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노인
다음 날, 조정 대신들의 희비가 교차했다.
그들은 서강의 내란과 곧 있으면 전쟁이 끝난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장고의 역병에 슬퍼했다.
“국사, 역사서에 의하면 70년 전 정양(靜陽)에 역병이 터졌을 때 국사께서 신술을 통해 만민을 구하였다고 들었소. 이번 장고 사태도 짐이 국사께 맡기고자 하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청령진인은 백관들 앞에 서서 차분하게 대답했다.
“폐하, 70년 전 정양의 역병은 제가 구제한 게 맞습니다. 허나 당시 빈도는 하늘을 거슬러 만백성의 목숨을 구했지만, 천벌을 받아 수도에 갇혀 한 발짝도 떠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창경제는 깜짝 놀랐다가, 장고의 상황이 떠오르자 다시 암울해졌다.
“예로부터 역병은 평범한 의원에겐 속수무책이었소. 이번 장고에 국사의 도움이 없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폐하, 걱정 마십시오. 며칠 전 빈도가 이미 북명과 현미 두 제자를 장고로 보냈습니다.”
창경제의 얼굴에 희색이 드러났다.
“오, 그렇다면 북명진인이 국사의 신술을 이어받아 장고의 역병을 구제할 수 있단 뜻이오?”
문무백관들의 무거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어찌 잊고 있었지. 북명진인은 국사의 수석 제자이자, 장래에 국사가 될 인물 아닌가. 분명 일찍이 국사의 의발(衣鉢)을 전수 받았겠지.’
청령진인은 차분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빈도의 구역술을 배운 제자는 북명이 아니라 어린 제자, 현미입니다.”
이 말에 사람들은 여기가 조정이라는 것도 잊고 양옆 사람들과 수군대기 시작했다.
창경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짐이 알기론 현미 도장은 국사의 제자가 된 지 겨우 일 년밖에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어찌 그런 신술을 배웠단 말이오?”
청령진인이 옅게 웃었다.
“도술은 아주 오묘하지요.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구역술은 우리 현문(玄門)의 팔도기부 중 하나입니다. 오성을 가지고 있다면, 배움의 시간과는 무관하지요.”
청령진인의 말에, 창경제와 조정의 신하들은 정미를 완전히 다시 보게 되었다.
‘그저 운 좋게 국사의 제자로 들어간 줄 알았더니, 국사께서 혜안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채고 받아들인 제자였구나.’
몇몇 사람들은 몰래 정수문을 살펴봤다.
‘이런 딸을 내쫓은 친아비라니, 눈 뜬 장님 아닌가?’
비웃는 듯한 눈빛을 받자, 정수문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 *
회인백부 둘째 나리인 정수문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찻주전자를 깨부숴버렸다.
“나리,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동 이낭이 몸을 숙이고 깨진 조각을 주우며 물었다.
한 씨의 혼수가 다 빠졌으니, 그 빚까지 갚으며 많은 식구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직위는 높았지만 실권은 없었기에, 회인백부의 살림은 나날이 어려워져만 갔다. 이에 얼마 전 하인들을 아주 많이 내쫓았고, 일손이 조금 부족하게 되었다.
정수문은 동 이낭을 보자 짜증이 나서 외쳤다.
“꺼져!”
동 이낭의 손이 떨렸고, 깨진 조각에 손이 베여 핏방울이 맺혔다.
정수문은 본체만체하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을 정실로 올린 뒤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네 딸은 동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태자가 폐위되었고 말이야!”
‘하지만 그 아이는 나리의 딸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동 이낭의 입술이 떨렸지만, 결국 변명하지 않고 자기 조각을 치운 뒤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염송당의 여종 아복이 급히 달려와 동 이낭을 스쳐 지나갔다.
동 이낭이 잠시 입구에 멈춰 섰다.
그때 아복이 정수문에게 말했다.
“둘째 나리, 큰일 났습니다. 노부인의 두통이 또 시작되었어요. 이번엔 너무 심하셔서 침상에서 이리저리 구르고 계십니다!”
집안 사정이 안팎으로 풀리지 않으니 정수문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는 동 이낭과 함께 염송당으로 향했다. 염송당의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맹 노부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어머니, 어찌 된 일입니까?”
정수문이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큰집 부부와 셋째 부인 풍 씨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맹 노부인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침상에서 뒹굴었고, 아끼는 아들이 오자 손을 뻗으며 외쳤다.
“둘째야, 머리가 아파 죽겠구나. 어서 정미를 불러오거라. 그 통증을 멈추는 부수가 필요해!”
“멍하니 뭐 하고 있소. 어서 어머니의 머리를 주물러드리지 않고!”
정수문이 동 이낭을 노려보더니 맹 노부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정미는 국사를 대신해 역병을 구제하러 장고로 떠났습니다.”
“그 어린 계집이 어찌 역병을 물리친단 말이야?”
맹 노부인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분명 그 망할 계집이 여기 오기 싫어서 핑계를 둘러댄 거겠지! 둘째야, 그냥 바로 현청관으로 가거라. 그 아이는 네 딸이자 내 친손녀다. 설마 제 조모가 아파 죽는 꼴을 보고만 있겠느냐? 오지 않겠다 하면, 곧바로 황상께 아뢰거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계집이 얼마나 큰 불효를 저지르는지 알게 해야 한다!”
맹 노부인의 손톱이 동 이낭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동 이낭은 아파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맹 노부인의 모습을 보니, 정수문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답답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그게 아닙니다. 오늘 조정에서 국사께서 직접 말씀하셨어요. 세상에 역병을 구제할 수 있는 자는 국사 외에 정미 한 사람뿐이라고요. 황상께선 그 계집이 성공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데, 어찌 그 계집을 처벌하시겠습니까.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정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어린 계집이 아닙니다.”
“상관없다. 상관없다고! 이 불효자 같으니, 내가 아파 죽는 꼴을 보기만 할 셈이냐?”
맹 노부인이 고함을 질러대며 통증과 분노를 참지 못했고, 동 이낭을 마구 때리며 꼬집어댔다.
동 이낭은 이가 부서질 듯 꽉 깨물고 그 고통을 참아냈다.
‘아파서 이성을 잃을 지경인데, 왜 큰부인과 셋째 부인은 때리지 않는 거람? 분명 내가 첩실에서 정실로 올라온 이라 그렇겠지.’
방으로 돌아온 뒤, 동 이낭은 병풍에 기대 통곡하며 깊은 후회를 느꼈다.
* * *
서쪽 군영.
막사 안, 위무행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모셔온 여섯 명의 의원에게 물었다.
“살릴 수 있소? 가망이 없는 거요?”
의원이 일어나 앞선 다섯 명의 의원처럼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렇게 심한 중상을 입었으니 이론적으론 이미……. 하지만 아직도 숨이 붙어있다니, 이런 경우는 제 의료생활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위무행은 눈을 질끈 감더니 주먹을 쥐고 중얼거렸다.
“다 내 탓이다. 다 내 탓이야!”
위무행 옆에 있는 키가 작고 호리호리한 사람은 창경제가 보낸 염감군이었다.
그는 위무행의 모습을 보고는 노의원에게 말했다.
“의원님, 연세가 많으시니 견문도 넓으시겠지요. 이런 상황에 대해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 겁니까? 이번에 우리 대량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어린 장군 덕분이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걸 차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창경제의 명을 전하러 온 사자도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천 리를 넘어 겨우 왔는데, 죽은 사람을 데리고 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면―”
의원이 잠시 망설이더니, 침상 위에 조용히 누운 채 조금의 반응도 없는 젊은이를 쳐다봤다.
위무행이 읍을 했다.
“무슨 방법이 있다면, 편하게 말해도 좋소.”
의원이 망설이며 말했다.
“장군들께서 이 늙은이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쫓아내실까 염려되는군요.”
“그냥 말해도 괜찮소. 절대 의원을 탓하지 않을 테니.”
“고리진(古里鎭)에 어떤 부의가 있는데, 아주 신통합니다. 누군가 희귀하고 이상한 병에 걸려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게 되면, 그 부의를 찾아 부수를 한 잔 마신다는군요. 그럼 십중팔구는 치료된다고 하더이다. 이 젊은 장군도 상황이 기이하니, 그 부의에게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허나 그 부의는 성질이 조금 이상하여…….”
“음―”
염감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골의 부의라면, 분명 사기나 치는 무당이겠지. 방법이 있을 리가.’
위무행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끝까지 포기해선 안 된다! 류 부장, 곧바로 이 의원을 따라 고리진으로 향하라. 반드시 그 부의를 모셔와야 한다.”
“예!”
저녁이 되었을 때쯤, 류 부장이 마침내 어떤 노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위무행과 다른 사람들은 그 노인을 보자 의심을 덜 수 있었다.
노인은 일흔 정도 되어 보였지만, 은발이 단정하게 빗겨있어 아주 정정해 보였다. 분명 류 부장에게 반강제로 끌려왔을 텐데도 침착하게 곧장 위무행에게 물었다.
“환자는 어디 있소?”
“나를 따라오시오.”
사람들이 우르르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노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윗대가리만 두어 명 정도 남으시오. 다른 사람은 밖에서 기다리고!”
“감히―”
류 부장이 눈을 부라렸다.
‘이 노인네, 성질이 정말 이상하군. 걸레로 입을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야!’
위무행은 경고하듯 류 부장을 흘끗 노려보더니, 염감군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막사 안의 정철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점차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숙여 정철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위무행은 깜짝 놀랐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노인은 위무행에게 눈을 부라리더니,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정철의 옷을 풀어헤치고 그의 뽀얀 가슴팍을 드러냈다.
위무행은 고개를 숙여 제 고동색 피부를 쳐다봤다.
‘똑같이 여기서 햇볕을 쬐었는데, 정 형제는 피부가 아주 희구나.’
감탄하던 위무행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뭐 하려는 거요?”
노인은 파리를 쫓듯 그의 손을 쳐내고는 차갑게 말했다.
“저리 가시오. 이 이상 방해하면 그냥 가버릴 테니!”
위무행은 손등이 아려와 저도 모르게 노인을 경외하게 되었다.
노인은 다른 자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정철의 가슴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뒤, 멍한 눈빛으로 그의 가슴을 만졌다.
위무행은 이마에 핏줄이 펄떡펄떡 뛰는 느낌이 들어 막사 안으로 몰래 머리를 들이밀고 훔쳐보던 류 부장을 차갑게 쳐다봤다.
‘도대체 진짜 신의를 데리고 온 게 맞나? 돌팔이이기만 해봐라, 내 아주 혼을 내줄 테니!’
노인은 마르고 거친 손을 정철의 가슴 위에 올리고 비비더니 중얼거렸다.
“그런 거였군. 그런 거였어!”
“어찌 된 일이오?”
위무행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 늙은이. 진료를 핑계로 정 형제를 희롱하다니, 더 이상 못 봐주겠군!’
노인은 아쉬운 듯 손을 거두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위무행을 빤히 쳐다보다, 정철의 가슴에 있는 호신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누가 준 거요?”
위무행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정 형제가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 같소.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모르지. 무슨 일인지 얼른 말해주시오.”
“그럼 분명 친밀한 사람이 준 거겠군.”
노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위무행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쯤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청년은 폐를 다쳤으니, 원래라면 바로 목숨을 잃었을 거요. 하지만 여태까지 숨이 붙어있고 가사 상태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저 작은 호신부 덕분이오.”
“어찌 그런 부적이 있단 말이오?”
위무행과 염감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를 쳐다봤다.