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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329화 (328/375)

329화. 구역

동성구 안은 적막이 흘렀고, 마치 죽은 도시처럼 깊이 들어갈수록 악취가 더욱 심해졌다.

정미는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필이면 뜨거운 여름에 지진이 일어났으니, 역병이 퍼지는 것도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곳으로 하지요.”

정미가 탁 트인 곳에 멈춰 서서 말했다.

부지사가 눈짓하자, 열 명 정도의 아역들이 꽹과리를 치고 걸으며 크게 외쳤다.

“다들 나오십시오. 수도의 현청관에서 여러분들을 치료하러 와주셨습니다.”

“신선수 한 모금이면, 역병이 즉시 사라질 겁니다!”

정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돌팔이들이 약을 속여 팔 때 하는 말 같은데.’

그런데 뜻밖에도 아역들의 외침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씩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타난 사람은 어떤 부인이었고, 품에는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있었다.

부인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멍한 눈빛으로 걸어오다가 갑자기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품 안의 아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역들은 손을 뻗어 부축하려다가, 부인이 이미 역병에 감염되었을까 염려해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뒤에 나온 백성들은 굳은 표정으로 그 상황을 지켜봤다.

정미는 첫 환자를 치료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야 자신을 따라온 관리들과 백성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터였다.

정미가 부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부인, 제가 일으켜드릴게요.”

부인이 고개를 들어 멍하니 소녀를 쳐다봤다.

도사 머리를 하고 도포를 입은 소녀가 눈앞에 서 있자 지상에 내려온 신처럼 느껴졌다.

“다, 당신은 구천현녀(九天玄女)인가요?”

부인은 멍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현녀마마, 제발 제 아들을 살려주세요. 제 아들을 살려주세요!”

정미는 몸을 숙여 부인을 일으켰다.

“부인, 저는 현녀가 아니라 현청관의 도사 현미입니다. 이번에 역병을 구제하러 왔지요. 아이를 제게 보여주세요.”

정미는 얼굴을 가리는 유모를 쓰고 있지 않았기에, 이 만신창이가 된 땅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더욱 생생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부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아이를 건넸다.

서너 살의 아이는 조금의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고, 정미의 품에 안겨도 눈꺼풀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꽹과리를 들고 있던 하급 관리가 외쳤다.

“도장, 어서 내려놓으세요. 그 아이는 이미 역병 말기입니다!”

이 말에 아역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어제까진 제게 ‘엄마’라 불렀단 말입니다!”

부인은 하급 관리의 말에 마지막 희망을 잃은 듯 울부짖기 시작했다.

하급 관리는 계속 뒷걸음질 치며 부인을 가리켰다.

“저, 저 부인도 역병에 감염되었습니다!”

“그만, 조용히 하세요!”

정미는 아이를 안고 일자로 늘어선 큰 양동이 쪽으로 걸어가, 뒤따르던 도동 둘에게 말했다.

“물을 반 그릇 길어 이 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기거라.”

“예, 사숙조님.”

두 도동은 즉시 행동했다. 한 사람은 나무통에 물을 채우고, 다른 한 사람은 빠르게 아이의 옷을 벗겨 나무통에 넣었다.

홀딱 벗은 아이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욕을 마쳤고 미리 준비한 얇은 천을 두른 뒤 도동에게 안겼다.

그때, 줄곧 조용하던 아이가 갑자기 딸꾹질을 했다.

부인이 환희하며 달려갔다.

“우리 아들이 깨어났어요, 우리 아들이 깨어났다고요!”

정미가 부인을 막아섰다.

“부인, 부인도 이미 역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아이와 접촉하면 다시 감염될 겁니다.”

“그, 그럼 어떡합니까?”

부인은 멍하니 제 손을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차분한 표정의 소녀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현녀마마, 제발 제 아이를 살려주세요. 저는 제 아이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정미가 고개를 돌려 도동에게 눈짓했다.

도동은 뒤돌아서 큰 나무통에서 물을 반 그릇 길어 부인에게 건넸다.

부인은 그릇을 건네받고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물을 마시면 역병이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부인과 아이 모두 동성구를 떠나 서성구에서 잠시 지내면 됩니다.”

부인은 곧바로 물을 들이켠 뒤 불안한 듯 정미에게 물었다.

“현녀마마, 정말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도동이 아이를 부인에게 건네자, 부인은 급히 아이를 건네받고 연거푸 외쳤다.

“아가, 아가야……. 내 목소리 들리니?”

아이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엄마―”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안고 뒤돌아서 크게 외쳤다.

“백부님, 둘째 고모님, 어서 나오세요. 현녀마마께서 신선수를 가져오셨습니다! 저희 아이가 말하기 시작했어요. 제게 엄마라 불렀다고요!”

한 아역이 다가가 말했다.

“부인, 현미 도장께서 말씀하셨듯이, 부인이 마신 부수는 그저 체내의 역병을 제거할 뿐 재감염은 막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어서 저쪽으로 가 기다리세요. 이따 다른 사람이 데리러 올 겁니다.”

부인이 출발선을 끊자, 지켜보던 백성들이 곧바로 밀려왔다.

아역이 크게 외쳤다.

“모두 줄 서세요. 한 사람씩 치료합니다! 스스로 신선수를 마실 수 있는 자는 이 줄에 서고, 그럴 수 없는 자는 저쪽으로 데리고 가 남녀를 나누어 몸을 닦아야 합니다.”

상황이 조금씩 정리되어가자, 정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매, 저쪽에서 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게.”

“예.”

정미는 임시로 지은 그늘막 아래로 갔다.

그러나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길게 늘어선 대열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역들이 크게 꾸짖었지만, 소란은 갈수록 커졌다.

정미와 북명진인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함께 그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오?”

나무 국자를 든 도동이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밀쳐지며 외쳤다.

“부수가 동났습니다!”

나무통 안의 부수가 바닥을 보이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다들 진정하시오. 이 신선수는 빈도의 사매가 만든 것이니, 다시 만들면 됩니다.”

북명진인의 말에 사람들은 순간 멈칫하더니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들 안심하세요.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역병을 구제하러 왔으니, 전심전력을 다 할 것입니다. 역병에 걸렸더라도 숨만 붙어있으면 절대 목숨을 잃게 두지 않을 겁니다!”

정미의 말은 북명진인보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기에, 대열은 다시 조용해졌다.

정미는 도동에게 빈 나무통에 맑은 물을 가득 채우라 명했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북명진인의 눈엔 부수를 만드는 것으로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엔 기이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춤이 끝나고 사방엔 정적이 흘렀다. 소녀의 몸 주변에 나타난 작은 빛들이 반짝거리며 맑은 물에 떨어짐과 동시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백성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현녀마마께서 현령(顯靈)하셨으니, 저희는 이제 살았습니다!”

백성들에겐 부수로 역병을 치료한 장면보다 방금 이 장면이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 * *

며칠 뒤.

“현미 도장,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네. 이렇게 쉬지 않고 부적을 만들다간 몸이 견디지 못할 것이야.”

소녀는 동성구에 들어온 이후, 뜨거운 태양 아래서 쉴 새 없이 부적을 만들었기에,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말렸다.

“괜찮습니다. 북명 사형이 배원양기부로 도움을 주신 덕에, 아직은 버틸 수 있습니다. 역병은 다른 병증과는 달리 전염 속도가 빨라 하루만 지체해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동성의 백성을 치료해야 마땅합니다.”

그때, 한 아역이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도장, 어떤 아가씨가 자신을 도장의 시종이라 칭하며 들어오려 하고 있습니다. 급한 일이 있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정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어서 들어오라 하세요!”

정미는 임시로 지은 그늘막 안에서 지친 모습으로 달려오는 환안을 보았다.

“오라버니의 소식이야?”

정미가 다급히 물었다.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 그렇습니다.”

환안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식이야? 서신이 온 거야, 아니면―”

환안은 단 한 번도 정미에게 무언가를 숨긴 적 없는 솔직한 시종이었기에, 주인의 불안한 눈빛에도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서쪽에서 전보가 왔는데, 둘째 공자님이 적과 함께 돌아가셨다고―”

환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미가 스르륵 쓰러졌다.

그늘막 안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북명진인이 곧바로 명했다.

“어서 장막을 내려라. 바깥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불과 며칠 만에 정미는 동성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바였다. 동성은 아직도 대부분의 백성들이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인데, 만약 그들의 ‘현녀’인 정미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큰 파장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장막을 내리자, 그늘막 안은 아주 어두워졌다.

북명진인은 도사들에게 밖을 지키라 명한 뒤, 은침으로 정미의 혈 자리를 몇 곳 찔렀다.

잠시 후, 정미가 천천히 깨어났다. 그러나 눈빛은 혼이 빠진 듯 멍했다.

환안이 정미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아가씨, 아직 제 말이 다 끝나지 않았어요. 뒤이은 전보에 따르면, 둘째 공자님의 숨이 아직 붙어있다고 했어요―”

정미가 벌떡 일어나 환안을 빤히 쳐다봤다.

“사실이야?”

환안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보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

정미가 이를 악물고 환안의 뺨을 내리쳤다.

“아가씨―”

환안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 못된 것, 나, 나를 죽일 셈이구나 네가…….”

정미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피를 토했다.

환안이 비틀거리는 정미를 껴안고 울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소인을 겁주지 마세요, 엉엉엉…….”

정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미안. 방금 너무 충격을 받아서……. 환안,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줘.”

환안은 눈물을 닦아내고 알아낸 소식을 자세히 설명했다.

‘폐를 다쳐 살릴 방법이 없다니…….’

정미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어 혼잣말을 중얼댔다.

“어쩐지 그날 가슴이 그렇게 아프더라니, 그때 오라버니가 부상을 입었구나!”

정미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북명진인이 막아섰다.

“사매, 어딜 가려 하는가?”

“오라버니를 찾으러 서쪽으로 가야겠어요! 사형, 들으셨잖아요. 오라버니의 목숨이 위험하다니까요! 반드시 보러 가야 합니다!”

“사매,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되네. 사매가 가면 장고의 수많은 백성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정미는 멍하니 있다가, 한참 뒤 얼굴을 가리고 울부짖었다.

“사형, 제가 어찌해야 할까요? 누가 제 상황을 헤아려줄까요?”

“사매, 내 말을 들어보게.”

북명진인이 무거운 말투로 정미를 달랬다.

“서쪽은 여기서 천 리 밖에 있네. 전보가 여기까지 전해져오고, 또 사매가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정 대인은 부상을 입은 지 이미 보름은 지났을 걸세. 전보에 목숨이 위태하다고 적혀있었는데, 사매가 그쪽에 도착할 때까지 정 대인이 무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정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소리도 없이 숨넘어갈 듯 우는 정미의 모습에, 아무도 차마 그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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