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28화 (327/375)

328화. 구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허 웃으며 ‘이런 우둔하고 평범한 사람과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군’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부적 중에서도 으뜸인 부적이군. 바깥층은 정통 도가의 호신 경문(經文)으로 되어있으니, 분명…….”

노인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천하제일 도가인 현청관에서 만든 부적일 거요. 그리고 이 바깥층 부적의 목적은 안에 들어있는 부적이 외부에 오염되지 않기 위함이고. 그러니 이리 큰 부상을 입었는데도, 호신부는 여전히 새것 같은 것이지. 여태 눈치채지 못한 거요?”

위무행과 염감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철의 몸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히는 사람 외에, 누가 멀쩡한 사람의 옷을 풀어헤쳐 본단 말인가.

하지만 노인의 말을 듣고 보니, 정철의 가슴에 붙어있는 호신부는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했다.

부적은 신기할 정도로 깨끗했다. 심지어 피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노인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이 안에 들어있는 부적이야말로 이 청년의 목숨이 붙어있는 원인이오. 부의의 심혈로 만든 부적이 분명하군. 이런 방법으로 부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니, 참으로…… 참으로…….”

노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의원?”

노인은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위무행에게 물었다.

“이 젊은 장군과 현청관은 무슨 관계요?”

“알 리가 있겠소.”

위무행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염감군이 급히 말했다.

“정 참의의 여동생이 국사의 제자라 들었소.”

“국사라…….”

노인은 이 말을 중얼대며 한참 넋을 놓고 있었다.

위무행이 그를 몇 번 부르더니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정신 좀 차려보시오. 그래서 살릴 수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노인이 담담히 말했다.

“그건 하늘의 뜻에 달려있소.”

“그게 무슨 뜻이오?”

“여기 서쪽에 남아있으면, 호신부의 영력이 사라질 때 이자의 혼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이자를 수도로 보내 이 부적을 준 사람을 찾아간다면, 살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오.”

위무행이 책상을 탕 내리치며 염감군을 쳐다봤다.

“바로 정 형제를 수도로 보낸다!”

노인은 위무행의 흥분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여기서 수도는 천 리가 넘으니, 가는 길에 숨이 끊길지도 모르지.”

위무행이 다급히 말했다.

“이 상황의 자초지종도 이리 쉽게 알아냈는데, 해결할 방법이 단 하나도 없단 말이오? 거금으로 보답할 테니, 정 형제와 함께 수도로 향해주시오.”

“아니, 난 가지 않을 것이오.”

노인은 단호히 거절했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현청관과 관련이 있는 일이 나와 엮이다니, 이것도 하늘의 뜻이겠지. 그럼 내 부술로 이 청년을 도우겠소. 허나, 무사히 수도에 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소.”

“고맙소!”

* * *

다음 날 아침, 날이 막 밝아올 때쯤 청색 휘장을 두른 마차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군영을 떠났다. 대열 뒤에는 죄인을 싣는 수레가 뒤따르고 있었다.

수레 안엔 머리가 헝클어진 젊은이가 타고 있었는데, 입안엔 천이 가득 물려있어 모습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위무행과 다른 자들은 대열이 멀리 사라지자, 그제야 조용히 군영으로 돌아갔다.

* * *

정미가 장고성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욱 처참했다.

무수히 많은 가옥이 무너져 폐허가 되었고, 무너지지 않은 누각은 휘청거리고 있어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땅이 갈라져 깊은 골짜기가 만들어진 곳도 있었고, 골짜기엔 각양각색의 물건이 묻힌 채였다. 그중엔 잘린 팔다리도 있었는데, 악취를 풍기며 파리가 그 주위를 윙윙 맴돌고 있었다.

북명진인은 현청관 사람과 함께 조정에서 임시로 마련한 관아로 향했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보이는 광경은 아주 섬뜩했다. 그나마 피해가 덜한 곳도 집집마다 상복을 입고 있었다.

현청관 도사들은 모두 침묵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현청관 도사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관원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진인, 드디어 오셨군요.”

관원은 모두를 데리고 임시 관아로 향했다. 입구에는 아역(衙役)이 대야를 들고 모두에게 손을 씻게끔 안내했다.

관원이 설명했다.

“쑥, 등골나물 등 약초를 달인 약수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손을 씻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관아 안엔 관원과 조정에서 먼저 파견했던 부지사 등의 관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북명진인을 보자마자 구원의 신이라도 본 듯 다가와 둘러쌌다.

“진인, 오셨군요! 국사의 명으로 역병을 구제하러 오셨다 들었습니다. 저희가 간절히 바라던 희망이 드디어 보이는군요.”

진휼어사(*賑恤御史: 흉년에 관한 일을 살피기 위해 지방에 파견하는 어사)가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고의 역병은 빠르게 번져 짧은 며칠 동안 수천 명이 역병으로 죽었고, 그들이 가지고 온 약재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조정에서 더 이상 사람을 보내주지 않으면 장고를 봉쇄하고, 백성들이 자멸하게 두는 방법밖엔 없었다.

북명진인은 뜨거운 눈빛의 사람들을 쳐다보며 가볍게 기침했다.

“다들 오해하셨소. 빈도는 그저 보조일 뿐이고, 국사의 명을 받든 건 빈도의 사매, 현미요.”

‘사매?’

진휼어사는 북명진인과 나란히 선 정미를 쳐다보았고, 관원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미가 사람들에게 공수하며 인사했다.

“저는 현미입니다. 스승님의 명을 받아 역병을 구제하러 왔지요.”

정미는 청색 도포에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은 채였고, 벽옥 비녀로 도사 머리를 틀어 올려 수수하고 우아했다.

사람들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봤다.

현청관에서 보낸 사람이니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순 없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이런 어린 소녀가 정말 역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정미는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개의치 않았다.

‘난 그저 스승님의 명으로 온 것이니,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상관없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돼.’

정미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고의 상황이 어떤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장고의 부지사가 눈짓하자 어느 하급 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개했다.

“장고성을 피해 상황에 따라 네 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그중 북성구는 가장 큰 피해를 입어 7~8할의 가옥이 무너져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생존한 이재민들은 남성구로 이주하여 현재 북성구는 비어있습니다. 동성구는 그다음으로 피해가 심한 곳이지만, 역병은 오히려 동성구부터 시작되었고, 남성구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가장 피해가 적은 곳이 바로 여기, 서성구입니다.”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동성구의 역병은 어찌 통제하고 있나요?”

“그건―”

관원이 망설이며 부지사를 흘끗 쳐다봤다. 부지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의료진을 보내 진료를 보고 약을 처방했지만, 역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의원 몇 명이 전염되어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후퇴했고요. 현재 매일 약을 입구에 두고, 동성 안의 백성이 스스로 수령하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지진이 일어나면 도시보다 시골이 더 큰 피해를 입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을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관원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숨 쉬었다.

“지진이 일어난 후, 수많은 마을의 길이 끊겨 아직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몇몇 소도시의 인명피해는 집계되었고요. 소도시는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아직 역병에 대한 보고는 없었습니다.”

정미가 북명진인에게 말했다.

“사형, 최대한 빨리 동성구로 가 백성들을 구제해야겠습니다.”

“그래, 사매 네가 고생이 많겠구나.”

북명진인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우리와 동행해주실 분이 있소?”

이 말에 방 안엔 정적이 흘렀다.

동성구는 이미 집 열 채 중 아홉 채는 비어있는 상황이었다. 그곳에 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정미가 정적을 깨트렸다.

“사형, 우리 현청관의 제자들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정미가 차분한 표정으로 장고의 부지사에게 말했다.

“부지사님, 큰 양동이를 몇 개 준비해주세요. 아, 물을 질 멜대도 몇 개 필요하고요…….”

부지사는 정미의 분부를 듣다가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장, 제가 도장과 동행하겠습니다. 저는 이곳의 부지사이니, 지형과 상황을 잘 꿰고 있습니다.”

장고의 지진은 천재지변이었지만, 역병을 통제하지 못하면 부지사로서의 자질도 끝장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청관의 도장을 모셔놓고 그들끼리 동성구에 들어가도록 수수방관한다면, 관직은 물론이고 머리가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죽은 목숨이라면, 차라리 영광스럽게 죽는 게 낫지.’

부지사가 나서자, 진휼어사도 이어서 입을 열었다.

“도장,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저는 본디 황상의 명을 받아 이재민을 돕기 위해 왔으니, 도장을 도와야 마땅합니다.”

세상엔 늘 출발선을 끊어줄 사람이 필요한 법이었다. 두 사람이 이리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진심이든 아니든, 잇달아 동행 의사를 밝혔다.

동행할 사람을 추려낸 후, 정미가 말했다.

“나머지 분들은 잠시 뒤에 오세요. 저는 먼저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현청관 사람들이 떠나자, 관원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한참 뒤, 어떤 자가 입을 열었다.

“현미 도장이 정말 역병을 구제할 수 있을까요?”

진휼어사가 답했다.

“북명진인은 국사의 수석 제자이시다. 진인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현미 도장의 능력이 거짓은 아닐 거다. 다들 의심하지 말고 얼른 준비하거라.”

* * *

반 시진 뒤, 관원과 아역 그리고 도사로 구성된 행렬이 동성구로 향했다.

동성구에 임시로 설치한 격리지점에 다다르자, 입구를 지키던 하급 관리가 깜짝 놀랐다.

“대인,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이틀 전엔 꽤 많은 사람이 식량과 약재를 가지러 왔는데, 어제부터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오늘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요. 안에 사람들은 아마도―”

부지사가 손을 내저었다.

“잔말 말고 문을 열거라!”

하급 관리가 무릎을 꿇었다.

“대인, 정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하급 관리가 귀청이 떨어질 만큼 큰 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하자, 정미가 입을 열었다.

“대인, 이자는 목소리가 참으로 우렁차군요. 이자가 꽹과리를 치면서 집 안에 숨어있는 백성들을 불러내도록 하지요.”

하급 관리의 울음소리가 순간 멈칫하더니,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대, 대인. 설마 이렇게 어린 여자아이의 헛소리를 듣진 않으실―”

부지사가 정색했다.

“무엄하구나. 이분은 백성을 구제하러 온 현청관의 도장이시다. 도장의 눈에 들었으니, 꽹과리를 들고 함께 들어가거라!”

하급 관리는 입을 쩍 벌렸다. 울고 싶었지만 더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아 멍하니 ‘예.’ 하고 대답하고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악취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들은 불쾌한 듯 코를 훌쩍였다.

어느 도동이 작은 염낭을 건네자, 하급 관리가 멈칫했다.

도동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이건 저희 사숙조님께서 만든 구역부입니다. 몸에 지니고 있으면 역병에 감염되지 않을 겁니다.”

하급 관리가 주변을 쳐다봤다. 주변 사람들 모두 허리춤에 같은 염낭을 차고 있었다.

그는 급히 염낭을 건네받고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네 사숙조님은―”

도동이 뿌듯한 표정으로 정미를 가리켰다.

“이분이 바로 저희의 사숙조님이십니다!”

하급 관리는 완전히 멍해졌다.

‘흐어엉, 나 그냥 집에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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