.”

창경제는 감격스러운 마음을 안고 급히 궁으로 돌아가 곧바로 자녕궁으로 향했다.

“그 아이의 발에 정말 붉은 반점이 일곱 개나 있었습니까?”

태후가 아주 기뻐했다.

“예, 짐이 직접 보았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하늘께서 보우해주셨군요!”

태후가 눈을 감고 중얼거리며 눈가를 순식간에 촉촉이 적셨다.

“안 되겠습니다. 애가가 직접 가봐야겠어요.”

창경제가 급히 막아섰다.

“모후, 그 아이는 아직 혼수상태입니다. 국사께서 친부모의 정혈이 있어야 살릴 수 있다 하셨습니다. 짐은 이번 일이 일거양득이라 여겨지는군요. 정철을 살릴 수도 있고, 짐과 황후의 적황자라는 것도 증명할 수 있으니!”

‘큼큼, 만일 실패한다면 정철이 젊은 나이에 이리 떠나는 걸 안타까워할 수밖에.’

창경제는 하루 동안 꾹 참은 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자신과 황후의 정혈을 청령진인에게 보냈다.

청령진인이 부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아주 초조했다. 태의서의 문턱은 황궁 내시들이 왔다 갔다 하느라 다 망가질 지경이었고, 태의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애간장만 태웠다.

‘정 대인이 큰 공로를 세웠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 특별대우 아닌가? 황자가 아파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정철이 큰 공을 세워 수도로 돌아온 뒤, 황제와 태후가 눈에 띄게 그에게 관심을 보이자 수도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태의서로 집중되었다.

그러자 짧은 시간 내에 태의서는 각 가문에서 보내온 보약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 *

금족령이 풀린 평왕은 보양식을 들고 정철을 보러 태의서로 가 창경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생각이었지만, 문밖을 나서자마자 유왕과 마주쳤다.

“오, 유왕 자네도 외출하는가?”

유왕은 평왕을 차갑게 쏘아보고는 다시 발걸음을 뗐다.

유왕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지자 평왕이 피식 웃으며 암위에게 명령했다.

“유왕을 미행하라. 어디로 가는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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